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 -청화 스님

2014. 8. 13. 07: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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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는 길

                                                                              청화큰스님

 

  

위 없는 부처님의 이른바 법왕법(法王法)은 말을 떠나고 또는 일체상(一切相)을 떠나 있습니다.

상대적(相對的)인 말이나 형상은 제대로 진리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오를 때는 마땅히 상(相)을 떠난 법문(法門), 또는 말을 떠난 법문, 즉 우리 중생의 상대 유한적(有限的)인 말을 떠난 참다운 진언(眞言)을 법문(法門)해야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棒)을, 몽둥이를 텅텅 내리치기도 하고 그래서 선기(禪機)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 따라서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해설(解說)이 깃든 법문을 제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까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하고,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그런 예식을 올렸습니다.

양족존(兩足尊)이라는 말은 어떤 것인가.

아시는 분은 다 아십니다만은 이것은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그러한 모든 덕성(德性)을 완전히 구비한, 완벽하게 구비한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의 공덕(功德)의 속성은 비단 자비나 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량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자비와 지혜 두 속성을 들어서 부처님의 공덕을 대표해 표현합니다.

부처님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특히 우리 불자(佛子)들은 이런 질문을 항시 하게 됩니다.

부처님한테 귀의해서 일년 된 분이나 또는 10년 된 분이나, 몇십년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아직 완전히 못되고서는 즉 다시 말씀드리면 성불(成佛)하지 못한 그런 차원(次元)에서는 어느때나 부처님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을 바르게 해답할 수 있어야 우리 수행법(修行法)도 바르게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앞서 대체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말로나 문자로는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시간성(時間性)과 공간성(空間性)과 또는 인과율(因果律)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現象的)인 형상(形象)만 보고 상대적인 문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현상적(現象的)인 문제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현상과 현상의 본래 모습인 실상(實相)을 모두 하나의 것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안목(眼目)이 짧아서 실상(實相)을 보지 못하고 현상(現象)만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참다운 세계, 참다운 성품(性品)의 세계가 우리 중생이 볼 수 있는 현상의 세계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현상 이것은 모두가 다 실상에서 형상화(形象化)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서 바닷물 자체는 실상 곧 체(體)에 비교한다고 하면,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천만가지 거품이나 파도는 현상적인 용(用)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닷물을 떠나서 파도와 거품이 없듯이 현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 한계상황(限界狀況)을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이 현상적(現象的)인 세계만 본다면 우리 중생은 평생동안 인생 고해(苦海)에서 헤매다가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실향민(失鄕民)입니다. 근본(根本)을 떠난 우리는 모두가 다 실향민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1천만의 실향가족 때문에 서로 피차 가슴을 앓고 있는 셈입니다마는 비단 이북에서 온 1천만의 동포들만 실향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세계 50억 인총(人總)이 모두가 다..... 성자 이외의 범부 중생은......... 자기 고향을 떠난 실향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성품을 스스로 체험 못한 사람들은 비록 제아무리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학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향민의 범주(範疇)를 못 벗어나 있습니다. 불교는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본성을 찾는, 참다운 고향을 찾는 공부입니다. 참다운 고향을 찾는데 지금 나는 어디만큼이나 가 있는가. 이렇게 자기를 성찰(省察)해 보고 자기 반추(反芻)를 해봐야 합니다.

