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허공중에 있어요 / 김기추 거사님

2014. 11. 9. 20:3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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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뚱이도 허공성 때문에 자꾸 변하는 거예요.

생사 문제를 풀려면 허공 문제 해결해야

 

이제부터 허공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허공 속에서 살면서 허공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 불자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안 믿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을 안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육신이 허공 속에 살고 있어요. 허공을 여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허공 그만 무시하고 있거든. 또 허공 뿐 아니라 이 땅덩어리도 무시하고 있어요.

이 지구덩어리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느냐 말이야.

이거 하나도 생각 안 해. 왜 그러냐. 바로 내가 허공에 있거든.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색신으로서인 여러분이 아니고 허공으로서인 여러분이다 하는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거 참 중요한 일인데, 허공을 그만 무시해 버려.

 

우리가 허공으로 더불어서 같이 나가는데 허공을 무시하니 도대체 이건 상식 밖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참말로 인간 이상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왜 어리석냐.

허공 속에 있으면서 허공을 무시해 버려. 땅에 발을 거닐고 있으면서 집도 짓고 하면서

무시해 버리거든. 우리가 직접 관계가 있는, 절대 관계가 있는 엄연한 사실. 이 허공,

이거 엄연한 사실이거든. 엄연한 사실을 갖다가 무시해 버리고 어찌 우리의 생사문제가

해결이 되겠느냐 말이여.

따라서 허공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 안 해 볼 도리가 없거든요. 하니까 허공부터 구체적으로

얘기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허공 속에 있어요. 지금 이 자리가 허공이에요. 알고 보면.

이 집은 허공성 아닌가? 이 지구, 이거는 허공성 아닌가? 또 우리 몸뚱이 이건 허공성 아닌가?

우리 몸뚱이도 허공성이기 때문에 자꾸 변하는 거예요.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져서 나중에

한 살 두 살 세 살 열 살 스무 살, 이래서 국민학교도 가고 대학도 가고 사업도 하다가

흰 머리털도 나고 쭈글쭈글 해서 나중에 흙구덩이로 가고 불구덩이로 가는 거예요.

허공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허공성이 아니고 그대로 있다면 어린애는 영원히 어린애, 늙은 사람은 영원히 늙은 사람,

변하는 것이 없어요. 눈도 뜬 대로 가만히 바람도 불다가 가만히 구름도 가다가 가만히

손도 이래 든 채로 가만히. 손 이래 이래 하는 것도 전부 변하는 도리 아니에요?

눈 깜빡깜빡 하는 것. 내가 성품이 없는 이 입을 통해서 허공성이 지금 얘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입이 얘기한다 이리 하고 있어요. 입이 얘기하는 걸 여의지 않기는 했어.

허나 입이 어떻게 얘기를 하느냐 말이에요. 혓바닥이 무슨 성품이 있던가요?

이 입이 성품이 있던가요? 이거는 무형무색인 진짜 나. 진짜 나는 법신자리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그 놈이 들어서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뭘 보고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뭘 듣고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허공이 생각한 것을 의사 발표할 뿐이지. 이거 내가 말하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 허공이 도대체 얼마나 크냐 적냐 이것부터 생각합시다.

모습 있는 거. 지구도 모습이 있는 것 내 몸도 모습이 있는 것 태양도 모습이 있는 것. 이런

모습이 있는 걸로 비한다면 허공 제일 큰 거예요. 여기 크다고 써 놨어요.

다른 말을 하기 위해서 써놨는데, 실은 허공 큰 거 아니에요. 그러나 큰 거예요.

만약 크다는 말마디에 우리가 달려들면 얼만큼 크다는 말이 딱 나와야 됩니다. 크다 적다 하면

얼만큼 크다. 얼만큼이란 이것이 있어야 크다는 말이 딱 적합해요. 적다 하면 얼만큼 적다는

것이 있어야 딱 적다는 말이 되는데. 실은 허공이란 것은 얼만큼이란 것을 지났어요.

그러기 때문에 가도 가도 끝없는 것이 제일 크다 이렇게 하겠는데, 실에 있어서는 크다는 말을

떠난 자립니다. 크다 적다 하는 걸 떠나서 큰 거예요. 크다 하면 얼만큼 크다 하는 것이 딱

그대로 수치가 나옵니다. 요새말로 서양말 많이 쓰대. 어느 미리쯤 적다는 말이 딱 나와요.

