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스님 이야기

2014. 11. 22. 22:4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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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은 연을 좇아 생겨났다가
연이 다하면 흩어지느니라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집니다.

현재 맺고 있는 부모와 자식, 부부 등의 사람관계도 모두가 인연이요.

사업의 성패여부도 인과응보이며, 열심히 정진하여 도를 이루 것도

인연업과(因緣業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대우주의 인연법에 다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즘의 젊은이들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 곧 심은대로 거두고 지은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의 법칙, 자연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떠한 삶을 복된 삶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1960년경, 교계에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부산 범어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스님의 성은 황씨(黃氏)요 법명의 하담(河潭)으로,

19세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여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렀습니다.

스님은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만을 외웠고 일 할 때도 밥먹을 때도

'나무아미타불' .........아미타경 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년이 넘자 대화를 나눌 때도 '나무아미타불'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잠을 잘 때도 '나무아미타불'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담스님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미타불이 무량한 광명을 보고 견성을 하였고,

무량한 빛과 무량한 진리를 체득한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금강산에서 하산을 했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 거룩한 단어 하나를 귀에 넣어줌으로 해서

중생들의 업장을 녹이고 죄업을 소멸시켜주고자 서울로 온 것입니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극장 선전원들이 사방에 영화 포스터를 붙인 통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활보했던 모습과 같이 앞에도 '나무아미타불' 뒤에도 '나무아미타불' 옆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써서 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쓴 깃대를 등에 지고

커다란 목탁을 치며 하루종일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했습니다.

스님은 서울의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습니다. 사람들의 귀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여도

그 만큼 업장이 소멸되고 공덕이 생겨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었고,

때로는 염불을 통한 업장참회법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5년, 스님은 어떻게 술을 알게 되었고,

술을 입에 대자 대중스님들로부터 막식막행승(莫食莫行僧)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절에서는 곡차를 한다는 이유로 들어오지 못하게까지 하였습니다.

스님은 이절 저 절로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뼈 속 깊은 곳까지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떠한 구박에도 동요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보다 '축원'을 했습니다.

작은 친절에도 큰 도움에도 스님은 결코 고맙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합장을 하고 '이 공덕으로 다음에 부처가 되십시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조그만치라도 고맙게 해 주는 이에게는

합장을 하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이 공덕으로 다음에 부처가 되십시오'

또 절 앞에 와서 술과 음식을 벌여놓고는 노는 사람들이 스님을 향하여 희롱조로 말을 겁니다.

'스님, 한잔 하실라오?'

'어,? 거 좋-지.'..!!

그들이 내미는 술을 거침없이 들이키면 사람들은 장난 반, 놀림 반, 농담 반으로

질책을 합니다.

'스님, 곡차를 드셨소? 술을 드셨소?' '술을 마시는 것을 보니 중이 아니구먼!'

하지만 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합장배례하며 오직 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내게 목축이라고 술을준 이 공덕으로 다음에 부처가 되십시오'

이렇게 '부처 되라'는 한마디 축원으로 일관했던 하담스님은 말년을 범어사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범어사는 당대의 대율사이신 동산(東山)스님이 조실로 계시고,

계율이 엄한 사찰이었으므로 곡차를 좋아하는 하담스님을 반길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직 '범어사에 살고 싶으면 머물게 하고, 가고 싶으면 가도록 내버려두어라'는

동산스님의 지시 덕분에 범어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지만, 대중들과 함께하는

큰방에서의 생활이나 공양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뒤채에서 행자나 일꾼들과 함께 공양을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아침공양이 끝나면 종일 나다니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담스님이 범어사 총무스님을 불렀습니다.

'석달 후에 내가 가야 되겠소.'

하지만 총무스님은 농담처럼 들었습니다. 딴 곳으로 간다는 말씀인지,

세상을 하직한다는 말씀인지 조차 되물어 보지 않고 무심하게 흘려버렸습니다.

그 뒤, 가신다고 약속한 날 꼭 일주일 전에 총무스님을 다시 방으로 불러 꼬깃꼬깃 모은

10원 짜리, 100원짜리로 6만원을 건네주면서 부탁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네. 경책(經冊)한 권도 없고,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농짝하나.

땅덩이 하나도 없어. 이게 전부니까 어려운 절 살림에 보태 쓰게.'

그러고는 양말 속에 넣어 두었던 3만원을 따로 내어놓으며 말했다.

' 이 돈이면 내 초상 비용은 될거야.'

하담스님은 가시겠다고 한 하루 전날, 손수 향나무를 넣어 달인 물로 목욕을 하고

미리 마련해둔 수의(壽衣)로 갈아입은 다음, 깨끗한 장소를 골라 목욕하기 전에

입던 옷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실로 남은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수건하나, 양말 한 켤레 없었습니다. 오직 수의 위에 장삼과 가사를 차려입은 것 뿐이였습니다.

'3개월 후에 가겠다'고 했을때는 농담처럼 들었던 총무스님도 계속되는 하담스님의

이상한 거동에 경각심을 일으켜, 가신다고 한 날 이른 새벽부터 세명의 젊은 승려들로

하여금 스님 곁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자 하담스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가야할 시간이 되었구나.'

그때 곁에 있던 젊은 스님이 짓궂게 말을 던졌습니다.

'스님, 지금이 법당에서 마지 올리는 시간인지 오르십니까?

어찌 중이 되어가지고 부처님께 마지(공양) 올리는 시간에 가시려고 하십니까?'

'허, 듣고보니 그 말씀도 옳구려. 나를 일으켜주시오.'

앉은 채로 조용히 열반에 들고자 했던 하담 스님은 젊은 승려들의 부축을 받아

법당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법당 한 옆에 단정히 앉아 부처님께 올리는 사시마지가 모두 끝날 때 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사시마지는 끝났고, 스님은 옆에 있는 승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제는 할 수 없소. 나 좀 눕혀주소.'

주위 승려들의 도움으로 반듯이 누운 하담스님은 조그마한 음성으로 게송을 읊었습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원컨데 법계의 모든 중생 너와 나 할 것 없이

일시에 모두 성불하여지이다.

마침내 하담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당시의 범어사 총무스님은 땅을 치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아이구. 아이구. 진짜 도인 선지식(善知識)을 옆에다 두고, 눈 어둡고 귀가 멀어 몰라보았으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삶이 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삶의 방식 중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복된 삶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삶입니까?

이름이 높아야 행복한 삶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굽신굽신 절을 해야 행복한 삶 입니까?

아니면 하담스님 처럼, 겉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푸대접을 받으며 살지만, 자기 마음속에 꾸준히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누리는 기쁨속에

살다가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고 가신 분을 행복하게 가신 분이라고 해야 합니까?

판단은 각자가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진실에 비추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를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지금의 '나'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를......

 

- 우룡 큰스님(학성선원 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