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29. 20:5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불교에 있어서 진리와 수행의 세계 ―
지운 (동화사 강원 강주)
(목차)
1. 머리말
2. 진리
1) 진리의 여러 가지 다른 이름
2) 진리의 성격과 그 두 가지 모습
3) 진리의 작용
4) 진리가 문이 되고 수단이 되며 길이 됩니다
3. 수행의 세계
1) 수행동기 ― 발보리심
2) 수행이 일어나는 그 근원과 작용
3) 다섯 수행심리
4) 수행체계 - 4성제
5) 수행의 과정 ― 신․해․행․증
6) 관찰대상과 관찰수단
(1) 관찰대상
(2) 수행의 근원인 연기법과 수증의 바탕인 계율
(3) 관찰수단
7) 관찰현상 ―삼법인을 관찰하여 체험하기
(1) 무상(無常)
(2) 고(苦)
(3) 무아(無我)
8) 체득[修證]하는 단계
4. 맺는말
1. 머리말
진리가 삶과 죽음의 고(苦)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苦)를 해결해 주는 진리라면 그 진리가 수행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진리에로 들어갈 수 있는 문(門) 자체가 되며, 진리가 실제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진리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진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가 수행이 될 때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수단이 됩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자기가 자기를 알아가는 것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기의 고통을 자기가 없애는 것
자기의 잘못을 자신이 용서하는 것
내가 나를 깨우는 것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
이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으로
바깥 경계에 전혀 동요되지 않으니
진리에로 돌아가며 진리자체인 지혜가 되어
세간의 고통을 구제하여 평안을 구현합니다.
2. 진리
1) 진리의 여러 가지 다른 이름
세계적인 종교들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신론적 종교들과 창조주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종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이 유신론의 예이겠지요. 불교, 자이나교, 고대 인도의 상카파 등이 무신론의 예입니다.
무신론적 종교들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영원하고 불변하고 불멸하는 하나의 영혼인 아트만(atman)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와 부정하는 종교로 나뉩니다.
불교는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아를 이야기 합니다.
무아(無我)는 공(空)입니다. 특히 공은 어떤 사물 안에도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독특한 개념입니다.1) 즉 연기법(緣起法)법의 다른 이름이 공(空)입니다.
불교에서의 진리라고 함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해 있다는 것이며, 나란 생명은 다른 생명에 의해 존재함을 말합니다.
이 연기법의 다른 이름으로 인연, 무상․고(苦)․무아의 삼법인, 공, 중도, 법계, 여래장, 진제, 진여, 일심, 선가(禪家)에서는 한 물건, 주인공, 화두 등이 있습니다.
이 진리의 특성은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인식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억지로 진여(眞如)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이치를 추구하거나 의미부여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선가에서 쓰는 단어 중에 화두(話頭)라는 용어는 말과 생각 이전의 자리를 지시할 뿐입니다.
경론(經論)에서 쓰는 진리의 말에는 이치의 길과 말길이 붙을 수 있지만 화두라는 말은 그 어떤 것도 용납이 되지 않는 진리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본래 모습을 보거나 생각할 수 없어서 참구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간화선입니다.
2) 진리의 성격과 그 두 가지 모습
『연기법경』에 의하면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안하거나 관계없이 법(法)의 계(界)는 상주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2)
연기법은 모든 존재가 그물같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설합니다. 상호의존은 곧 전체이며, 동시이며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동등하고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며 공간적으로 불변의 실체나, 말이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끔 하는 영혼같은 자아가 없음을 설합니다. 이는 안과 밖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는 곧 걸림 없으며 상호의존하며 어떤 것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무시이래(無始以來)의 것이며 일체 모든 것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과 생각으로 고정시킬 수 없습니다.3)
앞서 말한 진리(眞如)의 성격에는 자아와 실체 없음의 공(空)의 모습과 인연을 따르는 불공(不空)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4) 전자는 진리의 공의 측면인 불변(不變)을 말한다면 후자는 연을 따르는 불공의 수연(隨緣)하는 측면인데 이 둘은 하나 속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을 따르기 때문에 몸과 환경의 영향을 받아 고뇌하는 중생이 될 수 있으며 수연이 본래 무자성의 공성임을 깨달으면 중생의 연을 따라 무한 자비심이 일어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연을 따르는 진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원인과 조건을 알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수행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면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는 원인을 심으면 그에 대한 결과인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원인이 제거되거나 심어진다는 것은 그 원인이 곧 무자성공(無自性空)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연기이며 깨달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생사고를 벗어나기 위해 깨쳐야 할 인식대상이지만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궁극적인 것으로 지혜를 말합니다. 지혜 또한 연기이기 때문에 지혜의 완성은 곧 깨달은 이, 진리자체가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5)
3) 진리의 작용
진리가 고(苦)를 만날 때 고(苦)를 없애주는 힘을 가집니다. 즉 괴로움을 자각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고(苦)에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연민심을 일으키며 또한 연민심을 통해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보리심이 일어나면 보리심은 수행방법을 배우게 하고 여기서 자기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음을 믿고, 이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내적관찰의 수행을 하게합니다. 이러한 내적관찰을 통해 선정(禪定)을 얻고 선정을 바탕으로 하여 반야지혜가 일어나며, 반야지혜가 최종에는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깨달으면 모든 고(苦)와 고(苦)의 원인이 사라져서 진리 그 자체로 돌아갑니다.『원각경』에 의하면 모든 것이 원각에서 나와서 다시 원각으로 돌아가지만 원각은 바뀌지 않습니다.6) 마치 허공에 꽃이 피고 지지만 허공은 변함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때 비로소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본래 없어 무각(無覺)이며 닦고 보니 닦을 것이 없어 무수(無修)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잠스님은 『법성게法性偈』의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을 주석하여 이르시기를,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30여 여관을 전전하다가 꿈에서 깬 후에야 비로소 침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7) 그러나 진리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 마명보살은 설하기를, “지혜가 번뇌를 없애고 난 뒤 밖으로 중생을 향하여 자비심을 일으켜 구제활동을 한다”라고 합니다. 즉 중생을 향해 사랑과 연민심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해 갑니다. 이 모두가 진리의 본 모습입니다.
이 고(苦)의 발생과 자각으로부터 작용하는 진리의 모습은『법화경』「신해품」에 나오는 ‘궁자(窮子)의 비유’ 내용 그대로입니다.
말하자면 괴로움을 자각하고 보리심을 일으킴과 지혜와 자비심, 그리고 깨달음마저도 진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는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며 연기는 인연이며 인연은 공이며 공의 뜻은 깨달음의 뜻이기 때문입니다.8) 그래서 진리는 곧 연기로서 깨달음 그 자체입니다.
4) 진리가 문이 되고 수단이 되며 길이 됩니다
진리가 문(門)이 된다고 하는 것은 진리는 현상적으로 인연생멸(因緣生滅)하는 모습이 있고 본체적으로 무생멸(無生滅)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현상적으로 생멸하는 모습은 곧 인과 연의 상호작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인연생멸을 잘 살펴보면 바로 인연생멸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생멸의 모습은 깨쳐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 됩니다.
그리고 본체적 무생멸은 또 하나의 깨쳐들어 가는 문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연생멸은 마음의 생멸이며 여기에는 자아와 실체가 없습니다. 자아와 실체없음의 세계는 말 그대로 마음의 무생멸입니다. 따라서 관찰하는 마음을 무생멸 상태로 만들면 마음 진리의 무생멸 모습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그러면 마음 진리의 무생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체적 모습도 하나의 깨침의 문이 됩니다.
진리가 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안과 밖의 경계이며,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또한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지혜로서만이 들어올 수 있으며 밖으로 나가는 것은 지혜가 자비의 모습으로 바뀌어 중생의 번뇌망상을 없애주는 작용으로 바뀝니다.
진리가 수단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인연생멸의 문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들어가며 본체론적인 문은 사마타 수행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수단에 의해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길이 열리는 것이니(팔정도, 육바라밀,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이 모두 삼학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진리회복이며 진리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몸과 마음의 무상을 관찰하면 ‘항상하다’ ‘고정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 등의 번뇌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길[道]을 내는 것입니다.9)
이 길을 익히고 닦으면 생각과 생각의 얽히고설킨 것을 끊을 수 있으므로 느낌과 생각만으로 존재하는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성향까지 약화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즉 계와 선정, 그리고 지혜가 일어납니다. 모든 수행이 계정혜 삼학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마타는 선정을, 위빠사나는 지혜를 계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율은 선정과 지혜가 일어나도록 하는 바탕입니다.
