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만유의 생명의 실상(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새로운 휴머니즘)/청화큰스님

2014. 8. 20. 18: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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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만유의 생명의 실상(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새로운 휴머니즘)

청화큰스님

 무릇, 모든 종교의 쇠락현상은 후기산업사회의 팽배한 물신物神 풍조 아울러 각기 종교사회의 분열갈등과 편협한 신앙근본주의의 소산으로서 그 폐해는 가히 세계적 규모로 확산되어 심각하게 인류사회의 평화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같이 혼탁한 역사적 혼란과 종교사회의 누적된 질곡을 벗어나는 일이 너무나 벅차고 험난한 형극荊棘의 길이기는 하지만, 우리 광륜법우들의 투철한 반야지혜와 불퇴전의 정진력은 한사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선구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사회는 비록 동북아시아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상처투성이의 한 많은 분단의 땅일지라도, 우리는 세계사의 숙명적 냉전冷戰 사생결단으로 대결하는 처절한 현장에서 오직 화해와 평화공존만이 우리 인간존재의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천혜天惠의 기회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대립을 비롯하여 천차만별로 반목갈등하는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일체만유의 생명의 실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입각한 가장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새로운 휴머니즘에 의해서만 비로소 홍로점설紅爐의 해결이 된다는 자명 自明한 도리를 명증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사회의 공동선共同善의 근원은 바로 동서양 모든 성聖者들의 무아평등無我平等한 한결같은 교훈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시대의 필수적인 과제는 우선 각기 기종교신앙에 대한 순수한 정통성 확립과, 다른 세계적 종교에 관한 깊은 연찬硏鑽을 통한 화해협력의 증진인 것이며, 그것은 바로 우리 종교인들이 결코 피할 수도 없고 지체할 수도 없는 절박한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종교인들이 진정한 구도정신으로 인류사회의 대화회통大和會通을 위하여 혼신의 보살행을 다할 때, 우리는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반드시 빛나는 역사적 향도嚮導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광륜법우들의 비장한 서원과 환희용약하는 자랑이있습니다.

유식삼성(唯識三性)

청화큰스님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정유리무(情有理無)…실무망유(實無妄有)…유(有)

2. 의타기성(依他起性)…여환가유(如幻假有)…공(空)

3. 원성실성(圓成實性)…정무리유(情無理有)…실유망무(實有妄無)…중도(中道)



그 다음 법문은 ‘유식삼성(唯識三性)20)’이라. 오직 유()자, 알 식()자. 식 이것은 의식(意識)이란 식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식, 이것은 우리 의식만의 식이 아니라 의식보다도 더 깊은 이른바 말나식(末那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그 다음 깊은 식은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그리고 모든 식의 근본 바닥은 부처입니다.

20)유식삼성(唯識三性)에는 ①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② 의타기성(依他起性)

    ③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다


우리 마음 바탕은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불교는 여기까지 알고 보면 알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음의 바닥은 '말나식'이라는 그런 마음인 것이고, 그 마음이 또 ‘아뢰야식’이라는 모든 종자를 갈무리하는 그 마음인 것이고, 그 바탕이 또 ‘암마라식’이라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또 그 바탕이 부처님이라. 이른바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유식(唯識)이라 할 때 이것은 다 통해서 천지 우주 모두가 다 오직 식()뿐이다. 이런 도리입니다.

이 때 유식은 물질이나 정신이나 어느 것이나 다 포함됩니다.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오직 식뿐이라는 이런 뜻입니다.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 

모두가 식 뿐인 것인데 이것도 역시 나누면 세 차원이 있습니다. 식을 다 아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우리 인간의 의식밖에 모르는 사람이 따지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에 앞서서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라.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우리 중생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렇게 흘러가는 세계가 삼계 아니겠습니까.

