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심리-바른견해/지운스님

2014. 10. 21. 12: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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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스님



    수행심리 - 바른견해 (1) / 지운 스님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왜 일어날까요? 여기에는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어떤 충격을 받았을 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생에 대한 회의가 문득 일어날 때,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자각하고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수행하고자하는 마음 작용이 일어나는 데, 이것을 구분하자면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입니다. 이를 다섯 가지 수행심리(5 別境心所)라고 합니다. 이는 또한 수행의 단계이기도 합니다. 1) 욕(欲) 욕은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서, 세속의 가치는 너무나 허망하기에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여인의 미모나 재물로써 할 수 있는 화려한 생활, 세속의 학문과 남을 지배하는 권력으로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는 삶이 허무함을 자각하고 죽음이 없는 강 저쪽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의지로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불법(佛法)을 따르는 수행자의 올바른 의욕은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고 그것을 구제하고자 연민심을 일으켜 진리로써 해결하려는 보리심을 내는 것입니다. 바로 발보리심(發菩提心)을 말합니다. 2) 승해(勝解) 승해는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길을 명확하게 아는 수승하고 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뗏목을 타고 방향을 잡고 노를 저어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방법을 스승에게 배워야 합니다. 바른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바른 길을 가기 위한 바른 견해의 길잡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바른 견해에 의해 발심(發心)과 신심(信心)이 일어납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깨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發心]. 이렇게 해서 가는 길을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그 길로 가면서 두 눈으로 사물을 확인하듯이 체험해야 합니다. 특히 바른 견해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걸음의 미세한 오차일지라도 나중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목적지에 이를 수가 없게 만듭니다. 바른 견해란 수행체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인들이 깨치신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의사의 진료방법에 비유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의사는 먼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발생과정을 찾아낸 다음 병을 제거할 방법을 검토한 후 처방을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는 의사의 애초의 진단에 정확도가 요구됩니다. 어떤 의사는 질병을 과장해서 희망을 포기하라고 엄숙하게 선언하며, 또 어떤 의사는 병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아무런 치료도 필요치 않다고 거짓위안으로 환자를 안심시킵니다. 전자는 비관론자, 후자는 낙관론자로써 모두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명한 의사는 질병의 징후를 바르게 진단하고 질병의 원인과 발생을 이해하고 그 병이 치유 될 수 있다고 확신한 다음 환자를 치료하여 구해냅니다. 이러한 의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질병에 대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입니다. 즉 괴로움은 병입니다[苦]. 갈애(渴愛-탐욕, 성냄, 어리석음)는 병의 발생원인입니다[集]. 갈애를 없앰으로써 병이 제거됩니다. 이것이 치유입니다[滅].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은 그 치료법입니다[道]. 이러한 사성제의 가르침은 우리 중생들이 스스로 걸어가야 할 현실, 즉 고(苦)라는 출발점으로부터 괴로움의 해결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갈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괴로움인 죽고 사는 생사(生死)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목적지를 정하는 일과, 둘째, 그 목적지를 향하여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인가 라는 출발점의 문제, 셋째, 그 출발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가라는 방향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넷째,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의 수행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출발점과 방향 및 목적지, 그리고 도달하는 방법을 정확히 제시하는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성제를 의사의 진료와 치료방법으로 비유한 진료방법을,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응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대별할 수 있습니다. 《四聖諦》 《良醫經-의사의 진단》 《수행실천 체계》 苦聖諦(인생의 괴로움)---------------병의 상태--------------출발점 集聖諦(괴로움의 원인)---------------병의 원인--------------방향 滅聖諦(고(苦)의 원인과 고의 소멸)-----건강회복---------------목적지 道聖諦(여덟 가지 바른 길)------------치료방법-------------도달하는 방법 이를 압축하여 표현 하자면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니라”(중부경 22)라고 역설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 가르침의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하지만 유무(有無)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졌다면 이러한 수행체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사해탈은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바른 견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 시간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운스님 