3. 수행의 세계
1) 수행동기 ― 발보리심
왜 진리를 찾을까요? 괴로움 때문입니다. 괴로움은 번뇌로부터 생기며 번뇌는 자아로부터 자아는 진리가 본래 하나인 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 모름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습니다. 모든 존재가 본래 하나인 줄 모르는 무명, 즉 무지(無知)를 없애는 길이 바로 수행입니다.
인생을 ‘고(苦)’라고 말하면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실 행복하다고 할 때는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행복해 할 수도 있지만 그 행복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행복은 나 하나만의 행복으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존재케 하는 생명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 존재하므로 독립된 개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행복이란 일시적이며,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으니, 모든 존재는 생명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함께 행복한 삶을 가꿔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유마경』에서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나도 병이 들었으며 중생의 병이 모두 나으면 나의 병도 낫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괴로움의 해결을 물질적인 데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허상으로 인하여 삶의 허무함 또한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등의 물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되물음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고, 각종 종교 수련회 및 신행활동 등을 통해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는 수행을 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과 생각이 아닌 직접 체험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이며,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행복, 곧 일시적이지 않은 행복이 삶 그 자체가 되어 생로병사의 고(苦)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길을 제시하는 것이 불교수행입니다. 진리를 이야기할 때 만일 삶과 죽음의 괴로움이 없다면 굳이 진리를 찾거나 얻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최초의 법문에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한 말씀이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니라”(중부경 22)입니다.
2) 수행이 일어나는 그 근원과 작용
수행동기가 괴로움의 자각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러한 자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아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이 일어나는 근원으로서의 진리와 진리의 작용을 알아야만 무명번뇌를 제거하고 다시 진리로 돌아오는 길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모를 때는 엉뚱한 길로 들어서거나 삿된 견해에 떨어지거나 하여 진리로 되돌아오는 시간이 더디게 됩니다.
수행의 출발은 어디서부터일까요? 『원각경』<문수보살장>에 의하면,
“선남자여! 무상법왕(無上法王)에 대다라니문(大陀羅尼門)이 있어 이름이 원각이라 하니. 일체 청정진여와 보리열반과 바라밀이 여기에서 흘러나와 보살을 가르치게 된다.
일체 여래가 본래 인지법행(因地法行)10)을 일으킴은 모두 원조의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覺相)에 의지해 영원히 무명을 끊어야만 불도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어떤 것이 무명인가.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무시이래 여러 가지로 전도된 생각을 하는 것이, 마치 길 잃은 사람이 사방의 길에서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남쪽을 북쪽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허망하게 지수화풍의 사대(四大)로 자신의 몸을 삼고, 육진(六塵)을 반연하는 그림자로 자기 마음을 삼는 것이다. 비유하면 병이 난 눈으로 허공 가운데의 꽃을 보는 것과 같고, 없는 달을 보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허공에는 실로 꽃이 없으나 병이 난 눈은 허망하게 집착한다.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허공의 자성(自性)에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재의 꽃이 생겨나는 곳에도 미혹한 것이다. 이 허망한 집착으로 되풀이 되는 생사가 있으므로 무명(無明)이라 한다.
선남자여, 이 무명은 진실로 어떤 바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같다. 꿈을 꿀 때에 꿈속의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깨어서는 조금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많은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멸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멸하는 곳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중생은 생멸이 없는 가운데에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윤회하는 생사라고 설명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11)
이 경문의 내용은 수행의 출발은 바로 원각(圓覺)임을 설합니다. 원각의 특성은 곧 원만히 비추는(圓照) 것으로서 무명이 이 원조에 의해 소멸되고 수행자가 부처를 이룸을 설하고 있습니다.
즉, 수행출발의 근원이 원각이며 원각의 작용이 원조로서 무명을 없애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바꾸어서 말하자면 무명 때문에 원각의 원조가 일어남을 설하고 있습니다. 허공의 꽃 비유는 허공의 꽃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설합니다. 즉 무명이란 착각에 의해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한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해도 새끼줄이 뱀으로 될 수 없습니다. 뱀은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사윤회란 뱀과 같은 것임을 설합니다. 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무명에 의해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마음이 움직이면 고통이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뢰야식이 직접원인인 인(因)이 되고, 근본무명이 간접원인 즉, 연(緣)이 되어 이 인과 연에 의해 무의식이라는 아뢰야식인 근본마음의 생멸이 있게 된다고 설합니다.
나아가 무명이 인이 되고 육진(六塵) 경계가 연이 되어 이 인연으로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인 감각과 의식, 그리고 자아의식인 제7 말나식이 물결치듯 요동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중생이라고 합니다.12) 현실의 괴로움은 결국 그 근원에 무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무명과 그 파생인 번뇌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통을 자각함으로써 무명번뇌를 없애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바로 원각의 원조입니다.
비유하자면 허공은 움직이지 않으나 향연기나 향기가 일어나면 향연기와 향기는 허공에서 사라집니다. 이는 허공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향연기나 향기가 피어오름으로써 허공이 없애는 작용을 하는 것같이 보일 뿐입니다. 이 허공같은 작용이 원조의 청정한 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허공은 연기나 냄새가 있거나 말거나 변함없습니다. 단지 연기나 냄새 때문에 작용한 것 같이 보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작용을 『원각경』에서는 인지법행(因地法行)이라고 합니다. 인지법행의 법행은 진리의 행 즉, 진리의 작용 또는 진리의 활동입니다. 인지(因地)는 과지(果地)의 대비되는 말로서 인은 원인이며 지(地)는 비유입니다. 법계의 체가 두루 일체공덕을 섭지하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가 산과 바다 등을 가지는 것과 같으며 일체의 선인(善因)을 능히 생성시켜서 일체의 선과(善果)를 성숙시키는 것이 마치 대지가 능히 싹과 줄기, 잎 그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13)
이와 같이 원각의 마음은 땅과 같이 무명번뇌가 일어나면 이 무명번뇌를 없애는 작용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원조(圓照)입니다. 이 원조가 무명번뇌를 타파하고 부처를 이루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며 원각이 바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땅에 비유해서 인지(因地)라고 하였으며 법행은 바로 이 원각의 작용으로 무명번뇌를 없애는 진리의 작용인 원조의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지법행이 인위적인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분별을 떠나서 스스로 조작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일체의 공덕을 생기시킵니다. 공덕이란 바로 수행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14)
인지법행(因地法行)의 의미는 곧 원각이 수행의 첫출발의 근원이며 그 작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법력훈습(法力薰習)이라고 합니다. 법력은 곧 진리(진여)의 힘을 말하며 훈습은 곧 영향을 끼침을 말합니다. 원효스님은 이를 진여가 안에서 영향을 주는 것(內熏)이라고 하면서 진과 망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아뢰야의 화합식(和合識)을 깨트리고 불생불멸의 본성을 드러내어서 궁극에는 법신을 밝혀 나타내며, 상속하는 마음 모습을 없애고 드디어 근원으로 돌아가는데 바로 응신(應身)의 깨끗한 지혜를 이룬다고 합니다.15)
말하자면 법력훈습이란 곧 일심(一心)진여(眞如)의 근본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힘임을 말합니다. 괴로움이 원인이 되어 보리심이 일어남은 인연의 진리에 의해서이며, 보리심을 의지해서 내면을 관찰함과 관찰의 결과로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깨달음도 인연의 진리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모두 인지법행이며 법력훈습의 인연진리의 작용이며 활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지법행과 법력훈습은 곧 대상의 영향을 받는 진여의 작용으로서 수연(隨緣) 즉 인연, 연기의 불공(不空)의 진리 모습이라면 인연을 따르면서도 그 본성이 허공과 같이 텅 비어있어 불변의 공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같은 진여의 모습입니다. 이 인지법행 또는 법력훈습에 의해 일어나는 다섯 가지 수행심리가 있습니다. 이는 수행세계를 아는데 중요한 핵심입니다.
3) 다섯 수행심리16)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자각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마음에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 마음 작용이 일어납니다. 욕(欲),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가 그것입니다.
① 욕(欲)
욕은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생사가 없는 강 저쪽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의지로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불법을 따르는 수행자의 올바른 의욕은 바로 발보리심입니다.
② 승해(勝解)
승해는 생사해탈하는 길을 명확하게 아는 수승하고 바른 이해를 말합니다. 즉 뗏목을 타고 방향을 잡고 노를 저어 고해를 건너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수승한 이해는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정견을 세우고 발심과 신심을 돋우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수행방법을 설명하는 교리를 깊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승해입니다. 법문을 통해 깨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가는 길을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그 길로 가면서 두 눈으로 사물을 확인하듯이 체험해야 합니다.