삼계도 역시 오직 마음 뿐입니다. 마음 잘못 먹으면 나쁜데 태어나고, 마음 잘먹으면 좋은데 태어나고, 그러나 실은 무생물이고 자연계고 모두가 다 오직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단단한 금()이나 은(), 이런 금속은 유심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이나 은도 역시 내내야 금의 원소, 은의 원소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들 역시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걸로 된 것이고 따라서 어느 것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모두가 에너지 뿐입니다. 장() 에너지의 본질 마음 즉, 유심(唯心)뿐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나와서 굉장히 편리합니다. 물리학이 모든 물질은 다 에너지다. 이렇게 부처님의 ‘색즉공’을 제대로 말해 있단 말입니다.

그 근본 바탕을 다 말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선 공도리를 말해 있습니다. 따라서 공도리만 알아도 굉장히 살기가 편합니다. 그냥 직속으로 가뿐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우리 몸뚱이 간수하고 지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입혀야 하고, 멋도 내주어야 되고, 음식도 영양 가치가 있어야 되고, 집도 살면서 이리저리 돌봐 주어야 되고, 저같이 다 포기하고 지내다 보면 자기 몸뚱이 별로 관심을 안 두면 참 편합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고, 지내다 보면 어느 분이 생각한다고 뭘 갖다 주시면 그걸 좀 먹어 놓으면 몸만 무겁고, 지금 우리 인간만이 음식에 너무나 곪아 빠져 있습니다. 천상(天上)에 올라가면 음식이 없습니다. 귀신도 냄새만 맡습니다.


우리 생각으로 인간이 다인 줄 알지만 인간은 저 지옥보다는 훨씬 높고 짐승보다 높고 아귀 귀신보다도 높다 하더라도 천상에 비해서는 저 밑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절대로 만물의 영장이 아닙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서 만물의 영장이지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보다 높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높은 세계는 음식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색계에만 올라가도 남녀이성도 없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남녀가 다 각각 쌍쌍인데 귀하게 살 것이지 중 돼서 뭘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세계나 다 남녀 양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욕계 내에만 남녀가 있습니다. 색계 이상은 남녀가 없습니다. 하물며 극락에서는 어디 남녀가 있겠습니까. 극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을 깨달은 성자만 지내는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다 부인해 버리지만 부처님 말씀은 사실은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무색계에 올라가면 마음만 존재합니다. 모양도 없고, 색계는 욕심도 없고, 우리 몸은 훤히 빛나는 광명(光明)뿐입니다.

인간 세계만이 이와 같이 오염된 몸뚱이가 있습니다. 오염된 것을 많이 먹으므로 항시 오염될 수밖에 없겠지요.


최초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몸에서도 광명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행자재(飛行自在)라. 천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지구에 내려와서 이것저것을 먹다보니 오염되고 무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남녀 차이가 생기곤 했습니다. 애초에는 남녀 차이도 없었습니다. 먹다 보니까 신진대사(新陳代謝)할 필요 때문에 차근차근 남녀 성()이 구별된 것입니다. 색계 이상 올라가면 남녀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부나 수녀나 비구나 비구니가 그렇게 독신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남녀 양성이 꼭 결합해서 같이 부부가 돼야 한다는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되어도 좋고 안되면 더욱 좋고 말입니다.

 

 

 

유식삼성 (唯識三性)

청화큰스님

 

 



유식삼성(唯識三性)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정유리무(情有理無)

2. 의타기성     (依他起性) …여환가유(如幻假有)

3. 원성실성     (圓成實性) …정무리유(情無理有), 진여(眞如),

                                             진공묘유(眞空妙有)

※ 위의 삼성(三性)으로써 비공비유(非空非有)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함.


