이근원통(耳根圓通)/공심거사

2014. 7. 23. 18: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1

이근원통은 관자재보살이 소리로 깨달음을 얻은,

소리와 청각을 집중하여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소리던지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있다 하고,

소리가 사라지면 소리가 없다, 또는 들리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집중하여 들어보라.

소리가 들리다가 소리가 사라졌을 때

소리가 없다 하는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아는 앎은 소리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항상 그대로 텅비어 있다.

그것이 소리가 있을 때 있다는것도 알고 없을 때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깨달아야할 그대의 본성이자 마음이다!!!!

 

안근도 똑 같다.

어떤 모습(형상)이 있으면 있다하고 없으면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없다하는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있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을 아는 그 무엇은

모양이 있건없건 상관없이 늘 그자리에 그냥 있는것이다.

 

나머지 감각기관도 다를것이 없는 것이다. 육근은 근본적으로, 통합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의식(마음) 작용이 기능적으로 분화된것일 뿐이다.

(듣는쪽과 대상, 보는쪽과 보여지는 대상등으로)

 

그 전체의식(공,마음)은 소리(형상,감각)가 있어도 있다는 것을 알고

없을때 없다는 것을 아는, 존재(있음), 비존재(없다)를 포함하여

텅 비어있는  한바탕이고 모든 것의 배경으로  (이원성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는,

전체성(불이, 비이원) 스스로의 아는 앎,  보는 봄인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깨달음은 모든 지각과 사유를(있다, 없다를 아는앎 ) 

초월하여 포함 하는것이다!!!!!

 

 

2

이근원통을 깨닫게 되면,

소리를 듣는 나와 소리(대상)로 따로 분리되어  들려오는 소리가

소리를 듣는 나는 홀연히 사라지고 소리만 남게 된다.

 

소리를 듣는 나(내)가 사라지면 들리는 그 소리는 내안에서 들려 오는 것이다.

이때의 나는 텅 비어있는 순수공(의식)인 것이다.

 

어떠한 소리든지 공자체인 내안에서 일어나는 나의소리로서(그소리 또한 비어있다)

둘이 아니다(不二).

 

안근원통도 마차가지이다.

어떤 모양을 보는 나와 보여지는 대상으로 분리되어 있던것이

모양을 보는 나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대상만 남는다.

 

보여지는 그 대상은 공 자체(대상이 드러난 그 바탕이고 배경)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떠한 모양 이든지 공 자체인 내안에 있는 나의 모습으로서(그모양 역시 텅비어 있어)

둘이 아니다 (不二).

 

모든 감각 기관(六根)들도 같은 원리이다.

이것이 깨달음의 기본 인것이다!!!!

 

존재, 비존재와 관계없이 일체는 순수공(空)자체인 그대안에 있고,

공(空)자체인 그대와 다르지 않다!!!!!!!!!!!!!

 

누가 어떻게 깨달았다 하는 말을 듣고 또는 책을 읽고 깨달음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깨달음은 순전히 그대의 직접적인 체험(증득)으로 깨어날 뿐이고 ,

책이나 말 속에는 깨달음이 없다!!!!!!!!

 

커피맛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들어서는 모르는 것이다.

커피를 직접 먹어 보는것이 직접적인 체험이고 깨달음인 것이다!!!!!!!!!!!

 

 

 

이근원통(耳根圓通)이란 무엇인가  

 

이근원통은 <능엄경>에서 열거하는 25가지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25가지 수행법 중에서 관음보살이 사용한 이근수행법을 가리킨다. 이근수행법이 기타 수행법에 비해서 가장 원통한 방법이라고 되어 있다. 원통이란 말은 가장 빠르고, 전체적이고, 쉽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근원통이란 어떤 수행법인가?  

현재 이 수행법은 북방불교권에서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수행법이다. 필자가 그 동안 인편으로 수집한 정보를 종합하여 추측해 보면, 이 법은 김화상의 사후에는 티벳으로 흘러들어가서 밀교의 전통적 수행법 중의 하나로 정착된 것 같다. 반면에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전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일부가 염불선이라는 형태로 변용되어 내려왔다. 그러므로 현재의 염불선에는 부분적으로 이근원통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긴 하지만 원래의 오리지날한 방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근원통의 본래 모습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현대의 인물은 대만의 남회근이다. 남회근은 이근원통을 관음법문이라 표현한다. 관음이라 한 까닭은 관세음보살이 행한 수행법이라는 뜻과, 소리를 관한다는 뜻의 2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이근원통 수행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이고, 다음에는 '듣는 놈을 돌리는'단계로 접어든다. 처음 과정이 끝나야만 반문문성의 과정으로 진입함은 물론이다. 먼저 소리에 집중하는 법을 알아보자. 소리를 집중하는 데 있어서도 다시 2가지 단계로 나뉜다. 내면의 소리(內耳聲)와 바깥의 소리(外耳聲)가 그것이다.