이번에 3박 4일 동안에 공부를 참 잘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말씀 드리기를 우리 중생,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안락은 오욕락(五欲樂)이라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쾌락을 추구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욕락이란 다 아시는 바와같이 재(財), 색(色), 명(名), 식(食), 수(睡)라. 재물이나 또는 이성(異性)간의 욕심이나, 명예 욕심이나 음식 욕심이나 잠 욕심이나 이런 것이 분명 오욕락인데 우리 중생들은 이런 오욕락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행복이 전부라고 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나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소크라테스 등의 성인(聖人)들은 이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바이블을 본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이 말은 키엘케고르가 이것을 제목으로 해서 글을 썼습니다마는... 우리 중생은 지금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하면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이 모두라고 생각하고서 참다운 실상적(實相的)인 본성품(本性品)을 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성품인 참다운 고향자리를 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향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실향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계(現象界) 이것은 사실은 인연 따라서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로 실존적(實存的)인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루터"가 법문(法門)을 할 때는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 물론 그의 법상은 우리의 법상과는 다르겠습니다만 - 설법대에 올라가면 먼저 가만히 하늘을 한참 우러러 본 다음에 설법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영원적인 진리하고 자기하고의 거리를 없앤단 말입니다. 상당(上堂)에 올라가서 하는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영원적인 차원(次元)을 안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로 성불이기 때문에 가는 길이 바로 참다운 성품 자리를 가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한 발짝만 벗어나 버리면 생사기로(生死岐路)라 죽고 사는 길에 떨어지고 맙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어떤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오욕락, 즉 재물에 눈이 어둡고 또는 이성간의 욕망에 눈이 어둡고 또는 명예(名譽)나 또는 식욕이나 잠욕심 등 이런 것에 얽힌 생활은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재물도 잠도 또는 음식도 자기 몸뚱아리까지도 결국 스러지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어느 땐가는 죽고 맙니다. 어느 땐가는 소멸해서 목숨 한 번 끝나버리면 이 몸뚱아리는 흔적도 없습니다. 내생(來生)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몸뚱아리 이대로 생(生)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平生)의 자기 행위 따라서 다시 다른 몸을 받는 것이지 이 몸은 이 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몸뚱아리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변동(變動)해 마지않는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이 몸뚱아리는 오늘 죽을는지 내일 죽을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에 우리 마음을 얽매어 산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고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상대유한적인 것에 얽매어 사는 이런 생활은 죽음에 이르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만 밖에 나가도 모든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맙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는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곧 우리가 이북과도 합해야 할 것인데 주체사상(主體思想)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우리 한국민족 가운데서 천오백만을 헤아리는 신도를 가진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유교(儒敎)는 어떠한 것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 살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에 명확(明確)한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슬기로운 어머니가 되고, 슬기로운 아버지가 되고, 또 슬기로은 스승, 총명한 사회인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바른 사회인도, 바른 어버이도, 바른 스승도 못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 다른 이데올로기와 비교해서 생각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에 있어서는 20대부터 자기 인생관(人生觀), 자기 철학관(哲學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참다운 길이 어떤 것인가. 우주의 본 바탕은 어떤 것인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생각을 떠나서 영생으로 변치 않는, 움직일 수 없는 부동(不動)의 진리는 어떤 것인가. 이런 가르침,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 뿐만 아니라 바이블이나 유교의 경전이나 또 마호멧트의 코오란이나 모두가 다 죽는 가르침이 아니라 죽지 않는 영생의 가르침입니다.

무상하기 그지없는 자기 몸뚱아리라든가 또는 재산이나 명예나 이성간이 욕망이나 이런 것을 떠나서 참다운 변치 않는 불멸(不滅)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각 성자(聖者)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향을 가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넓은 바다를 건널는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어디만큼 와 있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이번 정진(精進) 허두에 우리의 오욕락 이것은 허망한 것이니까 꼭 법락(法樂)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법락이란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입니다. 적어도 부처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삼매(三昧)라 하는 용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독서삼매(讀書三昧)라. 또는 무슨 삼매라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삼매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마음이 산란(散亂)스럽지 않고 바른 도리, 참다운 도리에 우리 마음이 딱 모아진, 그 자리가 삼매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더러는 황홀한 때도 있는 것이고 무엇에 도취(陶醉)해서 자기도 모르는 때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다운(正) 생각으로 일념(一念)이 딱 되어서 움직이지 않는 그런 때가 삼매(三昧)란 말입니다.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그냥 삼매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참선을 좀 했더니 내가 무아무중(無我無中)의 삼매에 들었다 이렇게 말합니다마는 그런 정도로는 아직 삼매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확히 참다운 부처님 성품, 우주만유의 본체자리, 용(用)이 아니고 상(相)이 아니고 근본 참다운 성품자리, 이런 성품(性品)에 입각해서, 이런 성품 자리를 체험해 가지고 동요(動搖)가 없는 그런 마음이 바로 삼매(三昧)입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법락(法樂)은 어떤 때 나오는 것인가. 오욕락이란 잘 먹어서 재미가 있고, 재물이 많아서 재미가 있고, 명예가 높아서 재미가 있고, 이런 낙(樂)이 아닙니까. 그러나 참다운 법락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三昧)에 들어야만 비로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보배입니다.

만약 우리 중생이 삼매에 못든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평생, 이렇게 태어나서 소중한 자기 인생은 참다운 행복, 참다운 법락을 맛보지 못하고 가는 셈입니다. 이렇게 억울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번 공부에 법락(法樂)을 맛 보셨습니까. 우리 마음이 부처님 성품 자리에 딱 머물러서 조금도 동요 없는 법락을 맛 보셨습니까.

우리 인생은 낭비할 마당이 아닙니다. 낭비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걸음도 한 눈 팔지 말고서 참다운 행복을 맛봐야 하는 마당입니다. 그리하여 꼭 고향으로 가야하는 것이며, 고향으로 못 갈때는 다시 동물(動物)로, 사람으로 끝도 갓도 없이 헤매고 맙니다. 이런 것은 엄격한 사실인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도, 엠페도크래스도, 소크라테스도 다 윤회설(輪廻說)을 긍정했습니다. 자기가 금생에 마음 먹은대로 꼭 태어납니다.

