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6. 10:2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금강경은 일체 중생의 제도를 강조한 경
많은 분들이 금강경을 사상을 없애고 무아, 무주를 강조한 가르침으로 알고 있습니다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금강경의 참뜻은 그런 데 있지 않습니다.
대신 금강경의 참뜻은, <일체중생의 제도>에 있습니다.
금강경을 대할 때 이 부분을 명심하지 않으면 그만 내 생각에 빠져듭니다.
내 눈에 드러나는 금강경을 전부로 알아, 내가 만든 금강경으로 가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그렇게 많은 분들이 강의를 하셨어도, 중생 제도의 깊고 큰 뜻을 가르치신 부처님의 눈부신 금강의 마음 세계를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보리심을 낸 이는 그 마음을 어디에 두고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
착하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낸 이는 이렇게 머무르며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저 많은 중생을 모두 내가 무여열반에 이르게 하겠노라!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중생을 모두 열반에 이르게 하지만 나는 한 중생도 그렇게 한 일이 없으니,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입니다.
일체중생을 내가 구하리라!
일체중생을 모두 행복의 나라로 내가 모시겠노라!
이렇게 마음 먹고(誓願) 중생 제도의 길을 나설 때, 우리는 티끌만한 나라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를 금강경은 중생제도의 서원 이후 전개하는데, 많은 금강경 해설서들이 중생 제도의 서원은 가벼이 지나시고 나머지 부분에 주력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본래가 밝고 분명한 금강의 가르침을 복잡다난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 같습니다. 본말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중생 제도는 <상이란 것을 떠난 자리>입니다. 무아, 무주가 있은 다음에 중생 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 제도 자체가 무아 무주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내가 없기에 중생을 제도하며 내 마음이 한 곳에도 머물지 않기에 한 중생의 아픔도 내가 견디를 못하는 것입니다. 무주 무아를 안 다음에 그런 자리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 제도 자체가 무주 무아로 이끕니다. 저 중생을 기여코 제도하리라! 그런 비원 앞에는 나라는 생각, 내가 있다는 생각, 나를 위해 뭘 하겠다는 생각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을 떠난 자리, 머무를 바 없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은 중생제도라는 유위행이 무아, 공이라는 무위의 자리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생제도가 바로 무아요 일체중생의 해탈이 바로 공, 무주입니다. 이것이 금강이 알려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무주, 무아, 공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중생 제도입니다. 그리고 중생 제도는 본래가 무아 무주 공의 소식입니다.
이렇게 금강경을 바라보면 화엄과 금강이 바로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 바로 보현행원이 됩니다. 화엄경을 공부하신 백성욱박사께서 세간에 오셔서는 제자들에게 금강경 독송을 권하시며 바치는 공부를 가르치신 것도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普賢合掌
*무아 무주를 몰라도 중생제도가 일어나는 것이 금강경의 소식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 모두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 무아 무주 공을 이해하는데 주력하니, 언제 중생을 제도할꼬... 저 밝은 소식을, 그저 희론으로 만들 수밖에...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 알음알이만 늘고 내 아상만 늘어갈 수밖에...
**금강경은 중생제도의 경입니다. 발심한 보살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가 하는 수보리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의 말씀은 아주 단호하세요. 처음부터 중생구제인 겁니다.
그런데 그 중생제도를 상이 없는 자리에서 해야하고 또 정말 제대로 중생 제도를 하는 분들은 일체의 상이 없는 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후 장황한 여러 말씀이 있으나 그건 어찌 보면 잡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깨달음만 구하고 중생제도엔 별 뜻이 없는 분들에게는 귀챦은(?) 중생제도보다는 무아 무주 주상 공의 소식에 더 귀가 솔깃해지기 마련.
그러니 금강경을 천만번 만만 번 읽어도 그저 내 업장만 더할 수밖에...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던 자리에 <중생제도>가 들어가기에 중생제도는 <무상>입니다. 중생제도의 비원으로 가득 찬 자리엔 그런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어느 날 와닿았던 구절들
다시 보니 반가움과 함께 내일 부사모 부산모임 자료로 찜합니다.
말이란 참 오묘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설우스님 금강경을 읽어나가면서 보현행원과 같은듯 다른 듯 미묘한 차이를 느꼈었는데 그게 무언지 콕 집어서 설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 아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렇게 공부가 되나 봅니다.
사상을 떠나고 무아, 무주, 무염을 성취하는 것이 금강경의 목표가 아니라 중생제도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은 다른 스님들의 법문에서 접할 수 없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중생제도가 목적이라고 정리가 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지요. 보현행원을 하면(원과 행) <저절로> 사상은 사라지고 무아, 무주가 성취됩니다만 무아, 무주가 선행조건이 되어버리면 깨달음이 지상 과제가 되어버립니다.
중생제도의 관점에서 금강경 강의를 보면 새로운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보현행원의 관점에서 볼때 금강경 강의가 보현행원과 같은 듯 아닌듯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중생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다를 수가 없겠네요. 강의를 하시는 법사께서도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리 벌어질 수 밖에요.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이 경전을 보면서 금강경을 연무심님이 일체중생의 제도가 큰 뜻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보현선생님께 여쭈었더니 크게 칭찬하셨고요.
혹여 도움이 되려나 해서 올립니다.
고맙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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