③ 염(念)
염은 수행하게 되면 정념(正念)이 됩니다. 고해(苦海)를 건너는 방법을 배워 직접 뗏목을 타고 저쪽 언덕으로 항해하는 실천이 염입니다. 특히 수행자의 염은 정념으로 몸과 마음을 직접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방법에는 사마타과과 위빠사나관이 있습니다. 이 관찰방법을 통해 체험이 생기고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견고해지면서 신심이 증장되어 갑니다.
다시 말하면, 승해가 가는 방향과 가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하여 정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면, 정념은 직접 눈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확인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은 의심을 해소하고 불분명한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생각이 추상적이라면 눈은 사실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추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현실입니다.
알아차림[正念]은 몸과 마음이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삼법인임을 깨우치게 합니다. 알아차림의 꿰뚫어 보고 아는 힘은 고요한 선정이 생기도록 하며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맑고 고요한 거울 같은 선정의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삿된 견해가 청정해짐으로써 혜(慧)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④ 정(定)
정이란 마음의 고요함입니다. 이는 탐진치(貪瞋癡)의 강물을 거슬러서 뗏목이 흔들림 없이 강 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정념의 바른 마음 집중[사마타관]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고요해 지는 것입니다.
선정(禪定)이란 마음의 고요함으로 고정관념 없이 대상을 주시하는 마음인데, 이를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체의 형상과 감각의 본질을 꿰뚫어 감각과 지각에 걸리지 않는 집중된 의식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정중의식이 작용하니 이를 ‘몽중일여(夢中一如)’라고 합니다. 선정은 몸과 마음이 삼법인임을 꿰뚫어 보고 아는[正念] 결과입니다.
⑤ 혜(慧)
혜는 선정에 의해서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이 알아차림을 통해 삼법인(三法印)임을 꿰뚫어 보고 아는 것[위빠사나관]을 말합니다. 뗏목이 저쪽 기슭에 도달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곧 번뇌의 거센 물결을 건너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뗏목이라는 방편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정에 의해 지혜가 깊어져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번뇌를 잘라냅니다. 정념에 의한 깊이 있는 관찰의 결과로 선정과 지혜가 완성되어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해결하니, 욕․승해․염․정․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4) 수행체계 ― 4성제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 의해 수행동기가 생기기 시작하는 발보리심은 다섯 수행심리가 말해주듯이 본격적으로 내적 관찰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지만 수행체계가 바로서지 못하면 수행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섯 수행심리 중 승해(勝解)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즉 수행체계가 바로 사성제입니다.
苦․集․滅․道의 四聖諦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녹야원에서 成道 후 최초로 교진여등의 다섯 수행자를 위해 부처님께서 설파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사성제라는 최초의 가르침을 편 부처님의 本意는 중생들이 겪고 있는 온갖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苦)는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苦)이므로 결과이며, 집(集)은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因緣]이며 멸(滅)은 고(苦)의 원인과 고(苦)가 소멸된 상태인 그 결과로서 열반을 말하며, 도(道)는 이 열반에 이르는 원인으로서 팔정도 수행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곧 인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의 핵심은 우리 모두가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데도 고통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아주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인연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성취하려면[발보리심]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과 조건들[因緣]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내고,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합니다. 그에 덧붙여,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원인과 조건들을 확실히 알아내고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오직 괴로움의 소멸에 있을 뿐이며 누구든 궁극의 깨달음으로 발견하는 바가 있다면 사성제뿐일 것입니다. 이유는 이 사성제야말로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다주는 최상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當知經》에서는
“괴로움의 진리는 마땅히 알고 이해하여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는 마땅히 알고 끊어야 한다.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는 마땅히 알고 증득하여야 한다.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의 진리는 마땅히 알고 닦아야 하느니라.”17)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 사성제를 통해 완전한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는 길도 이 사성제에 있는 것입니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께 ‘스승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이라고 불리우십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바로 ‘사성제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붇다, 곧 깨달은 사람이니라”18)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성제를 이해하고 끊고 닦아 증득했다면 그를 아라한이라 부릅니다. 그는 이미 애욕을 끊었으며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으며 교만과 무명 등의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할 일을 이미 마치고 모든 무거운 짐을 버려 자기의 이익을 얻고 모든 존재의 얽힘을 없애고 바른 지혜로 잘 해탈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19)
이러한 사성제의 가르침은 어떤 부처님이라 해도 한결같이 가르쳤을 핵심적인 수행체계이며 직접 수행을 통해 체험한 것으로 사실성과 실증성을 갖춘 불교교리의 대표가 되는 가르침이며 이는 곧 중생이 부처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의사의 진료방법에 응용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20) 의사는 먼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발생과정을 찾아낸 다음 병을 제거할 방법을 검토한 후 처방을 내립니다. 이와 같은 의사(醫師)의 진단(診斷)에는 정확도가 요구됩니다. 어떤 의사는 질병을 과장해서 희망을 포기하라고 엄숙하게 선언하며, 또 어떤 의사는 오진으로 병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아무런 치료도 필요치 않다고 거짓 위안으로 환자를 안심 시킵니다. 전자는 비관론자, 후자는 락관론자로써 모두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명한 의사는 질병의 징후를 바르게 진단하고 질병의 원인과 발생을 이해하여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고 확신한 다음 환자를 치료하여 구해냅니다. 이러한 의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질병에 대한 현명하고 과학적인 의사입니다.
여기서 병은 괴로움입니다(苦). 갈애(渴愛)는 병의 발생원인입니다(集). 갈애를 없애므로써 병이 제거됩니다. 이것이 치유입니다(滅).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은 그 치료법입니다(道). 이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본 사성제의 가르침이고,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우리들 스스로 걸어가야 할 현실, 고(苦)라는 출발점에서 괴로움의 해결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들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도 없이 무작정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의 괴로움인 죽고 사는 生死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목적지를 정하는 일과 둘째, 그 목적지를 향하여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인가 라는 출발점의 문제 셋째, 그 출발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가라는 방향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써의 수행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가야할 바르고 정확한 목적지가 없다면 그 목적지로 향할 출발점과 방향 및 수단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목적지가 설정되었더라도 출발점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또, 출발점이 설정되었더라도 어디서부터 그 출발의 선을 정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출발선이 설정되었더라도 방향을 올바르게 잡지 않으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방향이 정해졌지만 그 도달하는 수단이 바르지 못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출발점과 방향 및 목적지, 그리고 도달하는 방법을 정확히 제시하는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인 것입니다. 이 사성제를 부처님께서 의사의 診療와 치료방법으로 비유한 진료방법을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응해 보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四聖諦》 《良醫經》 《의사의 진단》 《수행 실천체계》
苦聖諦--苦----------善知病---------------------病의 牀態-------출발점
集聖諦--苦의 原因----善知病源-------------------病의 原因--------방향
滅聖諦--苦의 消滅----善知治病已,當來更不動發-------健康回復--------목적지
道聖諦--八正道------善知病大治------------------治療方法---------방법
수행체계인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의 핵심에 의지하여 행하는 수행방법이 매우 많지만 그 기본 요소는 바로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원효스님은 성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사방에 있는데 성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하나가 되듯이 모든 수행의 길도 다양하지만 사마타와 위빠사나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도 역시 고(苦)의 원인을 살펴서 제거하는 수단이며 깨달을 수 있는 원인을 심어 행복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5) 수행의 과정 ― 신․해․행․증(信解行證)
수행동기와 수행심리 그리고 수행체계를 이야기 했는데, 이제부터 수행과정에 대해 말하자면 5수행심리에서 말했듯이 신․해․행․증의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믿음[信]은 인과(因果)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해서 진리를 깨치려는 수행자는 먼저 인과법을 깊이 믿어야 합니다. 만약 인과를 믿지 않고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하게 하지 않고는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삼악도의 고통이 그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이기 때문에 계율을 지켜 악인(惡因)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일찌기 경허스님은 “형상이 곧으면 그림자가 단정하고, 소리가 크면 메아리가 웅장하다”라고 하였으며, 『능엄경』에 이르기를 “원인이 참되지 못하면 그 결과도 비뚤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과는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려 곧 생명에 대한 외경으로 나타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자비심입니다.21) 자비심은 곧 깨닫고자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경전의 첫머리에 위치한 “如是我聞”은 믿음을 내게 하는 말씀22)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經律論 三藏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上講禮23)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믿음을 나타내는 儀式이고 수행입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이나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할 때, 그것이 참[眞]이라고 미리 확신(確信)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언어문자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그 언어문자에 의해 언어문자에 가려서 진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문자를 통하여 언어문자 以前으로 돌아가면 진실이 보이고 그 믿음은 사실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실현시키는 것은 곧 수행이며 그것의 결과가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華嚴(현수품)云 信爲道源 功德母 長養一切諸善根”라고 한 것입니다.24) 보지 못해도 믿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信念이 있는 자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대상을 직접 확인해 보게 하는(수행자의 직관) 힘입니다. 반대로 보는 것은 믿음을 전제합니다.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빨리 깨닫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이것이 발보리심입니다. 반대로 수행에 대해 또는 수행 중에 수행을 방해하는 갖가지 의심이 생기면 더 이상 수행의 진전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의심을 종식시킵니다. 따라서 믿음은 깨닫게 하는 원인을 일으키는데 일체 모든 선한 뿌리를 생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은 곧 수행의 원인과 그 결과를 믿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음을 믿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결과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도 인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과의 과(果)가 인(因)이 되어 결과를 가져오므로 인과는 바로 진리[緣起]의 다른 이름입니다. 『대승기신론』「修行信心分」에 이 수행인과에 대해 핵심을 설하고 있습니다. 즉
“무엇을 믿음이라 하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단히 설하면 믿음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라는 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공양 공경하며 선한 마음을 일으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도 가져다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보살들을 즐겨 가까이하고 실다운 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25)
원효스님은 말씀하시기를 “믿음에 대한 답변 가운데 ‘근본을 믿는다.’고 표현한 것은, 진여라는 진리가 모든 부처님이 돌아가는 곳이고 모든 행의 근원이므로 ‘근본’이라고 말한 것이다.”26)라고 설하십니다. 믿음은 곧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것의 근원인 진리에로 돌아가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로 들어가려면 그 가는 길과 방법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해(解)입니다.