따라서 삼매(三昧)를 가르켜서 현법락주(現法樂住)라. 나타날 현(現)자,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 머무를 주(住)자, 삼매를 가르켜서 법락이 나타나는 그러한 경계라고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 삼매라 하더라도 법락이라 하더라도, 온전한, 영원히 변치않는 참다운 행복은 못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증명(證明)은 했다 하더라도 아직도 습관성(習慣性)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들어있는 우리의 번뇌(煩惱)는 못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습관성이 된 저 우리 마음 구석에 숨어있는 번뇌까지, 그런 씨앗까지 다 뽑아버려야 참다운, 변치않는 최상락(最上樂)이요, 이 최상락 자리가 바로 열반락(涅槃樂)입니다. 열반락이라...... 우리가 미쳐 거기까지 못간다고 하더라도 알기는 알아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 중생들이 구하는 행복인 오욕락은 사실은 아무런 자취가 없습니다. 이 몸뚱아리를 아무리 아낀다 해도 이 몸뚱아리는 자취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마는 가장 지독한 배신자(背信者)가 무엇인가 하면은 바로 자기 몸뚱아리입니다.

아무리 아껴봐야 죽을 때는 미련없이 갑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가장 지독한 배신자는 바로 우리 몸뚱아리입니다.

분을 칠하고 연지를 칠하고 다이아몬드로 몸을 장식(裝飾)한다 하더라도 제아무리 좋은 옷을 입히고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인다 하더라도 이런 몸뚱아리 이것은 너무 많이 먹으면 그냥 아퍼버리겠지요.

우리 중생들은 법락을 모르고, 열반락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의 노예(奴隸)가 되어서 한세상 보내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성자의 가르침 아닙니까. 성자만이 거짓말을 않는 분입니다.

부처님과 우리 중생과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통관(通貫)한데에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관하고 있거니 나무나 소나 사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천체(天體)나 어느 것이나, 모든 것이 다 똑같은 성품(性品)으로 통관(通貫)되어 있습니다. 다만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오직 모양만......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이 알아야 할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기본적으로 본체(本體), 체(體)란 무엇인가. 본성품(本性品)이 무엇인가 하는 그 문제(問題)란 말입니다.

누구한테 법문(法門)을 하건, 누구한테 법문을 듣던지 간에 본체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본성품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알아버리면 다른 문제는 다 술술 풀려갑니다.

본체(本體)는 다 알으시고 또 저도 누누히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이것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만 따지고 사는 사람들은 본체를 모르고 삽니다.

모양이 없지만은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이 실존(實存)이기 때문에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인 본체는 바로 생명(生命)의 실상(實相) 자리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번뇌로 때 묻은 안목(眼目)에서는 볼 수도 없고 체험(體驗)할 수도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길을 가다가 '엑스타시(ectasy)'라 딱 한번 마음이 통일되면 그냥 발도 안떼거소 주야, 밤낮으로 머물렀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고 장마당 같이 되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마는 유명한 분들은 이와같이 영원적인 본체를 지향(志向)해서 자기 마음을 동요시키기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될 수록 선방(禪房) 스님네가 한 철 90일 동안 밖에도 안나가고 산문(山門)도 안나가고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상(相)을 떠나서, 허망무상(虛妄無常)한 현상을 떠나서 영원적(永遠的)인 것, 또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고 또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일체 존재의 근본이며, 생명이 본체(本體)를 알기 위해서 그러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이 본체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성품입니다. 이러한 본체는 곧 불성(佛性) 자리요, 부처님 성품이며, 이것은 하나의 이치(理致)만이 아니요, 참다운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이치로만 따져서 합리적(合理的)인 이치만 구하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서 마음이 막힘이 없이 술술 풀려가지고 이치만 알면 공부 다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 자리는 다만 이해가 아니라 지성(知性), 감성(感性)과 의지(意志)와 모든 것을 초월(超越)한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생명체(生命體)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 말하고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우상(偶像)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화두(話頭)를 구해야 하지 또는 말 없이 구해야지, 부처님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 이렇게 인격화(人格化) 시켜서 부르는 것은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본체가 안보이는 중생입니다. 따라서 본체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시고 돌아가셔야 그래야 이번에 3박 4일동안 고생하신 보람이 있습니다.

물리학(物理學) 쪽으로 본다 하더라도 이 우주는 저 밑에 가서는 광양자(光量子), 광자(光子)가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공간성(空間性)도 없고 시간성(時間性)도 없고 또는 질료(質料)나 열량(熱量)도 없는 광자(光子)만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럼 광양자(光量子)는 무엇인가. 이것은 알 수 없는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장(場) 에너지, 우주를 구성(構成)한 장에너지가 광명(光明)같이, 빛같이 보이는 것이 이른바 광양자란 말입니다. 따라서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할 적에는 사실 우주가 모두 빛 뿐입니다. 광명(光明) 뿐입니다. 광양자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어떻게 진동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중성자(中性子)요 전자(電子)요 하는 것입니다.

저는 물리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보다 세밀한 것은 모릅니다마는 또 제가 말씀 하는 것 가운데서 약간 빗나간 것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요는 다 그런 뜻입니다. 또 물리학적으로 볼 때는 광명(光明)의 파동(波動)인가 입자(粒子)인가, 논쟁을 해오다가 지금은 파동(波動)이요 또 그런 것이 어느 충동(衝動) 따라서 동요(動搖)해 가지고 중성자, 중간자가 되는 차원에서는 하나의 입자란 말입니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광명(光明)이 우주에는 어디에나 틈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현대(現代)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광명 뿐입니다.