   

일체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 오직 마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심(唯心)이나 유식(唯識)은 똑같은 뜻입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조금 차이있게 풀이가 됩니다만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품(性品)에 여러 가지 구분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마는, 우선 간추리면 삼성(三性)이라, 세 가지 성품으로 줄여서 말씀합니다. 이런 법문은 불교 전반적으로도 되어 있으나 불교 심리학인 유식론(唯識論)에서 말씀하는 법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우리 중생은 절대로 바로 못 봅니다. 그러나 바로 못 보는 견해를 옳다고 생각해서 고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중생의 습기(習氣)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 견해가 절대로 옳지가 않다’ 고 하는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 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보는 견해가 상대유한(相對有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절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지혜에 들어갑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란, 두루 계교(計較)하고 헤아려서 집착(執着)하는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의 성품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일체 만물을 좋다 궂다 옳다 그르다고 자꾸만 헤아리고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서 집착하는, 내가 아는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마음, 이것이 변계소집성 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중생의 망정(妄情)인 망령된 정()에는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진리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진리에는 없습니다. ‘저 사람이 밉다’ 하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린 마음에서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미운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나의 망정(妄情), 나의 망상(妄想)에만 있지 참다운 진리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 이와 같이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만 있고 참다운 이치에는 없는 것, 그것 가지고 싸우고 좋아하고 전쟁까지도 합니다. 인류 위기 상황도 무엇인고 하면, 이러한 정유리무(情有理無)의 법, 중생의 상대유한의 망정에만 존재하고 참다운 진리에는 없는 것 가지고서 억지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두루 두루 헤아려서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 뿌리쳐 버리면 우리 집안이나, 우리 가정이나, 우리 마을이나 평화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무지(無知)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 역시 인연 따라서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 는 말을 흔히 말로는 쉽게 합니다만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사람 하나가 존재한다 해도 천지우주가 거기에 다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하더라도 역시 꽃씨나 태양이나 또는 그 당시 기후나 또는 수분이나 이런 것만이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모두가 거기에 다 관련이 있습니다. 직접 간접으로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다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나 또는 태양광선이나 어떠한 것이나, 우주의 저 변두리에 있는 그야말로 극지(極地)에 있는 어떠한 공기나 어떠한 미세(微細)한 존재라도 거기에 다 관계가 있습니다. 단, 직접 간접의 차이가 있을 뿐 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관계들을, 먼 것은 안 보이니까,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체 만유의 것은 결국은 타()에 의지해서 일어났다[起]는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하나의 존재는 일체 만유(萬有)를, 일체 만물을 다 인연(因緣)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나올 때는 일체 만물을 다 인연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람이 태어날 때는 어머니와 그 아버지만이 인연이 아니라 무수한 인연이 모인 것입니다.

가사, 오행(五行)을 보는 사람들이 하늘의 별도 보고 또 여러 가지 사주풀이를 할 때 그 사람이 태어난 시(), 난 날(), 난 달() 이런 것을 보는 것도 역시 저 북극성이나 하늘의 별들과 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오행풀이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항시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을 다, 모든 천지 만유를 의지해서 나오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허깨비같이 가짜로 임시간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나오고 또는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일체 현상, 이것은 마치 바다에 뜬 거품모양으로 사실이 아니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일어난 허깨비같은 가짜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허깨비같은 존재를 중생들은 망정(妄情)으로, 망상(妄想)으로 헤아려서 좋다 궂다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궂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쁜 것도 미운 것도 아닌데 중생이 괜히 자기 뜻으로 헤아려서 좋다 궂다 고집하고 싸우고 또는 사랑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참다운 성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원만히 성취된 참다운, 실다운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실존(實存)이고 실상(實相)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우리 중생의 망정(妄情)에는 없지만 참다운 이치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실상(實相)이 보입니까? 우리는 불성(佛性)도 못 보고 진여(眞如)도 못 봅니다. 부처나 여래(如來)나 그런 것을 못 봅니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否認)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망정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망정에는 없으나 원리(原理), 참다운 이치(理致)에만, 근원적인 이치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시(問題視)하는 것은 실상(實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가 인생고해(人生苦海)아닙니까. 그러나 천박한 사람들은 인생 고해마저 잘 못 느낍니다. ‘인생은 향락이나 하고 멋대로 즐기는 것이다’ 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고해라고 생각하면은 웬만한 것은 잘 참습니다만, 인생은 원래 행복스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고생이 오면 그냥 나에게만 왔다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상(實相)은 결국은 고생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낳는 것도 고생, 사는 것도 고생, 또 아파서도 고생, 죽어서 고생, 늙어서 고생, 헤어져서 고생 모두가 고생인 것입니다. 안락(安樂)은 잠깐, 순간순간, 고생의 막간막간에서 존재하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고생 뿐입니다.