둘째, 해(解)는 앎을 말합니다. 즉 믿음에 앎이 동반되지 않으면 맹신, 또는 미신에 빠집니다. 그래서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또 앎에 믿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앎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앎은 곧 수행의 길을 아는 것으로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지도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지도보기의 앎을 통해 어떠한 표식도 없는 내적인 세계인 마음에 대해 바르게 수행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입니다.
셋째, 행(行)은 수행으로 실제로 내적관찰 해 가면서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는 원인과 조건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믿음이 확인되는 과정이며 체험을 동반하는 믿음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넷째, 증(證)은 증과(證果) 또는 증오(證悟)로서 깨달음을 말합니다. 확인되지 않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 믿음을 수행을 통해 두 눈으로 확인하듯이 확인한 세계가 곧 증(證)입니다. 증의 세계는 초지(初地)부터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까지입니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체득해 가는 기본적인 수행방편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이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행현상은 삼법인이며 체득해 가는 마음상태는 선정과 지혜, 그리고 최종으로 체득하는 것은 깨달음과 함께 해탈과 열반으로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6) 관찰대상과 관찰수단
(1) 관찰대상
관찰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나 국토, 자연환경, 지구, 우주도 대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관찰대상에 신(身, 몸)・수(受, 감각)・심(心, 마음)・법(法, 마음의 대상)의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십니다. 이를 사념처라고 합니다. 염念은 관찰대상에 최초로 접촉하는 심리작용입니다. 즉, 감각대상의 자극에 의해 마음이 대상을 향해 처음 주의를 ‘돌림’으로써 염(念)이 시작됩니다.
처(處)는 염(念)이 관찰대상에 머무는 곳을 말합니다. 염처(念處)는 관찰대상에 최초로 접촉하여 머무는 곳이며, 머무는 대상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곳입니다.27) 왜 관찰대상이 신(身)․수(受)․심(心)․법(法)인가하면 몸은 자아의 의지처인 대상이며, 감각은 자아가 향수(享受)하는 대상이며, 마음은 자아의 자체인 대상이며, 마음의 현상은 자아의 오염과 청정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28) 그래서 사념처를 통해 번뇌의 주범인 자아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 때 법계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지를 없앨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몸을 정복하지 못하면,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다.”고 『중부경전29)』36장에서 설하듯이, 몸을 통해서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신념처(身念處)라면, 수념처(受念處)는 느낌의 본질이 안과 밖, 중간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종경록』은 정의하고 있습니다.30)
심념처(心念處)의 심(心)은 의식의 의지처로서의 의(意)와 대상을 분별 인식하는 식(識)과 달리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근원적인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에서부터 의(意)와 식(識)이 작용하고 또 의지가 생기고 이성․생각․관찰 등의 심리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31)
법념처(法念處)의 법(法)의 의미는 주관[六根]과 객관[六境]의 인연에 의해 생긴 현상을 말합니다. 『종경록』은 이러한 법을 좋은 법[善法]과 좋지 않은 법[不善法]으로 설명하고 이 둘을 모두 얻을 수 없음을 설합니다.32)
『염처경』의 선법은 칠각지라면 불선법은 오개입니다. 이 선법과 불선법 모두 얻을 수 없음을 설하는데 이는 법의 현상이 일어나기 전과 그 과정 그리고 이후의 상태를 정념 관찰하면 선법과 불선법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실체가 없는 공(空)이며 무아(無我)이기에 ‘얻을 수 없음[부득(不得)]’으로 바꾸어서 말한 것입니다.33)
사념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념처(身念處): 몸은 지수화풍공 5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관찰결과 이몸이 마치 허공과 같다.
○수념처(受念處): 감각은 내외 중간에 머물지 않는다.
○심념처(心念處): 마음은 이름이며 개념이다.
○법념처(法念處): 법은 선법과 불선법을 얻을 수 없다.
(2) 수행의 근원인 연기법과 수증의 바탕인 계율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은 모든 존재가 생명의 그물망으로 서로가 서로를 존재케 하는 것이 그 본질이 되는 연기법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잘 이해하면 수행의 길이 명백해집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연기법(緣起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계(法界)[연기법]는 영원히 상주(常住)한다”34)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연기법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상의 측면으로 상호 관계성이며,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변화하는 낱낱은 그 자체로는 자아와 실체가 없는 관계로 맺어진 변화이지만, 낱낱이 상호 관계하는 전체의 장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변화없이 상주하는 법계입니다.
이 두 측면은 본래 하나입니다. 곧 낱낱의 변화는 그 자체로 전체성에서의 연기이므로 무변화이며 전체성의 무변화는 낱낱의 변화 자체가 전체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의 이러한 두 측면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존재의 모든 것을 깨닫는 길입니다. 이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의 두 측면은 사마타관觀과 위빠사나관觀이라는 방법으로 상응함을 제시합니다. 자아와 실체가 없는 무변화에 이르게 하는 관찰방법으로는 대상의 표상(表象)을 만들어 그 표상에 집중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35) 이를 사마타관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은 마음의 작용이 그치게 되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연기의 무변화의 측면과 하나가 됩니다. 그 결과 선정이 일어납니다.
또 한 방법은 마음의 본성인 깨어 있음에 초점을 맞추어 본연의 마음자리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즉 마음이 몸과 마음의 어떠한 경계에도 의지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마음 작용(생각)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는『대승기신론』의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드는 방법입니다.
위의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생각의 흐름을 그치게 하여 선정을 얻거나 실상을 깨닫는 방법입니다. 현상의 측면과 상응하는 관찰은 몸과 마음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인연의 모습을 사유하여 그 이치를 알아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게 하여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알아차림을 위빠사나관이라고 합니다. 즉 마음과 대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는 상호 관계성을 직관하게 되면 현상에는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자아와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고, 모든 형상에 끄달리는 마음이 그치니 분별하는 바가 없어집니다. 이로 인해 불생불멸이 드러나면 경계 따라 물같이 흐르는 마음이 그치기 시작하면서 선정이 생기게 되고 지혜가 계발됩니다.
그런데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 이루려는 선정과 지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정신무장이 없이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율입니다. 계율은 일상생활 속에서 대상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불필요한 생각을 절제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선정을 일으키는 사마타관이 잘 되도록 도우며 또한 선정을 얻게 합니다. 이 선정의 힘은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고요히 잠재우는 힘이 있으며 이 선정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쳐주는 거울 같은 바탕이 되어 지혜를 일으키니 무명번뇌 뿌리를 잘라버리는 반야의 검이 되어 무명번뇌로부터 속박된 몸과 마음 해탈되어 진리를 구현시킵니다. 그래서 계․정․혜 삼학에 대해서 서산스님께서는『禪家龜鑑』에서
“계율이거나 선정이거나 지혜이거나 그 중 하나만 들어도 셋이 구족하여
있어 낱낱이 홑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다.”36)
라고 하여 분리되지 않음을 설하고 있습니다.