광명 뿐인 것이 이렇게 운동하고 저렇게 운동하고 해서 양자(量子)가 되고 전자(電子)가 되고 또는 중성자(中性子)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그렇게, 이렇게 모여서 산소(酸素)가 되고 수소(水素)가 되고 각 원소(元素)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가지고 분자(分子)나 세포(細胞)가 되고 우리 몸, 육신(肉身)이 구성되고 나무가 구성되고 하늘에 있는 달(月)이나 별(星)이 구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광명이 어떻게 진동(振動)하고 결합(結合)되어 가지고 사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광명은 조금도 변질(變質)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은 그 광명이 그 순수(純粹)한 생명체, 이것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며, 덜함도 없고 더함도 없는 진여불성은 일체 존재가 모양을 내건 말건 천지우주가 파괴 되건 말건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이것이 바로 부처님 성품이요, 진여불성이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참다운 우주의 도리니까 바로 진여(眞如)요, 우주의 본 성품이니까 불성(佛性)이요 법성(法性)이란 말입니다.

또 이것이 하나의 생명이나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억울하게도 우리 중생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은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탐욕심,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규칙이 없이 진동하기 때문에 순수한 진동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 성품인 광명을 못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다가 호흡(呼吸)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화두(話頭)도 하고 해서 우리 마음이 안정(安靜)되어 가면 안정된 정도에 정비례(正比例)해서 우주에 언제나 존재하는 생명이 광명(光明)이 차근차근 비쳐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같은 분도 최후의 자기 기록을 보면 가끔 가다가 광명을 봤습니다. 광명을 보고 환희심(歡喜心)에 넘쳐 절대자를 흠모했습니다마는 위대한 분들은 이와 같이 영원적인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영원적인 리듬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볼 수 없는 광명, 그러나 우리 중생은 광명(光明)만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영원적인 황홀(恍惚)스런 음악(音樂)도 못듣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영원적인 리듬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지고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와 같은 본래 광명에서 온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에 비해서 돼지나, 소나, 나무나, 흙이나 그런 생명에 비해서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 하면 현대인들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까지는 생명인데 딴 데도 생명이 있는가 하지마는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어떤 것이나 다 모두가 전자나, 중성자이 결합체가 아님이 없듯이 어떤 존재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부처님 성품이라 하는 생명의 형상화(形象化)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생명입니다.

나무도 흙도 다 생명입니다. 일체(一切) 자연(自然)이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자연을 함부로 훼손(毁損)하거나 또는 공해(公害)를 일으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만 생명이고 딴 것은 생명이 아니다. 우리 인류만 생명이다. 인본주의다 합니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가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합니다.

불교가 인본주의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본성(本性)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해석할 때만이 불교가 인본주의다 하는 말에 해당되는 것이지 그냥 중생의 차원에서 사람이 제일 높다, 이런 해석은 인본주의라 말하는 본래의 뜻이 못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맨 처음 태어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늘 위나 아늘 아래서나 나 홀로 존귀하다는 말씀도 그냥 우리 사람 존재, 범부존재가 존귀하는 것이 아니라 불성까지 간, 일체 존재의 근원까지 간, 불성까지 깨달아버린 존재, 부처님 차원까지 간 존재만이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나 가장 존귀한 존재란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광명(光明)의 바다, 광명의 고향(故鄕)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광명의 고향에서 떠나온 것입니다. 광명의 고향을 떠나서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과거 전생(前生)에는 천상(天上)도 갔을 것이고 또는 사람도 되었을 것이고 더러는 축생(畜生)도 되었을 것이고 이렇게 되었다가 다행히 금생(今生)에 사람의 몸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다시 우리가 광명의 바다, 광명의 고향으로 가야 합니다. 광명의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염불(念佛)이고 참선(參禪)이고 주문(呪文)이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항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우리가 광명의 바다에서 와서, 광명의 고향에서 와서, 다시 광명의 고향으로 간다 이런 것만 알아버리면 다른 모든 존재도 이 자리에서 잠시간 이루어졌다가 다시 광명(光明) 자체가 되는 것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광명으로 이루어진 광명 자체가 이우러지거나(萎) 오염(汚染)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탐욕심(貪慾心)이나 분노심(忿怒心)이나 어리석은 마음(痴心)에 가려서 미쳐 모르는 것이지, 설사 사람이 되어서 지금 강도(强盜)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성(佛性), 부처님 성품 차원에서 보면 아무 흠도 훼손(毁損)도 없습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안경테를 만드나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부처님 성품자리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변질(變質)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강도요, 나쁜 놈이요, 좋은 사람이요 하는 것이지 부처님, 불성에서 본다면 불성은 똑같이 온전히 그 사람한테 충만해 있습니다.