 
    수행심리 - 바른견해 (2) / 지운 스님 절대주의와 허무주의는 바른 견해가 아니다. 일전에 동대구역에서 동화사를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께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하나 보이면서 이것을 들어보시지 않겠느냐고 묻길래,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스님 하다가 목사 되신 김 아무개 목사님 설교 테이프’라는 것입니다. 택시기사님의 이야기로는 ‘그 목사가 스님 생활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본인의 아버지도 스님인데 자기가 개종시켜 교회로 인도했다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즉 불교교리의 수준이 낮고 잘못되었기에 스님 생활하다가 교회 목사가 되었다는 내용이란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죽어서 갈 수 있는 곳은 지옥과 천국뿐인데 기독교인들은 죽어서 무조건 천국갈 수 있어서 좋은데 불교인들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길 육도(六道)로 윤회를 하기 때문에 죽어서 여섯 곳 어디를 가야할지 모른다면서 얼마나 불쌍한지 안타깝다라고 설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듣고는 제가 택시기사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정도 수준으로 불자들을 개종시킨다는 것은 수준이 너무 낮고 잘못 알고 있어서 그 목사님더러 불교공부 더해서 정확히 알고 불교이야기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은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임을 이야기합니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 가는 곳은 두 군데, 지옥과 천국뿐입니다. 지옥에 빠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지옥도 천국과 같이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불변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영혼은 불멸이라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가능태의 존재라면 지옥에 떨어져도 죄 값을 다 치르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원죄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지은 죄는 바뀌지 않습니다. 영혼 또한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온갖 악행에 잘못을 저질러도 원죄까지 사라져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즉 ‘불신지옥 예수천국’이라는 기독교의 구호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는 일입니다.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 없어야할 것입니다. 부부가 동침할 때 하나님이 아이를 만들어준다고 주장하지만 태어나는 아이 중에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교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인간에서 지옥이나 천국에 가지 않고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만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마 제 기억이 맞을 것입니다. 미국 버클리 대학에선가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는 전담반을 구성해서 자료들을 모았는데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장경각출판사에서 책으로 나온 것을 기억합니다. 택시 기사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불자들은 죽어서 육도의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이야기한 부분은 목사님의 불교에 대한 무식을 그대로 드러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이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좋은 결과, 악행은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십니다. 때문에 본인이 지은 카르마(業)에 따라 육도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도를 벗어나 갈 수 있는 곳으로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의 세계가 있음을 또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후의 갈 수 있는 곳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유물론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동물들이 영혼이 없듯이 사람도 동물에 속하므로 영혼이 없다. 그러므로 죽으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 역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의 환생에 대해 해명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억하든 안 하든 환생자입니다. 불교에서는 영혼에 대해 기독교에서 주장하듯 영혼불멸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유물론자들의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有’를 근거한 절대주의라면 후자는 ‘無’를 근거로 하는 허무주의입니다. 유무를 근거로 하는 주장은 모두 바르지 못한 견해입니다. 현실적으로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관념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영혼을 어떻게 볼까요? 물론 영혼이라는 단어보다는 마음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영혼이라는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속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듯이 마음은 전후 찰나로 서로 이어주는 연속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절대의 유(有)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없어져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무의 무(無)가 아닙니다. 가능태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령 지옥에 떨어졌다고 해도 죄의 과보를 다 치러서 영적으로 밝아지고 맑아지면 지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불자들을 선교대상으로 삼아서 집을 방문하여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간다고 할 때 지혜 있는 불자가 지옥의 중생들을 버려두고 천국만 고집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이지 않는가, ‘나’라도 지옥중생을 위해서 지옥 가서 지옥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겠다고 이야기하면 선교하러 온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가면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가능태가 아닌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지옥도 불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불변의 지옥은 곧 공포의 대상입니다. 천국가지 않으면 안 되기에 무조건 기독교만 믿어야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조상들은 모두 지옥가거나 지옥에 가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유무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삿된 견해며 유무를 벗어나 중도로 보며 시간으로는 무상(無常), 공간으로는 관계성인 연기(緣起)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