(3) 관찰수단
대상관찰은 염(念)이 합니다. 염(念)은 곧 사마타(止)관과 위빠사나(觀)관의 지혜입니다. 지관(止觀)은 『대승기신론』에서는,
“어떻게 지관(止觀)을 수행하는가. 지(止)란 모든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 관(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관(觀)이란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니 위빠사나 관(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뜻으로 점차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않는다면 지(止)와 관(觀)이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37) 라고 하여 위빠사나 관이란 발생과 소멸의 인연하는 현상[法]의 모습을 분별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38)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상호관계는「海東疏」에 “나타난 모습을 따라 논하면 정(定)을 지(止)라 하고 혜(慧)를 관(觀)이라고 하나, 사실대로 말하면 정(定)은 지(止)와 관(觀)에 통하고 혜(慧)도 또한 이와 같다.”39)라고 하여 말 그대로 지관쌍수(止觀雙修)하는 것입니다.
지관쌍수의 의미는 대상에 대해서 그 작용의 쓰임새가 다르지만 함께 작용한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한 맛이고 짝을 이루기 때문에 함께 닦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대승기신론』에서는 한 마음[一心]에 두 가지의 문을 말합니다.40)
이 문(門)이란 깨침의 통로이자 윤회의 통로도 됩니다. 심진여문(心眞如門)에는 사마타[止]수행으로 일심(一心)에 이르고 심생멸문(心生滅門)에는 위빠사나[觀]로 일심에 이르는 수행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에서는 지관쌍수(止觀雙修)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지관쌍수를 하게 되면 이 두 문을 같이 동시에 관통하여 진여의 한 마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모습을 가집니다.
사마타관과 위빠사나관은 정념으로 합니다. 정념에 의해 선정과 지혜가 일어나고 균등해 지기 때문입니다.
정념(正念)은 첫째, 대상에 최초로 반연하고 둘째,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겨냥의 성질이 있으며 셋째, 보고 알아차리는 통찰이며 넷째, 대상에 끌려가지 않고 굳게 주립(住立)하는 집중으로서 문의 기둥[門柱]과 같은 성격이며 다섯째,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챙기는 마음챙김이며 여섯째, 앎(知) 일곱째, 억념(憶念)이고 여덟째, 깨어 있음의 특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변하는 것[無常]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관념으로 조작된 변하지 않는 것, 곧 이름 붙이고 생각으로 그리는 것은 알아차린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그렇게 보이도록 조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하는 것에는 이름 붙이고 생각을 개입시킬 수 없으므로 대상의 이미지가 마음에 머물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정관념이 형성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정관념이 부서집니다. 즉 무상을 보고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무상한 대상에 매몰되지 않아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며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챙겨 보호할 수 있어서 평안하고 고요해집니다. 그것은 이름과 생각으로 그려진 대상이 마음 앞에 떠오르다가도 알아차리는 마음에 의해서 사라지면서 조작된 이미지가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순간 번뇌망상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염이란 현재의 대상에 따라가지 않으면서 또한 과거사에 안주하여 매몰되지도 않고 미래의 불투명함에 불안하지 않아 늘 현재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억념(憶念)은 불망실(不忘失)41)을 의미하는데 대상의 흐름까지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전후찰나(前後刹那)로 변하기 때문에 전과 후의 찰나적 현상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전후찰나의 흐름인 무상성(無常性)과 무상성의 다른 모습인 무자성(無自性) 공성(空性)을 알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무상성과 공성을 잊어버리지 않고 아는 불망실(不忘失)의 작용은 현재 이 순간의 마음으로서, 과거를 기억하거나 미래를 추상하여 유(有), 무(無), 단(斷), 상(常) 등의 사견(邪見)이 일어날 틈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의 마음은 거울이 오고 가는 대상을 비치되 거울 그 자체는 평정을 잃지 않는 것처럼 들뜨는 도거(掉擧)나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않고 정(定)과 혜(慧)의 균등을 유지하면서 수행을 진척시켜 가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念)을 관(觀)하는 지혜42)라고 합니다.
염(念)에는 망념(妄念)과 정념(正念)이 있습니다. 망념은 진실하지 않고 대상의 변화에 끌려가 함께 허망하게 변하는 염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스스로 보아도 보는 줄 모르고 들어도 듣는 줄 모릅니다. 그러나 정념은 마치 성문(城門)을 지키는 수문장이 오고가는 사람을 유심히 살피지만 따라가지 않듯이, 대상을 면밀히 살피면서 거리를 두고 따라가지 않는 염(念)을 말합니다.
즉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관이 분명히 다르게 구분되기 때문에, 볼 때 자기가 본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소리를 들을 때도 자기가 듣는 줄을 스스로 압니다. 이렇게 스스로 아는 이 앎이 정념이며, 이런 상태가 지속됨은 깨어있음이며,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열린 삶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7) 관찰현상 ― 삼법인을 관찰하여 체험하기
나와 남, 나와 환경 등으로 경계선을 그으므로 인해 괴로움을 야기시키는 것은 대상을 고정화시키는 말과 생각이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나’라는 생각이 그 근본원인입니다.
경계선을 없애는 방법은 지관(止觀)으로 바로 삼법인(三法印) 관찰입니다. 흔히 내 밖에 따로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의 관계로 있을 뿐 어떠한 것도 사실 없습니다. 외부 대상의 실재성은 곧 그와 상대하는, 내부의 자기가 실재한다는 것에 근거합니다.43) 그래서 경계선을 없애는 것이 무상․고․무아․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즉 삼법인을 관찰할 때 변화나 고(苦)를 주재하는 자아가 있는지 또 알갱이 같은 것이 있어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무상은 곧 고(苦)이며 무아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고(苦)와 무아를 관찰할 필요가 없는데 고(苦)와 무아를 왜 관찰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무상을 통해서 고를 알 수 있고, 무상 가운데 주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고집을 타파하기 위해 무상 속에 무아를 설합니다.『반야경』에는 ‘무상이 곧 공’이라고 하여 무상한 가운데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실체를 부정합니다.44)
(1) 무상(無常)
몸의 5대 현상은 감각(형색, 소리, 냄새, 맛, 촉감)으로 표현됩니다. 물론 마음 상태, 생각의 흐름도 관찰대상이지만, 특히 감각의 무상을 관찰하게 되면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즉 상(想)의 심리가 일어나지 않는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상을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고 그 상을 유지하려는 심리[思, 業]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고요해지고 빛과 같은 지혜가 계발되는 것입니다. 물론 감각의 무상을 놓치게 되면 형상과 생각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이처럼 무상을 관찰하면 감각 이전의 촉(觸)의 연기하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되며, 현재 이 순간으로 의식이 깨어나며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무상의 관찰은 형상의 매임에서 벗어나게 하고 매 순간 대상을 조작하는 업[思]을 짓지 않도록 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무상을 잘 관찰하면 무상 속에 주재하는 자아가 없어 무아이며 머물 수 있는 실체가 없어 공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만 잘 관찰하면 삼법인을 깨치게 됩니다. 무상은 깨달음의 출발이자 끝입니다.
과거의 현상은 이미 사라져 없으며, 미래 또한 아직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 순간만이 존재함이 인식되면 의식이 현재 이 순간으로 깨어납니다. 현재 이 순간의 현상도 또한 변합니다. 먼저 같은 모양이 없음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현상이 일어나면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곳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사라지면 사라지는 그 자리를 살피면 인식해야 할 형상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緣起] 과정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연히 현재 이 순간의 현상이 자아나 실체가 없음이 확인됩니다. 즉 연기․무아․공을 체득하게 되면 인식할 대상이 없어지므로 대상에 의지하여 과거나 미래로 왔다갔다하지 않으며 가고 옴이 없는 현재 이 순간에 늘 깨어 있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관(觀)은 마치 등불과 같아서 사방으로 빛을 비추면서 동시에 등불 자체를 비추듯이 관찰하는 마음이 무상을 비추면 대상의 모습을 알 수 없으며 동시에 알 수 없는 무상의 마음이 됩니다. 즉 마음 자체가 무상의 앎이 됩니다. 이 무상의 앎이 마음에 가득 찬 갖가지 상을 타파합니다. 상相이 없는 마음이 되어 현재 이 순간에 깨어나면서 형상에 걸리지 않아 자유롭습니다. 이를 무상해탈無相解脫이라 합니다.