나쁜 사람한테도 진여불성 자리가 훤히 빛나 있고, 좋은 사람한테도 다른 동물한테도, 식물한테도, 부처님의 불성광명(佛性光明)은 훤히 빛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오염(汚染)된 세계, 이것도 역시 바로 광명정토(光明淨土)인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이 자리는 바로 법왕법문(法王法門)을 하는 상당(上堂)이요, 그래서 법왕좌(法王座)라 합니다. 법왕좌는 제가 잘나서 법와좌에 앉는 것이 아니지마는 이 자리에 앉으면 부처님의 참다운 도리(道理) 외에는 절대로 다른 법문을 하지 말라는 또 하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만약 다른 법문을 하면 두파칠렬(頭破七裂)이라. 머리박이 쪼개져서 일곱갈래로 찢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더러 군소리를 한다고 할지라도 현상적으로는 안 찢어지겠지요마는 참다운 의미에서는 이런 법왕좌에 나와서는 허튼 소리를 하면 그때는 정말로 참다운 의미에서는, 진리의 의미에서는 천번 만번 찢기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잘 새겨서 느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떠나온 자리, 우리가 떠나온 자리는 진리(眞理)의 자리요, 광명 충만한, 광명이 무량(無量)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왔고 또 현재의 자리도 역시 광명무량(光明無量)한 자리임에는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다만 억울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 중생이 필요없는, 결국 죽음길로 밖에 못가는 또 죽은 다음에는 흔적도 없어져 버리는 이 몸뚱아리 때문에 이 몸뚱아리를 나라고 하기 때문에 그것에 가리어서 그런 광명(光明)을 못보는 것입니다.

광명을 느끼고 광명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부처님 공부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돌아갈 것인가? 이것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옥신각신 서로 싸우고 맙니다. 일본(日本) 일련종(日蓮宗)같은 종파(宗派)는 '나무 호랭개교'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한 종파를 세워서 언제 신문을 보니까 우리 한국에도 한 40만 정도가 일련종 즉 '나무호랭개교'에 들어가 있는 그런 종파가 들어와 있습니다. 즉 우리 한국인도 40만 정도가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는 한국의 법화종(法華宗)도 그 사람들 본을 따라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경의 이름을, 광명 세계로, 성불의 길로 가는 방법을 법화경(法華經)의 이름을 외는, 경의 이름을 외는 방법을 취합니다. 경의 이름을 외이면서 하는 식(式)은 일본 사람 일련대사(日蓮大師)가 처음으로 창종(創宗)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법화경이 제일 좋은 경이니까 법화경의 경 이름인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경 이름만 외이면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간다 이런 식이란 말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보통 하고 있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어떤 것인가. 또는 우리 선방(禪房)에서 보통 하고 있는 '이뭣고(是甚魔)' 선이나 무자(撫字) 화두(話頭)나 판떼기 이빨에 털 나온다(板齒生毛) 화두나 마삼근(痲三斤) 화두나 이런 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우리 본래 성품 자리로 가장 효과적으로 빨리 가는 지름길인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공부를 시작 하실 적에 이런 것을 해결 안 했으면 굉장히 고뇌(苦惱)를 느끼고 또는 더러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다가 공부를 못하고 맙니다. 따라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문제를 꼭 해결 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일본 스님들이 하니까 우리도 똑같이 우리 40만 신도가 믿고 있듯이 '나무호랭개교'를 믿어야 쓸 것인가.

우리 부처님 자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만 경(經)만이 아니고 바로 생명(生命) 자체입니다. 내가 생명(生命)인데, 우리가 바로 생명인데 일체 존재(存在), 일체 생명의 근본 자리가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바로 부처님은 우주(宇宙)를 몸으로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저 어떤 하늘에 계셔서 하늘만 몸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는 가운데서 우리도 똑같이 우주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性品) 자리에서는 대소장단(大小長短)이 없습니다. 모두가 우주에 들어있는 부처님 성품인데 잘난 사람은 부처님 성품이 더 많을 것인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못난 사람, 잘난 사람,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른 식물이나 하나의 티끌이나 모두가 성품 차원(次元)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성품(性品), 이것은 공간성(空間性)이나 시간성(時間性)이 없습니다.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는 것은 물질(物質)이 아닙니다. 공간성이 없으니 물질이 아니겠지요. 또한 공간성이 없으니 시간성도 없단 말입니다.