   

신라 때 사복(蛇福)이란 사람이, 어머니는 절에서 종이었는데, 열두살 먹도록까지 벙어리같이 말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천치같이 보고 바보같이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깊은 선정(禪定)에 잠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어머니가 돌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복이가 그 당시 위대한 성인인 원효(元曉) 대사한테 가서, 어머니 장사를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성인(聖人)과 성인끼리는 알아놔서, 사복이가 말은 못 했지만 위대한 성인인 원효 대사는 안단 말입니다.

원효 대사가, 그러자고 하고서 같이 장사를 지내는데, 그 시체에 대해서 원효 대사가,

‘낳지 말라 죽는 것이 고생이니라. 죽지 말라 낳는 것이 고생이니라’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임종법문(臨終法門)이라, 죽을 때에 영혼한테 대해서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바와 같이 생자필멸(生者必滅) 아닙니까. 한번 낳아지면 결국은 죽어지는 것이고, 또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 아닙니까. 역시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그러한 무상법문(無常法門)을 원효 대사가 시체한테 했다는 말입니다.

‘낳지 말라. 죽는 것이 고생이니라’ 한번 낳아놓으면 결국은 죽는 것이 정칙(定則)이니까 말입니다. ‘죽지 말라. 낳는 것이 고생이니라’ 한번 죽어 놓으면, 해탈(解脫)을 못해버리고 윤회(輪廻)할 바에는 이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고생이요 또 어린애 배서 고생, 날 때 고생, 또는 크려면 고생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사복이가 듣고 있다가 ‘스님, 말씀이 너무 깁니다. 낳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 고생이니라’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것은 여담일 망정 하여튼, 이와 같이 인생은 모두가 다 고생입니다.

   

그러나, 인생고를 떠나는 데는 단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불교 말로 해서는 ‘백도(白道)’ 라 합니다. 다 어두운 길인데, 광명 길로 가는 하나의 외줄기 밝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 길이 무엇인가? 이것이 원성실성(圓成實性) 곧, 영원적인 참다운 성품을 우리가 찾는 길입니다.

원성실성을 다른 말로 하면, 불성(佛性)ㆍ부처()ㆍ열반(涅槃)ㆍ도()ㆍ극락(極樂)또는 실상(實相)이라 합니다. 다 똑같은 뜻입니다.

   

시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우주에 가득차고, 또 영원하고, 일체 공덕이나 모든 재주를 다 갖추고, 이러한 것이 원성실성이고 다른 말로 하면 진리ㆍ도ㆍ부처ㆍ하나님이라 하는데 다 같은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말이 많으니까 그냥 말 때문에 혼란을 느껴버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경(佛經)을 보더라도 이런 원리(原理)를 아는 분들은 그냥 척척 알게 되는 것인데, 조금 어려우니까 말 때문에 그냥 혼동을 당해 가지고서 혼미(昏迷)를 느껴버리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 구하는 불성이나, 성불이나, 또는 열반, 극락이나, 도나, 진리나 또는 주인공이나, 본래 면목이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있다는 고집으로 느끼는 망정(妄情), 범부의 망상(妄想)에만 존재하고서 실제(實際)는 없는 것이 현상세계 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비유하는가 하면, 불가(佛家)에서는 사승마(蛇繩麻)라 합니다. 뱀 사()자, 새끼나 노끈 승()자, 삼마()자 입니다.