깨달음의 통로로 삼법인 중에 무상이 첫 관문입니다. 무상에는 말과 생각을 붙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것은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은 대상을 고정시킵니다. 이처럼 무상에 생각과 말을 붙일 수 없으니 무상을 보고 있는 마음은 말과 생각을 떠나게 되면서 마음은 비워지고 청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상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무상입니다. 따라서 무상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고와 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 고(苦)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구하는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은 마치 가슴에 응어리가 걸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구하는 마음은 무상을 보게 되면, 구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음을 보게 되면서 불만족의 심적 고통이 일어납니다. 이 심적 고통에 의해 육체적 고통도 일어납니다. 육체적인 통증 등의 고통에는 몸이 ‘나’ 또는 ‘내 것’이라는 소유관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통해 무상의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고(苦)는 무상 속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무상의 체험이 구하는 마음[業]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몸에 통증이 생기면 이는 모두 업장에 의한 것임을 이해하여야 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고의 성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고를 관찰해야 구하고자 하는 고(苦)에서 벗어나는 길이 보이고 마침내 해탈하게 됩니다.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에 보면 쟌부카다카(閻浮車)라는 외도사상가(外道思想家)가 사리풋타를 찾아 와서,
“벗 사리풋타여, ‘고(苦)다, 고(苦)다’ 하지만 벗이여, 어떤 것이 고苦입니까?”
“벗이여, 이런 세 가지가 고(苦)입니다. 그것은 고고성(苦苦性)․괴고성(壞苦性)․행고성(行苦性)입니다. 이 세 가지가 고(苦)입니다.”45)
라고 했습니다. ‘괴로움’이라는 고苦의 성질[苦苦性(dukkha-dukkha)]에 대하여 물질적․정신적 모든 일반적인 괴로움을 「대구치라경」 제9에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의 팔고(八苦)로써 설하고 있습니다.46)
그러나 ‘괴로움’이라는 고(苦)의 성질[苦苦性]을 깊게 살펴보면, 모두 형상이 무너지는 데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서로 떨어지고 부서지는 데서 소유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고성의 속성이 괴고성(壞苦性)입니다.
‘괴(壞)’라는 고(苦)의 성질[壞苦性(viparinama-dukkha)]은 현상의 무너지고 부서지는 변화에 의한 괴로움으로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들은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며, 이것이 변할 때 육체적 고통․정신적 괴로움을 낳습니다. 수행 중의 몸의 변화(무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변화가 고의 괴고성입니다.
그런데 형상의 무너짐으로 인하여 생기는 괴로움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형상을 유지하려는 마음[業]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 무너짐에 의해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 공(空)하기 때문에 무너지고 부서짐이 있더라도 하등 괴로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존재의 무너지고 부서진다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공을 모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현상이 변함없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업은 곧 생각입니다.
즉 생각[思]에 의해 존재가 형상으로 조작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작하는 것은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조작되어 있는 것은 그 본질이 공이면서 현상으로는 인(因)과 연(緣)으로 조건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모르는 무지의 속성을 가진 업에 의해 있게 된 모든 것은 허상이며 환(幻)입니다. 무너지고 부서지면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업이 바로 오온 가운데 행온(行蘊)입니다.
‘행(行)’이라는 고의 성질[行苦性(samkhara-dukkha)]은 조건지어진 것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야기되는 것을 말합니다. 고고성苦苦性과 괴고성壞苦性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되는 사실인 반면, 고의 세 번째 형태인 행고성은 고성제의 가장 심오한 측면으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나’로 여겨지는 ‘몸’에 대해 정념 관찰을 해보아야 합니다. 몸은 바로 업(業)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행고성의 행은 형성력(形成力)이라는 뜻으로 형상을 조작함을 말합니다. 이는 곧 사(思)를 말하는데, 사(思)는 바로 선과 악, 의도가 들어가 있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바로 업입니다. 이 업을 사업(思業)이라고 하고, 사업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말과 행위를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말과 행위로 이행(已行)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업(思業)은 형상을 조작하기 때문에 부서지는 고통을 일으킵니다. 마치 아끼는 물건이 망가지거나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 몸도 어떤 충격을 받거나 조건이 달라졌을 때는 고통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모기에게 물렸을 때 가려움이나 통증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업에 의해 형성된 몸이 아니라면 통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색계(色界) 초선정(初禪定)에 들어갔을 때에 욕망이 사라지고 육체의 고통도 사라지지만 모기에게 물릴 때에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특히 고통을 일으키는 업에는 반드시 자아관념과 실체관념이 들어 있어서 그 통증을 배가시킵니다.
그러나 만일 몸이 본래 감각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현상임을 알아차리고, 본질이 공이며 현상은 인연으로 이루어짐을 깊이 체득했다면 몸은 더 이상 업의 모습이 아니라 진리의 모습인 법신(法身)인 것입니다.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이라는 증도가(證道歌)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이제 고를 해결하기 위해 가는 길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업에 의해 형성[行苦性]된 몸과 마음은 무상을 만나 무너지면서[壞苦性] 고가 나타나는 것[苦苦性]입니다.
불쾌감이나 통증은 모두 ‘나’이고 ‘내 것’이라는 번뇌에 속박되어 있는 감각입니다.47) 우선 형상이 무너질 때(무상) 고苦의 느낌이 일어남을 알아차립니다. 그 관찰방법은 고의 감각이 몸 안과 바깥 그리고 중간 어디에 머무는지 또는 처음․중간․끝 어디에 머무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밖․중간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을 관하는 것입니다.48) 그 결과 괴로움을 관장하고 조종하는 자아와 변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 다른 방법은 무상을 관찰하는 방법과 같이 통증이 일어나면 통증을 일으키는 주체가 있는지 살펴봅니다. 없다면 무아이며 통증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통증이라는 실체가 머무는지 살핍니다. 머물지 않고 바뀌어 가거나 사라지면 통증은 실체가 없는 공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관찰해 갈 때 형상을 형성하고 조작해 가는 업이 힘을 잃어갑니다. 매순간 조작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상이 형성되지 않고 도리어 형성된 형상이 사라져 갑니다.
형상이 형성되지 않거나 형성된 형상이 사라져 가면 무너지고 부서지는 고통이 없으며, 무너지고 부서지는 고통이 없으면 삶과 죽음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몸의 통증 등은 곧 마음이며, 몸은 마음의 그림자임을 알게 됩니다. 조작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과거나 미래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구하고 원하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無願解脫]
덧붙이자면, 첫째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둘째의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잘 관찰하면 무아(無我)를 체득하게 됩니다. 둘째의 고(苦)도 무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무상한 현상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서 관찰할 때나, 고의 현상을 안․밖․중간 또는 처음․중간․끝을 관찰할 때 이렇게 반문합니다.
‘마음대로 무상과 고를 조절할 수 있는 자아가 어디에 있는가?’ ‘무상 또는 고에서 변하지 않는 알갱이 같은 실체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탐구하다 보면 무아와 공을 저절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3) 무아(無我)
무아는 ‘주재하는 자아 없음의 무아’와 ‘실체 없음의 무아’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는 무아(無我)이며,49) 후자는 공(空)입니다.50) 이는 무상과 고를 관찰한 결과인데,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더 깊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무아는 무상과 고를 주재하는 그 어떤 무엇도 없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하면 그 결과는 힌두교의 진아(眞我)가 나옵니다. ‘나’를 전제하여 찾기 때문에 현상을 주재하는 자아와 실체가 있는 그 무엇이 상정되고, 그 무엇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의 끝은 불멸의 자아를 설정하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는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자아 없음을 알면 아는 그 마음은 빈 마음이 되며 빈 마음 그대로 번뇌에 걸림없는 해탈이니 이를 공空해탈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한 바와 같이 무상한 것은 고통이며, 고통인 것은 고통의 주체가 없는 무아이니, 이는 바뀌지 않는 여실(如實)함이며 진리[諦]입니다. 무상․고․무아로 연결된 하나 됨의 지혜가 이 고․집․멸․도를 차례차례 거쳐 온 것이므로 사성제의 수행체계를 무아 하나로 꿰뚫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념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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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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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의 무아 알아차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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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身] ― 고성제 ― 범부는 5대로 이루어진 몸[有根身]을 자아(自我)의 의지처라고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몸은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아관념에 의해 5대의 화합으로 형성된 몸은 언제나 부서지고 무너질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모두 행고(行苦)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5대 화합의 조건[行]에서 오는 거칠고 무거운 번뇌인 고통[苦](행고의 성질은 늘 일어납니다)은 몸의 정념 관찰을 통하여 몸이 새털같이 가벼워지는 편안한 깨달음의 고리[輕安覺支]가 일어나 거칠고 무거운 행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관찰해서 고성제의 이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감각[受] ― 집성제 ― 자아가 받아들이는 대상은 즐거움과 괴로움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무덤덤함의 감각[受]입니다. 이 감각에 감정과 생각을 덧붙이면 사랑과 증오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受)는 애욕과 증오의 원인이며 의지처입니다. 그래서 수를 관찰하여 집성제의 이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心] ― 멸성제 ― 자아 자체인 대상은 아집(我執)이 의지처로 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관찰하여 자아가 본래 없음을 관찰합니다. 그리하여 자아가 소멸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열반에 대한 공포가 생기는 것을 영원히 여의게 됩니다. 마음관찰[心念處]에 의지해서 멸성제의 이치에 들어갑니다.