공간도 시간도 인과율(因果律)도 초월한 순수생명(純粹生命) 자체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는 작고 크고 많고 적고 또는 높고 낮은 차이도 없습니다. 티끌에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나 사람에게 있는 진여불성이나 석가모니에게 있는 불성이나 예수님 불성이나 똑 같습니다. 다만 역사적(歷史的)인 상황(狀況)과 인과(因果)의 여러 가지 차이 때문에 상(相)만, 오직 상(相)만 차이있게 표현된 것이니 본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무호랭개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대소장단의 차이가 없이 부처님의 참다운 성품은 우주에 간격도 없이 충만해 있고, 훤히 빛나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다. 이렇게 확신하면서 "나무호랭개교"를 외우면 허물 될 것이 없습니다. 또 "판떼기 이빨에 털나온다"는 화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어째서 판떼기 이빨에 털나온다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의심(疑心)해서는 참다운 공부는 못 됩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참다운 참선이라는 것은 본 성품 자리, 본분(本分)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곧 본체(本體)를 안 여의여야 참다운 참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기왕이면 참선을 하고 싶지요. 스님네한테 말을 들으면 일반 공부는 방편(方便)이요 참선이라야 훌륭한 공부다 하니까 저한테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화두(話頭)를 타러 옵니다. 그럼 "당신은 지금 어떻게 공부합니까"하고 물으면 "아, 저는 관세음보살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분들은 관세음보살님하고 화두하고 별도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론 관세음보살님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을 하면서 그 마음 자세가 본 성품을 떠나서 관세음보살이 저만큼 어디 계신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대상적(對象的)으로 추구(追求)하는 것은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염불(念佛)인 것이지. 또 염불도 참다운 염불은 못 됩니다.

참다운 염불은 그 전에도 가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이불(不二佛)이라, 아니 불(不)자, 두 이(二)자,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의미에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또는 불이불(不離佛)이라. 아니 불(不)자, 떠날 이(離)자, 부처 불(佛)자. 부처와 나와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한단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은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 뿐이다. 부처님 한 분 뿐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이고 또 우리 중생(衆生)은 그 자리를 떠나기 쉬운 것이니까 그 자리를 우리가 간절이 지키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 하는 그대로 다른 화두(話頭)를 별도로 들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화두를 드나 만약 그 화두를 다만 상대적(相對的)인 문제나 의심하고 이럴까 저럴까 또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의심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참선(參禪)이 못되는 것입니다.

회의적(懷疑的)인 것은 하나의 추구법(追求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땅히 순간찰나(瞬間刹那)도 본체(本體)를 안 여의여야, 본분(本分) 소식을, 본 주인공(主人公)을 안 여의여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공부가 차근차근 순숙(醇熟)이 됩니다. 우리는 그저 담박에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근기와 선근(善根)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오랜 시간 추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이 필요했습니다. 조주(趙州)스님 같은 대천재(大天才)도 맨 처음에 공부할 때 남천보원선사(南泉普願禪師)에게 가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때도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부처가 무엇인가. 이렇게 조주스님께서 남천보원선사에게 물으니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평생 마음이 바로 도(道)라 이렇게 대답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따라서 조주스님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이 깨달은 경계(境界)를 말씀드리니까 그대가 비록 문득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대가 비록 돈오(頓悟)했다 하더라도 재참삼십년(再參三十年)하라. 즉 30년 동안 더 참수(參修)하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열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님뿐이다. 모두가 광명세계(光名世界)다. 이렇게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공부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 그렇구나"하고 느꼈다 하더라도 공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들어있는 습관성(習慣性), 그 씨앗을 뿌리 뽑으려면 굉장히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조주스님같은 분도 30년이 더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했다고 해서 더 높은 것이 아니고 또는 관세음보살은 낮은 것도 아니며 절대로 고하(高下)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공덕(功德) 차원(次元)에서 볼 때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항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코 말씀을 드려도 나중에 와서는 또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서투른 질문을 안 하시기 위해서 제가 구구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형상(形象)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또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은 우주(宇宙)의 대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提示)하는 법문 자리를 찾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아미타불을 해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는 화두식으로 하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화두(話頭)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관세음보살 해라, 하셨거니 그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두란 말입니다. 꼭 무(無)자나 이뭣고만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두라는 것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 바른 마음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우주 만유가 모두가 다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많이 해서 거기에 습관이 붙어서 약간의 법락(法樂)에 가까운 재미를 보았다면 구태여 이름을 바꿀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하나의 자리, 하나의 생명자리, 조금도 구분지을 수 없는 하나이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영가천도를 한다고 할 때도 이런 자리에다가 우리 중생이 영혼(靈魂)을 천도(薦度)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지구(地球)같은 땅덩어리를 맡어 있는 성령(聖靈) 기운이 지장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래서 다른 성령 기운하고 하등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차원의 참다운 기운은 조금도 한계(限界)가 없습니다. 그러한 부처님 차원의 기운은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어서 어디가 덜 있고, 더 있고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어도 바로 그 자리, 또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워도 똑같이 그 자리, 이뭣고를 해도 똑같은 그 자리, 또는 광명진언(光明眞言)을 해도 바로 그 자리, 이렇게 생각 하셔야 시야비야(是也非也) 그런 필요없는 시비를 않고 우리의 공부가 차근차근 진전(進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자비(慈悲)와 지혜(智慧)가 원만한, 원만히 갖춰져 있는 부처님한테 귀의한단 말입니다.