그러나 이 허공은 크다 적다는 말이 이미 떨어졌어. 그것도 붙지 안 해. 크다는 말도 붙지 않고

적다는 말도 붙질 안 해. 한정이 없이 큰 거예요. 이 허공이.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허공중에 있어요. 솔직한 말로 색신 이거 성품 없는

것이거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집, 나무, 전부 허공성이에요. 그래서 이리 부서지고

갈라지고 이래 되는 거예요. 나중에 없어지고. 이 지구 허공성, 우리가 지금 허공에 앉아

있거든요. 진짜 주인공. 이건 가짜예요. 이거 하나의 똥주머니에요.

가는 곳이 흙구덩이 불구덩이 뿐이라.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거 내라 하고 있거든.

물론 내가 쓰고 있어. 내가 쓰고 있긴 있지만 이건 내가 아니고 이건 가짜여. 내가 쓰고 있어도

이건 앞으로 오십 년이나 백년이면 우리가 흙구덩이 불구덩이 집어넣는 그거에요.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서 태우면 한 줌 흙밖에 안 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어서 썩히면

한 삼태기 흙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거 그거예요.

하기 때문에 보고 듣고 말하는 이놈, 지금 우리가 허공중에 있거든. 우리가 늘 그릇된 생각으로

이거 내다 할 때 여기 있는 것 같지만 여기 어디 있나요? 어디 있나요? 자, 뇌에 있다든지 눈에

있다든지 코에 있다든지 가슴에 있다든지 어디에 있나요. 없어요. 없어.

없으면서 이걸 여의지 않을 따름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허공이 어느 정도 크냐. 간단하게 말하겠어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도 가도 끝없는 거예요. 위로 가도 가도 끝없는 거예요. 밑으로 가도 가도

끝없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불법공부를 하는데,

이 허공문제를 해결 안 하면 생사문제가 해결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허공 말을 하는 거여.

이리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이리 가도 가도 끝없는데, 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느냐 말이여.

 

여러분들이 허공을 처리할 권리가 있어. 색신은 여러분이 아니에요.

색신은 성품이 없는데 처리고 뭣이고 할 거 뭐 있어요? 보고 듣고 말하는 진짜 여러분,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의 여러분, 태양계가 부서지고 욕계 색계가 막 부서져서 다 날아가 버려.

날아간 후에도 뚜렷하게 있는 여러분. 이 여러분이 허공을 처리할 문제거든.

이러한 그 자리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지난 일들을 들고 다니면서 고뇌합니다.

항시 즉각즉각 내려놓고 살면

오늘 지금 여기 뿐 !!

생각생각(念念)에 생각이 없고

어묵동정(語默動靜)에 흔적이 없어 자유롭습니다.

 

 



삶의 재료라는 본래 맛

 

 서울 은평구 삼각산에는 단아한 비구니 사찰 진관사가 있습니다.
주지 계호 스님은 ‘사찰 음식의 달인’입니다. 정갈한 반찬들은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깊고 그윽한 맛을 냅니다.
스님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양념을 적게 쓴다”고 하더군요.
이유를 물었더니 “그래야 재료에 담긴 본래 맛이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음식에도 ‘소박함의 코드’가 있더군요.

그저께 프랑스 테제공동체에서 온 한국인 수사를 만났습니다.
신한열 수사도 ‘소박한 삶’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소박하다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거다.
소박함을 통해 우리는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창조의 아름다움, 창조의 신비”라고 답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들은 다 공짜로 주어진다고,
우리가 햇살을 돈 주고 사지는 않는다고.
“땅이나 건물이 있어야만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한강변의 억새를 봐라. 그냥 주어진다.
그걸 누리는 사람도 있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쫓기며 각박하게 살 때는 안 보인다.
우리가 소박해질 때 비로소 그게 눈에 들어온다.”

소박한 숙소, 소박한 음식, 소박한 삶.
셋이 서로 통하더군요.
음식에는 식재료가 가진 본래의 맛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양념과 너무 강한 조리법은 종종 그걸 덮어버립니다.
또 없애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삶이라는 재료가 가진 ‘본래의 맛’이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거기에 너무 많은 양념을 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학, 저 직장, 이만큼의 재산, 저만큼의 성공.
그 다음에는 자식의 대학, 자식의 직장, 자식의 재산, 자식의 성공.
온갖 양념을 좇다가 정작 삶이 가진
‘본래의 맛’을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도화지 위에 1000개의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점만 들어옵니다.
여백은 좀체 보이질 않습니다.
도화지 위에 한 개의 점이 있습니다. 점 못지않게 여백도 크게 보입니다.
삶이라는 도화지에 꼭 필요한 점들을 찍기.
삶의 여백을 누리는 노하우가 아닐까요.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이 제 기능을 한다.”
때로는 소박함이 고급스러움보다 더 고급스러운 이유입니다.

백성호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