   

사승마란 무엇인고 하면, 맨 처음에 말한,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고집하는 견해 이것은 마치, 어슴푸레한 때에 새끼 토막이 있으면 그것을 잘못 봐서 뱀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새끼 토막인데 어슴푸레하여 광명이 없으니까 잘못 봐서 뱀으로 보는 정도의 것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역시 하나의 새끼 토막이지요. 그래서 새끼 토막은 의타기성(依他起性)에 해당합니다. 뱀으로 본 것은, 다만 우리 망상으로 본 것이요 바로 못 봤지마는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새끼 토막이 있습니다. 인연따라 일어난 것은 의타기성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여환가유(如幻假有)라, 다만 이것이 임시간(臨時間) 새끼로 만들어져서 새끼 토막이 되었던 것이지 역시 짚이나 삼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새끼 토막의 본바탕, 본질(本質)은 삼()이나 짚이나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새끼 토막을 이룩한 본질, 본바탕은 짚이나 삼이기 때문에 삼이나 짚, 이것은 본질인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해당합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이러한 것을 못 보고 다만 어두컴컴할 때에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견해로 사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야 합니다.

사승마(蛇繩痲)라, 우리는 지금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쁘다 밉다 하는 것이 말입니다.

눈물없이는 볼수없는 글!!

하나 밖에 없는아들을
일찍이 서울로 유학보내고,
두 부부는 고생 고생하며
학비를 조달하여 대학 졸업시키고….

지금은 재벌회사 과장까지 승진하여
강남 아파트에서
명문대학 나온 우아한 아내와
잘살고있는 아들은 정말이지
이 부부에겐 크나큰
자랑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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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여간 효자가 아니어서
추석이나 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제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와서
명절을 보내고 올라가곤 했었답니다

우아한 며느리와
공주같은 손녀딸을 볼 때마다 노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으쓱대는
기분을 느끼곤 하였지요.

아들 내외는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아버님 어머님 시골에서 이렇게
고생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서울로 가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아니다.
우리같은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서울이 다 무에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고향땅에 묻힐란다" 하고 사양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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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면서도 노부부는
언젠가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서
아들 덕택에 호사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 했더랍니다.

그러다가 노부부중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상을 치르는 내내 아들 내외가
어찌나 애통하게 엉엉우는지
동네사람들도 모두 가슴이 찡하였답니다.

초상을 치르고 나자
아들 내외는 또다시 간곡하게 청하였답니다.

"아버님,
이제 어머님도 가시었으니 어쩌시렵니까?

고향집 정리하시고
서울로 올라가시어
저희와 함께 사시도록 하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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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도 떠나간 이제,
그도 그럴것이다 싶어
노인은 몇날을 생각타
결심을 하였답니다.
논밭과 야산등…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답니다.

가산을 정리한 돈은
아들 내외에게 주어
32평아파트에서 42평 아파트로 옮기고
노인의 서울생활은
처음엔 그런대로 평안하였답니다.

그즈음 아들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할 때도 되었고,
회사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였으므로
매일을 새벽에 출근하였다가
밤12시가 넘어서야 퇴근 하는 일과가
몇 달이고 계속되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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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보니
집안이 썰렁하니 비어 있더래요.
다들 어디 갔나? 하던 차에
식탁위에 있는아내의 메모를 보았더래요.

메모에..
- 여보 우린 모처럼 외식하러 나가요.
식사 안하고 퇴근하였다면
전기밥솥에 밥있고
냉장고 뒤져 반찬찾아 드세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속을 뒤져
맥주를 찾아서 마시고 있자니
현관쪽이 시끌해지며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 그런데 들어오는 걸 보니
아내와 딸 둘만 보이는게 아니겠어요?

"왜 둘만이지?"
"둘만이라니? 요기 밍키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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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강아지를
남편의 눈앞에 들어보이며 활짝 웃었습니다.