자비나 지혜 이것은 부처님 자리에 갖춰져 있는 가장 중요한 속성(屬性)인지라 우리가 공부 할 때는 꼭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가지런히 갖도록 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공중(空中)에 나는 새의 날개가 한군데만 있고 한쪽에는 없으면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굴러가는 달구지가 두 바퀴가 똑 같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와 똑 같이 부처님의 공덕은 우리의 본성품(本性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의 공덕은 자비와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오행(五行)식으로 말하면 음(陰)과 양(陽)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음만 더 있고 양이 부족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만일 자비만 좋고 그래서 자비만 추구하고 지혜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비도 참다운 자비가 못됩니다.

자비와 지혜가 원래 혼연일체(渾然一體)라서 온전히 하나로 지혜와 자비가 뭉친 자리가 본래 우리의 성품이기 때문에 이 둘은 둘이 아닌데 그 공덕(功德)을 대별(大別)하면 둘이기 때문에 자비만 찾고 지혜를 무시하면 우리의 공부가 더딥니다.

본래 우리의 근본 생명자리는 다 갖춰진 것인데 하나만 추구하면 공부도 잘 계합(契合)이 못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도인들이나 다 자비와 지혜 또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추구했습니다. 정과 혜에서 정(定) 이것은 뜻 정(情)의 정이 아니라 마음을 한군데에 통일시키는 정할 정(定)자 정입니다. 마음을 한군데에 일념(一念)으로 모으는 정(定)과 비추어 보는 지혜는 화엄경(華嚴經)이나 육조단경(六組檀經)이나 보조어록(普照語錄)이나 모든 도인들인 정혜쌍수(定慧雙修) 또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말씀하셨고, 고를 균(均)자 같을 등(等)자, 정과 혜가 같이 고르게 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런 점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정과 혜를 같이 공부할 것인가. 화두를 하나 참선을 하나 무슨 공부를 하나 원래 우리 성품에 갖추고 있고 우주에 갖추어 있는 정과 혜, 자비와 지혜를 균등하게 해서 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공부가 빨리 진척(進陟)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이것은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 아닙니까? 반야지혜란 말입니다. 반야지혜가 너무 좋아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하는 분들도 마하반야바라밀을 해야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같다고 생각해야지 지지리 나무아미타불 하는 사람에게 그것 그만두고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해라, 그것도 역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식(式)이 좋다고 해서 다른 공부를 비방(誹謗)하거나 폄(貶)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데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참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가 염불을 좋아한다고 해서 염불 아니면 필요 없다. 염불만이 성불(成佛)한다 하면 이것도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혜와 자비가 균등(均等)히 똑같이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균등히 갈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께서 공부를 하시면 그때 그때 자기한테 요령이 붙습니다. 그러나 다는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간단한 요령을) 윤곽만이라도 제가 조금 말씀드려야 하겠지요.

지혜(智慧)는 무엇인가. 불교의 지혜는 바로 반야(般若)의 지혜입니다. 또한 반야지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비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변화(變化)해서 마지않는 변화의 과정(過程)에 불과합니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실존적(實存的)인 고유(固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비어있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차근차근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도 머물지 않고 또 어느 순간도 공간성(空間性)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철저히 과학적(科學的)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그 합해진 그것이 조금도 머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벨그송'의 말에도 "우리는 한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한 시냇물에 우리가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있겠습니까.

현상계(現象界)는 모두가 일과성(一過性)입니다. 한번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무상한 인생입니다. 누구 미워하고 누구 지독하게 탐착(貪着)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제아무리 미워한 사람도 이윽고 얼마 안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반야(般若)는 모두가 비었다는, 내 몸도 비어 있고, 원수의 몸도, 내 권속(眷屬)의 몸도 다 비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못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잠시간 합해져서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그런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듯이 우리 몸의 세포 역시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해서 변동해 마지 않습니다. 고유한 자기 몸뚱아리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입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 지혜의 법문이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인데 다만 공(但空)이라는 소식으로만 안다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되고 맙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그 자리만 공인 것이지 영원의 생명(生命), 즉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영원(永遠)한 생명의 자리는 항상 존재한단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다음 가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호킹'박사도 역시 우주가 파괴되면 하나의 광명(光明)의 구멍, '블랙홀'이라는 광명의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어 나온다. 이렇게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보다 깊은 소식은 모르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은 천지우주가 다 파괴(破壞)가 되어서 우리 인간이 광음천(光音天) 이상으로 다 올라가 버려서 물질은 조금도 없어진 때라고 할지라도 역시 부처님 법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조금도 감축(減縮)이 없습니다.