내면의 소리

이는 자기의 체내에서 내는 소리 즉 염불,  염주, 독경소리 등을 듣는 것이다. 염(念)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큰 소리로 염하는 것, 작은 소리로 염하는 것[금강념], 마음의 소리로 염하는 것[유가념]이 있다. 염할 때에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염불 혹은 염주하는 소리에 마음이 집중되었다가 안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점차 일념, 일성(一聲)에 마음이 집중되어 마음이 고요해진다.


여기에서도 보면 3단계를 설정한다. 일단 큰 소리로 염불이나 염주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성염불이 그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작은 소리로 염한다는 것은 입 속에서 웅얼웅얼하는 것이다. 이 상태를 계속해서 지속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웅얼웅얼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마음속으로 염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염불이나 주력 혹은 독경을 오랫동안 지속함으로써 수행의 힘을 얻는 경우는 이러한 경우이다.


요가에서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방법이 계발되어 있다. 비음관상법(秘音觀想法)이 그것이다. 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눈은 감고서 내부의 소리를 듣는 방법이다. 여기서 내부의 소리라는 것은 심장에서 나는 비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명상법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할 수 있다고 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두 귀를 막고 네 번째 챠크라인 아나하타 챠크라에서 나는 비음 나다(nada)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 소리에 의식을 집중함에 따라서 내부의 소리가 외부의 소리를 압도한다. 보름 정도를 하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외에도 쿤달리니(Kundalini)라고 부르는 원초적 에너지가 폭발할 때도 내면에서 소리가 들린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인체의 각 챠크라를 통과할 때 소리가 난다. 북소리, 종소리, 파도소리, 플룻소리 등이 그것이다.


이는 수행자 본인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임은 물론이다. 무케르지(Mookerjee)는 그 소리를 4가지 형태로 구분하기도 한다. 거대한 것으로부터 가장 미세한 것의 순서로 바이카리[형식으로 실현된 음], 마드야마[미세한 형식의 음], 파시얀티[미분화 된 형식으로 우주에 대한 상이 내재해 있는 음], 파라[들을 수 없는 음] 등이 있다.


바이카리는 청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음의 단계로 양 표면이 서로 부딪칠 때나 또는 현을 뜯을 때 생성된다. 마드야마는 들리는 음과 내부 진동과의 과도기적 단계를 이른다. 파시얀티 단계에 이르러서는 음은 오직 영혼이 깨어 있는 수행자에게만 들릴 뿐이며, 파라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음은 청각적인 성질을 훨씬 넘어서는 그 무엇을 의미하게 된다. <능엄경> 권6에는 묘음, 관음, 범음, 해조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도 쿤달리니가 통과할 때 들리는 소리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바깥의 소리

어떤 소리든지 물체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이 흐르는 소리나 폭포소리 또는 바람이 불어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나 범패소리를 듣는 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이 소리에 완전히 집중되었을 때 능히 졸지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이런 경지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바깥의 소리에 집중한다고 할 때 가장 보편적인 소리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이다. 이는 가장 쉽게 정(定)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근원통의 마지막 단계는 반문문성이다. 듣는 성품 자체를 다시 반문한다는 의미이다.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된 다음이라야 지극히 요긴함이 된다. 무릇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되면 부처님의 광명과 보리수와 무설시와 중향처에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期於遺聞反聞然後爲至要 夫至於遺聞返聞則佛光明 菩提樹無說示衆香處皆可入矣)

 

듣는 것, 즉 소리에 대한 집중도 놓아버리고 무설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반문문성이다. 무설시란 아무것도 설하는 것이 없는 경지로서, 무상이 인성염불이 다한 뒤에 제시한 3구와 상통하는 의미라고 판단된다. 즉 무설시는 무억, 무념, 막망의 경지인 것이다. 반문문성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방법이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공안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위 염불공안법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운서주굉(1535~1615)이 <선관책진>에서 주장한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라는 공안은 이근원통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반문문성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 또는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를 돌파할 때 소리를 넘어선 무설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것이 무상이 말한 삼구이고 무주가 말한 무념의 경지라고 여겨진다.


이근원통의 방법을 다시 정리하면 일단 바깥의 소리 또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소리의 종류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도 가능하고, 염불, 주문, 독경소리도 가능하다. 이때 염불이나 주문, 독경이 지니는 문자적 의미는 문제가 안 되고 오직 소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좀더 나아가면 인체내의 챠크라가 돌아갈 때 발생하는 북소리나 플룻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소리마저 떠나버린다.

 

<조용헌 교수>


 - 공심님의 까페주소

http://cafe.naver.com/mindhealingc  

 

 

<과거에 머물러있지 마라>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입니다.

잘 나가던 ‘한때’를 잊지 못해 과거에 머무는 사람들과

~할 껄’하고 후회하며 과거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류시화 시인이 읊었습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당신은 과거에 머물러있는 이미 죽은 새입니까?

아니면 열심히 날갯짓하며 현재에 살아있는 새입니까?

 

 



달맞이꽃 / 권태원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밤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 하루도 울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하여
가슴 속에 등불 하나 밝혔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녁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밤에도 별 하나가 빛나고 있습니다

 

 



달맞이꽃 -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