"아니, 아버님은?"

"오잉? 아버님 집에 안계셔?
어디 노인정이라도 가셔서 놀고 계신가?"
"아버님이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나?"

남편이 약간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웅, 으응…" 아내는 더듬거렸습니다..

사실 아내는 평소에
노인이 몇시에 나가서 몇시에 들어오는지
도통 생각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노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노인이 들어오실 때까지
자지않고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서재의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아내는 벌써 잠들었나 봅니다.

그때 아들은 책상 한켠에 정성들여
접혀진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볼펜으로 꾸~욱 꾹 눌러쓴 글씨…
무슨 한이라도 맺힌듯이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씨…
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었습니다.
잘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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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도 넘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노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들은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에 잠깁니다.

"잘 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 시간까지 아버지가
귀가 안 하신걸 보면
가출하신것이 틀림 없는것 같은데...

한데…왜,왜,왜…???
아들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평소에 햇볕이 잘 드는 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정 넘은 오밤중이긴 하지만
왠지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습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빨랫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빨랫줄에는 팬티 두장과
런닝셔츠 두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것이겠지요.

방 한켠에는
어린 딸의 옷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이제 그만 지겨워한다고
옷장을 더 예쁜 것으로 바꿔주고 나서
아마 이 헌옷장을 아버지 몫으로 돌린 모양입니다.

옷장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얼굴입니다.

상치를때 영정으로 사용하던 사진입니다.
방구석에 소반이 있었습니다.

소반 위에는 멸치 볶음, 쇠고기 장조림,
신김치등이 뚜껑있는 보시기가 몇개 있었고
마시다가 반병 정도 비어있는
소주병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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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아버지…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녀딸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 동안 이 골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시고 계셨던가요?

아아~~, 아버지…
며느리도 있고 세탁기도 있는데…
아버지는 팬티와 런닝을 손수빨고
이 방에서 손수 말리고 계셨던가요…?

아들은 무언가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고 싶은 자괴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자
아들은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나 노인이 어디선가 밤을 지새운
흔적이 있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가서는
노인의 가출을 신고하였습니다.
고향에 이장 어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3번아 잘있거라 6번은 간다…



이 암호를 우선 풀어야
아버님을 찾을수 있을것같은 마음에
아들은 조바심을 쳤습니다

직장동료, 상사…대학동창등….
현명하다는 사람은 다 찾아
이암호를 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 암호를 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날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들은 이제 부장진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없고…
오로지 아버님 생각만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
술한잔에 애잔한 마음을 달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자네 김아무개 영감 자제가 아니던가?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영감님이
아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아, 예…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웅, 난 김영감 친굴세…
근데 요즘 왜 김영감이 안뵈네?
그리구 자넨 왜 그리 안색이 안좋은가?

그래서 아들은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가출한 얘기를
간단히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님에게
이제는 유서가 되다시피한
그 암호문을 내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영감님은 그 쪽지를 한동안 보더니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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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 자네 이것이
무슨뜻인지 모르겠다구?
이사람아,
김영감이 늘 얘기하곤 했지….

우리집에서는 며느리가 젤 위고
두번째는 손녀딸이고
3번이 아들이라고 했지
4번은 강아지 밍키고…
5번은 가정부라 했네.

그리고 김영감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번이라 하고는
한숨짓곤 하였지…..

그러케 쉬운것도
자네는 풀지 못하나? 에잉…"
아흐흐흐흑…
아들은 그만 눈물을
주루루룩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찌 아버지가 6번입니까…
1번, 아니 0번 이지요…
돌아서는 아들의 등 뒤로
영감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고향엔 면목없고 창피해서
아니 가셨을 거여..
집 근처에도 없을거고..
내일부터 서울역 지하철부터 찾아보자구...
내 함께 가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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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몇번입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아버지 여러분 ...
당신은 몇번이며
당신의 아버지는 몇번입니까..?

아버님..!!
영원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