모양이 있는 현상계(現象界)는 다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주가 이루어질 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우리 중생의 업력(業力)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原子)가 되고 분자(分子)가 되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物質)과 중생(衆生)의 업력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염파(念波)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가 상념파(想念波)란 말입니다. 상념파. 우리의 상념파가 금생에 이 몸을 만들었습니다. 엄마 태(胎) 속에 들어갈 때에는 우리의 식(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념파인 식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식(識)들이 부모의 영양(營養)을 취하고 그 영양 밑에서 이렇게 태어났단 말입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은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광명(光明) 뿐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마음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반야(般若)라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 뿐이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느껴야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경을 많이 외이고 다른 공부를 많이 하는 이런 것은 하나의 분별(分別) 공부인 것이고, 가장 핵심(核心)은 반야(般若)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은 모든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무상(虛妄無常)해서 다 공(空)이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내(我)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아(無我), 무아 말씀들은 이렇게 잘 합니다. 그러나 무아 소식을 좀 더 깊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아 소식을 안다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예(名譽)를 구하고, 무엇 때문에 재산을 구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하면서 우리 마음의 상태만은 역시 진리에 입각(立脚)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더불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베풀어야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가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하더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인다고 할지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천지우주는 조금도 흠도 없고 간격(間隔)도 없고 모두가 다 부처님의 진여 광명(光明) 뿐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마음을 우리 중생은 지속 시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전(經典)에 보면은 우리 마음은 까불기를 잘하는 경망(輕妄)스러운 원숭이 같고, 또 풍중등화(風中燈火)라, 바람 가운데에 있는 등불같다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바람 가운데 있는 등불같은 동요부단(動搖不斷)한 우리 마음, 또는 원숭이 같이 경망(輕妄)스러운 우리 마음,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인지라 법문(法門)을 설사 듣고서 내가 잘은 모르지만은 천지우주가 정말로 참 텅 빈 것이겠구나. 무아(無我)니까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하셨겠지. 이렇게 생각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 그 무아(無我)의 마음, 즉 모두가 텅 비었고, 오직 부처님만 존재하고 진여불성만 존재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오직 마음 뿐이다. 하는 이러한 마음 자리를 지속(持續) 시켜야 됩니다. 지속을.....

이렇게 지속시키는 것이 정(定)입니다. 정할 정(定)자 정입니다. 지혜와 정을 함께 균등(均等)히 나가야 합니다. 순간 찰나도 반야지혜, 참다운 지혜, 반야의 지혜를 안 떠나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자리를 지켜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몇날이나 몇 달이나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고, 그 자리를 지켜가기 위해서 염주(念珠)를 가지고 천번 만번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염불 할 때 화두를 참구(參究)할 때 꼭 놓치지 마십시오.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놓치지 마십시오. 반야지혜 이것은 참다운 우리의 고향자리입니다. 참다운 우리의 생명자리입니다.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임의 침묵' 시를 보면 그리운 것은 모두가 다 임이다.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진여불성에서 볼 때는 그립지 않고 미워도 모두가 다 임입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참다운 자비와 지혜를 지속시키는 수행(修行)을 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자비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본래 갖추고 있는 지혜요, 자비요, 정(定)이요, 혜(慧)이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정과 혜, 자비와 지혜를 함께 닦는 공부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식때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야의 지혜라. 시(詩)를 쓰나 또는 그림을 그리나 모두가 다 반야의 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걸작이 나오겠지요. 반야의 지혜라, 반야의 지혜를 지속시키는 정(定), 선정(禪定), 정혜쌍수(定慧雙修), 정혜균등(定慧均等)을 염두에 두시고서 다음번에는 꼭 자기 집안에서 공부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꼭 오욕락(五欲樂)을 떠나서 법락(法樂)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법락을 맛보셔야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법락을 맛 보셔야 다른 것이나 세속적(世俗的)인 속물(俗物)이 안되고서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꼭 금생에 무상대각(無上大覺),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시기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法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사람은 누구나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꿈. 소망. 사랑. 순수. 지혜
진실. 인내. 용기. 자유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태우고 눈물 흘리고
기도해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명예를 높이고 재산을 늘리고
학문을 쌓고 지혜를 찾아도 늘 마음은
허전하고 두렵고 불안합니다.

내 마음의 항아리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온갖 것을 다 버리고 물처럼 단순하고 소박하고
담담한 것으로 마음의 항아리를 채워야 합니다.

그곳에는 티가 없어야 합니다.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 돼야 합니다.
지나 가는 바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높은 곳과 미래를 향해서 생각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파란 가을 하늘을 담을 수 있고
흘러가는 구름도 머무르게 할 수 있으며
지혜의 풀꽃도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 월간 좋은 생각 

 

 

 

 

 

공짜는 주지도 받지도 말고

노력 없는 대가는 바라지 말라.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怨望) 말고,

세상을 헛되게 살았음을 한탄(恨嘆)하라.

 

예수 믿어 죽어서 천당(天堂) 갈 생각 하지 말고

살아서 원한(怨恨), 죄(罪)를 회개 하라.

 

타인들의 인생 좇아 헐떡이며 살지 말고

내 인생 분수(分數) 지켜 여유(餘裕) 있게 살라.

 

나를 용서(容恕)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용서(容恕)하고

나를 다독거리는 마음으로 타인을 다독거려라.

 

보내는 사람 야박하게 하지 말고

떠나는 사람 뒤끝을 흐리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