마음의 현상[法] ― 도성제 ― 자아관념이 들어간 더러움과 깨끗함이 법입니다. 즉 탐욕과 성냄 등에 의해 더러워지고 믿음, 부끄러워함 등에 의해 깨끗하게 됩니다. 이렇게 법을 관찰하다보면 잡다한 오염과 청정한 마음의 현상[법]을 알게 되어 관찰하는 마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오롯이 깨어있게 됨으로 도성제의 이치에 들어갑니다.51)
이렇게 사성제의 이치에 들어가기 위해 사념처의 관(觀)으로 수행한 그 결과는 몸의 무아 깨침과 마음청정입니다. 몸 깨침은 곧 무아이기에 무상한 것은 실체 없는 무아요, 고통은 고통의 주체가 없는 무아입니다. 그래서 무아를 체득한 마음에서는 곧,
① 몸에 의지처로 삼을 만한 실체로서의 자아(自我)는 없으니 괴로움의 주체가 당연히 없어 괴로움의 진리[苦諦]가 무아이고
② 괴로움의 원인인 수(受)와 수(受)를 통해 나타나는 5대의 현상과 갖가지 번뇌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일어남은 반드시 사라지니 수(受)와 번뇌도 조건에 의한 것이라 괴로움의 원인인 집제(集諦)도 무아이고
③ 괴로움과 고통을 일으키는 번뇌의 소멸은 소멸되는 주체가 없으므로 번뇌가 소멸한 청정한 마음인 멸제(滅諦)도 무아이며
④ 정념으로 깨침의 길을 가는 수행자 본인도 무아입니다.
이 내용은 몸 관찰만 한정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수행과정을 통해 관찰된 몸[身]․감각[受]․마음[心]․마음의 현상[法]을 꿰뚫은 결과입니다. 그것이 사성제를 관통하는 무아의 지혜입니다.
8) 체득[修證]하는 단계
수증(修證)단계에 대해서 유식학파에서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5단계를 이야기 합니다. 또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에는 보편적으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단계를 설합니다. 이를 『대승기신론』에서는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의 4단계로 함축하여 설합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의 범부각은 유식학파의 자량위와 가행위에 해당합니다. 여기서는 대승기신론』의 수증단계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음에는 네 가지 층이 있으니,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 등의 감각층과 의식(意識) 그리고 자아의식인 말나식(末那識),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보고 듣는 등 모든 경험을 유실하지 않고 함장하고 방출하는 아리야식(識)52)입니다. 식(識)은 마음을 말합니다.
심층을 정념(正念)으로 차례로 살펴 들어가면 번뇌도 거친 번뇌에서 점차 미세한 번뇌까지 포착하게 됩니다. 생각은 生․住․異․滅의 네 가지 모습[四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 살피면 생각이 본디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원효스님의『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는사상(四相)을 꿈속의 생각[夢念]으로 비유합니다. 그래서 사상(四相)을 차례로 깨쳐 소멸해 나가는 과정을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53)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삼계의 긴 꿈에 빠져서 육도(六道)를 유전(流轉)하지만, 수행을 통해서 본래 고요한 본각(本覺)의 자리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54)
여기에서 꿈이란 번뇌로 인한 죄업에 둘러싸인 현실세계이고, 꿈에서 깨어나려는 노력은 수행입니다. 깨달아 가는 과정을 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본래 꿈이란 깨고 나면 실체가 없듯, 생각이란 실체를 깨치면 본각(本覺)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진여의 세계를 망각한 ‘긴 꿈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망념을 제거해 본래의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원효스님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서는 이와 같이 꿈에서 깨어나는 비유를 통하여, 인생이라는 긴 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몽관(夢觀)이라 하고,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꿈의 네 단계는 시각(始覺)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滅]먼저 생각은 머물러 있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멸(滅)입니다. 그러나 생각[意業, 思業]은 몸과 입에 영향을 주어서 행동하게 합니다. 즉 몸으로 짓는 살생․도둑질․사음(邪淫, 출가자는 음행)과 입으로 짓는 거짓말․이간질․악담․현혹시키는 말 등 일곱 가지 악한 죄를 짓게 합니다.
비록 악한 생각에 의해 몸과 입으로 일곱 가지 악한 행을 짓더라도 그것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여 뉘우치면, 그러한 자각을 보통 일상생활에서 범부가 깨닫는 각[凡夫覺]이라고 합니다.
두렵다는 괴로움의 자각으로 인하여 계율을 지켜 눈․귀․코․혀․몸 등의 다섯 감각기관을 제어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비유하자면, 꿈속에서 자기 몸이 큰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단지 그것이 꿈속 마음의 짓인 줄을 알지 못하고 실지로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줄 알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55)
이것을『대승기신론』에서는 앞의 일곱 가지 악한 업을 자각하고 두려워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악업을 자각한다는 것은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동반합니다. 이 노력이 깨달으려는 마음[菩提心]을 발하여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異] 악한 행위가 괴로움이라는 자각에서 비롯해서 행위를 일으키게 한 내면의 의식으로 관찰해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異)의 경계는 감각이 사라져 몸이 허공과 같습니다. 물론 눈으로 보면 몸의 형태는 있지만 무게도 없고 걸어갈 때 움직임만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몸을 관찰해 보면 허공같이 비어 있지만 아직 의식이 남아 있어서 주객의 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의식이 밖으로 향해 대상을 인식하면서 탐욕․성냄․어리석음․교만․의심․견해 등 여섯 종류의 생각이 순간순간 대상에 따라 달라지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정념하여 변화하는 생각, 즉 ‘주객이 상대하여 발생하는 앎’이 사라지면 이것을 바른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하여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합니다. 이는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일 뿐이므로, 아직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때부터 번뇌망상이 미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꿈에서 깨지 않은 채로 다시 다른 꿈을 꾸면서 ‘내가 본 것은 꿈이며 사실이 아님’을 아는 것이니, 마음 성품이 총명해서 꿈속에서 꿈인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56)
이렇게 아는 마음성품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佛性)입니다. 즉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것이 꿈인 줄 아는 것은, 다름 아닌 무명번뇌에 싸여 있던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不思議)한 법력(法力)[佛性作用]이, 삶에서 핍박하는 괴로움 때문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즉,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내적으로 영향[熏習]을 주는 것입니다. 한편 외적으로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믿음과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원(願)인 대비원력에 의지하여 신해심(信解心)을 내게 합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자각합니다.
“나와 중생이 오직 잠 속에서 긴 꿈을 꾸면서 실재라고 그릇되게 알아, 육진(六塵)의 남녀 이상(二相)을 거스르거나 따른다. 이 모두 나의 꿈이며 실제로는 (自我가) 영영 없으니, 어디에 근심과 기쁨이 있고 탐욕과 성냄이 있겠는가”57) 라고.
이 깨침의 경지는 성문(聲聞), 연각(緣覺)과 초발의(初發意) 보살의 인아집(人我執)이 타파되어,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몸이 공(空)하고 자아(自我)라고 생각되는 의식마저 사라져 공(空)한 경지입니다.
[住] 앞서 소개한 달라지는 모습[異相]의 여섯 종류 거친 생각은 밖의 대상을 인식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의식의 거친 번뇌가 다 사라져 안팎이 공(空)한 이상(異相)의 경지에서 더욱 미세한 심층으로 정념관찰해 들어가면, 대상도 대상 따라 일어나는 생각도 없는 경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부터 의식의 차원이 아닌 잠재의식 곧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아리야식58)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주객이 나누어지지 않는 업(業)의 모습과 주관인 능견(能見)의 모습과 객관인 경계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또한 주객미분의 모습은 업식(業識)이며 주관의 모습은 전식(轉識)이며 경계의 모습은 현식(現識)인데, 자아의식은 주객미분의 업의 모습과 주관의 모습이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자아(自我)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객관인 경계의 모습은 현식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마치 영상(影像)이 밝은 거울의 면에 의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59)
그 역으로 영상에 의해 거울면이 인식되듯이 자아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은 경계를 나타내는 현식을 자아로 삼고, 경계인 객관의 모습을 내 것[我所]이라고 인식하여 머물러 있는 상태이니,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의 심리를 일으키기 때문에 ‘住’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아관념을 정념수행에 의하여 깨뜨리면 부분적이나마 자신이 무아(無我)의 법신(法身)임을 깨닫는 수분각(隨分覺)을 이룹니다.
이러한 수분각은 자아관념인 나와 내 것이란 본래부터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 이외의 불멸의 실체를 믿는 법아집(法我執)까지 사라진 경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법계가 하나라는 진리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최초 한 생각’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비유컨대 꿈인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자기 몸이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줄 모르고서, 머리를 움직이고 손을 흔들어 애써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60)
[生] 한 생각이 일어나는 모습은 앞의 주상(住相)의 생각보다 더욱 미세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以前)의 업식(業識)이 생기는 최초의 한 생각이 일어나므로 ‘생(生)’이라고 합니다. 이 생상(生相)은 꿈입니다. 생상(生相)이 꿈이므로 주․이․멸이 꿈인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미세한 생각을 깨뜨려서 최초의 한 생각이 영원히 사라지면, 삶의 근거이자 상주(常住)하는 마음의 본성이 꿈에서 벗어나 현현하는데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합니다.
이는 근본무명인 한 생각이 사라진 무념(無念)이자 돈오(頓悟)를 말합니다. 곧 돈오란 홀연히 일어나는 생각이 다 사라진 경지입니다.
비유컨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의 인연(因緣)을 돌이켜 보면, 물이나 떠내려간 몸이나 모두 존재하지 아니하여 오직 본래대로 잠자리에 고요히 누워 있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61)
대승육정참회에서는 “긴 꿈을 몽관(夢觀)하면 여몽삼매(如夢三昧)를 얻는다”62)라고 합니다. 무생(無生)의 지혜를 얻어 이 꿈에서 깨어나면 본래 유전(流轉)된 바 없이 일심(一心)이 일여(一如)의 잠자리에 누워 있을 뿐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꿈에서 깨어보니 본래부터 고요한 잠자리에 누워 있었음을 아는 것을 구경각(究竟覺), 즉 부처님의 지위라 합니다.
깨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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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夫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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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似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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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分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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究竟覺 |
┌覺心初起┐ ┤心無初相│ └名究竟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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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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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두려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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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다른 꿈을 꾸다 그 꿈에서 깨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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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려고 몸부림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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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남(최초의 生相 을 깨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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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廻光返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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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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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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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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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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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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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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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識
轉識
現識 (境界相) |
┐ │ │ ├─ │ │ │ ┘ |
阿 梨 耶 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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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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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청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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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 那 識 | |||||||||||||||||||||||||||||||||||||
意 識 | |||||||||||||||||||||||||||||||||||||||
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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鼻(후각) |
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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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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舌(미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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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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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촉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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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생┐ 도 둑 질├몸 삿된음행┘ (출가자는 음행) 거 짓 말┐ 이 간 질├입 악 담│ 꾸미는말┘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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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相 轉相 現相 | |||||||||||||||||||||||||||||||||||||||
일곱가지 악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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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瞋・痴 慢・疑・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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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痴・我慢 我見・我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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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 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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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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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地 十廻向 十行 十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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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地 六地 五地 四地 三地 二地 |
佛果 菩薩盡地 十地 九地 八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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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夫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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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道位 |
修道位 |
佛地(究竟位) |
4. 맺는말
진리와 수행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청정마음이 고(苦)를 만나면 인지법행이요 법력훈습의 모습으로 진리가 작용하나니 진리가 곧 수행입니다. 그리하여 매순간 진리를 구현시키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통해서 수행의 길이 열리고
수행을 통해서 진리가 증명됩니다.
진리와 수행은 먼저와 끝이 없고 연기이기에 동시적이며 그대로 전체입니다.
가출한 자식이 온갖 고초 겪으면서 아버지가 사는 안락한 제나라 제집으로 돌아오고 제집 문안으로 아버지를 보고 들어와 다시 아버지가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진리는 공이기에 수행을 통해 공을 체득하기 시작하면 괴로움을 통해 수행하고자하는 욕구가 일어나니 그것이 발보리심이며 이는 인연발생입니다. 진리 또한 인연이니 왜냐하면 괴로움이 원인이 되어 보리심이 일어나니 인연이며 보리심 의지하니 내적 관찰하게 됨도 인연 아닐 수 없습니다.
내적 관찰을 통해 나타나는 공이 번뇌를 만나면 지혜로 바뀌어 공을 만나는 무명번뇌는 실체와 자아가 허공의 꽃피는 것처럼 본래 없어 허공같이 소멸되어 불생불멸 공 이루니 바로 열반입니다. 지혜가 바로 연기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꿈속 여러 나라 헤매면서 온갖 어려움 겪다가[生死輪廻] 이 인생 꿈인 줄 알고[智慧] 몸부림치다가[修證段階] 깨고 나니[깨달음]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음[진리]과 같습니다.
지혜가 끝인가 하면 도리어 중생 만나면 자비로 변하여 중생을 부처로 이끄니[중생구제] 인연-인과가 진리 아님이 없습니다.
‘무명번뇌 어디서 왔는가?’ 의심 생기지만 무명 또한 진리의 모습이니 무명에 물든 중생도 진리이며 고통 받는 중생도 진리의 모습인데 생사(生死)의 고통은 참을 수 없어 진여가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이 되는 것이라네.
허공에 꽃이 피고 져도 본래 허공에는 꽃이 핀 적이 없듯이 무명 또한 그와 같고 돌 여자 아이 낳는 것과 같으니 무명 또한 진리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는 곧 연기이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물질세계는 진리에 포함되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5대의 원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물질[色]은 그 성품이 지혜인 까닭에 물질의 체는 무형으로 지혜의 몸이라 하며 지혜의 성품이 색이므로 법신이 일체 모든 곳에 두루 하다고 설하는 것이다.” 라고63)『대승기신론』은 설합니다.
『화엄경』에서는 전 우주를 마음이 만들었고 특히 만들어진 우주의 체성이 그대로 비로자나부처님의 음성으로 이루어졌다고 설합니다.64) 그래서 비유하면,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되 마음을 말미암아 그림 그리는 것처럼 모든 존재의 성품 이와 같음이로다.65)
마음이 마치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五蘊이 모두 마음 따라 생김이라 어떤 法인들 만들지 않음이 없네.66)
만일 마음이 움직여 모든 世間 만든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진실한 성품을 알게 되리라.67)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응당 法界의 성품 위에 모든 것이 마음으로 만든 것인 줄 관찰할지니라.68)
라고 합니다.
특히 마음이 만든 세계는 법계연기라는 사실입니다.
普賢 09.11.20. 12:34
원효가 언제 기신론소를 썼는지, 그 밖의 저서들이 언제 쓴것인지는 아직 학계의 통설은 없을 겁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원효가 기신론소를 쓴것은 원효의 삶에서 중기쯤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시기는 제가 볼때 원효가 '화엄'을 제대로 공부하기 전의 시기로, 화엄을 잘 모를때 쓴 논서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원효의 기신론소는 마명의 기신론처럼 대체적으로 이론적으로 흐르는 것을 저는 느낍니다. 그런데 원효는 결코 이론으로 사신 분이 아니거든요
보현행원을 정말로 공부하신 분이 원효를 공부하면요,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을 그렇게 하나로 요약하려 하셨던 원효의 애절한 노력이 바로 보현행원품 하나에 있는 걸 모르셨구나
만약 원효의 화엄이, 그리고 원효가 보현행원으로 당신 사상을 회향하셨다면, 의상 화엄이 해동화엄의 주류가 되지를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고려 불교가 저렇게 되지도 않았을거구요
지운스님의 강의문에도 제가 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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