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10. 04:1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원철스님이 말하는 구도의 길 알고 보면 산다는 것은 결국 드러냄과 감춤의 반복이다.
출근이 드러냄이라면 퇴근은 감춤이다. 화장이 노출을 위한 것이라면 민낯은 은둔을 위한 것이다.
피부를 밤새 쉬게 해줘야 화장발이 잘 받는 것처럼 퇴근 후 제대로 은둔해야 이튿날 자기역량을 마음껏 노출시킬 수 있다.
도시적 일상이 노출이라면 주말을 이용한 잠깐의 템플스테이는 재충전을 위한 은둔이라 할 수 있다. 연휴와 휴가도 마찬가지다.
●인생이란 은둔과 노출의 반복이다
저자 원철 스님은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불교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해인사 사보 월간 <해인>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일간지와 종교계 등 여러 매체들에 글을 기고하며 세상과 소통해 왔다. 정확하고 간결한 글 솜씨로 법정 스님을 잇는 문장가라는 평을 들은 바 있다.
그는 수십 년 전 해인사에 출가하면서 은둔적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입산 초만 해도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종교적 은둔은 은둔이 아니었다. 내공이 쌓이면서 오히려 적극적인 노출로 화답했다. 서울 종로 조계사에서 7년을 보낸 수도승 생활이 바로 그 극치였다.
어느 날 은둔과 노출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세속을 여읜다는 이름을 가진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산행과 포행을 살림살이 삼아 지내다가 다시 가야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글쓰기가 시작됐다.
일간지와 월간지 등을 통해 그의 글이 소개되면서 대표적인 노출이 되고 말았다.
우리들의 현실은 제대로 된 노출을 위해 어떤 형태로건 은둔을 위한 나름의 처방책을 가져야 할 만큼 복잡다단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어쨌거나 노출로 인한 피로와 허물은 은둔을 통해 치유하고, 은둔의 충전은 다시 노출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는 선순환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누구든지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타성에 빠지기 마련이다.
알고 보면 공간 이동 그 자체가 자기구원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때가 되면 회사나 부서를 옮기려 한다. 때로는 휴가여행도 떠난다.
이처럼 세상 속에서 살면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살기에 우리들은 무릉도원을 찾아 수시로 길을 떠난다.
◎도불원인(道不遠人),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는 데 ◎인원도(人遠道), 사람이 도를 멀리 하였고 ◎산비이속(山非離俗), 산은 세속을 등진 적이 없는데 ◎속리산(俗離山), 세속이 산을 등지고 있었구나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 보리자(菩提子)나무는 키고 크고 잎도 넓고 열매도 많았다.
이 나무는 주로 사찰 경내에 살았는데, 열매는 염주로 만들어져 선남선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래서 뭔가 고상해 보이는 '보리수'란 이름으로 변신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짝퉁이다.
인도 보드가야에서 만난 오리지널 보리수는 참으로 장대해 한 그루가 마치 숲과 같았다.
이 나무의 본디 이름은 '파필라'였다. 이 자리에서 청년 붓다가 깨달음을 완성했다고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파필라' 대신 '보리수'로 불리게 되었다.
불가에서의 보리란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내용이다.
수도원의 커피처럼 잠을 쫓는 효능 때문에 차가 절집에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전한다.
옛날 달마 대사가 참선을 하고 있었는데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졸릴 때의 눈꺼풀 무게라고 한다.
우리 모두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달마는 망설임 없이 눈꺼풀을 잘라 마당에 던져 버렸다. 얼마 후 이 자리에서 새싹이 돋더니 나무로 성장했다.
혹시나 싶어 잎을 우려 마셨더니 잠이 확 달아났다고 한다. 차나무의 시원이다. 왜 절집에서 차를 마시는지 이 전설이 말해준다.
깨를 잘 볶을 수 있는 아주머니라면 커피콩도 잘 볶을 수 있으며, 두부콩 맷돌을 잘 돌리는 할머니는 커피콩도 잘 갈 수 있다. 한 가지를 진심으로 통하면 다른 일도 되는 것이다.
'더운 날 시원하고 싶다면 화탕노탄(火湯爐炭) 속을 향해서 뛰어들라' - <선어록(禪語錄)> 중에서
더운 날에 물이 펄펄 끓는 곳, 숯불이 벌겋게 불붙어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무비 스님은 더위를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열렬하게 뭔가에 주력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며,
일생을 던져도 아깝지 않는 일에 마음을 쓴다면 그까짓 더운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라고 일갈한다.
갑자기 한파가 찾아온 지금, 너무 심신을 위축시키지 말자. 이또한 이한치한(以寒治寒)으로 다스리면 된다.
봄동, 봄은 우리말 '봄'이고 동은 한자어 겨울 '동(冬)'일 것이다. 겨울은 봄을 안고 봄은 겨울을 안으면서 서서히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주변 환경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는 여유로움을 통해 도리어 자기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설의 아름다움으로 살자.
계절의 흐름을 읽듯 인생의 흐름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짧은 가을이지만 겨울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인생의 중년기도 길지 않지만 한 호흡 고르면서 준비하는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꽃보다 할배', 요즈음 이런 프로그램들이 유독 많다. 겨울에 비유할 수 있는 노년기가 늘어난 탓이리라.
진정 '꽃보다 할배'가 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칠십대의 진평공에게 젊은 사광이 건의한 말이 <법원주림(法苑珠林)>에 나온다.
"날이 저물어도 촛불을 켜기 마련입니다. 신이 듣건대 소년의 배움은 해뜰 때의 별빛과 같고, 장년의 배움은 한낮의 햇빛과 같으며, 노년의 배움은 촛불의 밝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촛불이 밝은데 어두움이 어찌 함께 하겠습니까?"
열흘 남짓 지나가면 새해다. 벌써부터 머리에 그려지는 모습이 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정동진, 제주 성산봉 등 일출 명소로 몰려든다.
사실 햇빛은 어디인들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해 아침에 높은 산으로 동해 바다로 모여드는 풍속도를 만들었다.
또 지나가는 해를 바라보며 송년을 기념한다는 변산의 월명암도 연말이면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눈을 밟으며 한밤중이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걸음걸이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 오늘 내가 남겨 놓은 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 청허휴정 선사, <눈을 밟으며>
묘향산에 오래 머물었던 까닭에 서산대사라고도 알려진 이 선사의 시가 유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백범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었기 때문이다.
선각자는 사람들을 위해 눈을 치워야 하는 걱정뿐만 아니라 후학(後學)을 위한 공부 근심 역시 가득하기 마련이다.
눈길을 걸으면서도 뒤에 남는 발자국까지 걱정하지 말자. 그냥 자신이 갈 길만 유유히 바르게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판단은 뒷사람의 몫이다. 설사 앞사람의 발자국을 똑같이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할지라도 그건 같은 길이 아니라 뒷사람이 새로 가는 길일뿐이다.
'노 픽처!', 공부하는 사찰의 경내에 들어서는 목격하게 되는 경고문이다. 찰칵대는 소리가 명상공부에 방해되서 일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그 당시를 떠올리며 행복해 한다. 사진은 마음영상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사라지는 게 인생사 아닐까?
'모든 존재는 이슬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 <금강경> 중에서
마을의 주전자는 절집에 오면 '차관(茶罐)'이 된다. 막걸리를 담는 게 아니라 청정수를 올리는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같은 그릇이지만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주전자가 되기도 하고 차관이 되기도 한다.
주전자가 차관이 되는 것처럼 번뇌가 바로 깨달음으로 바뀌는 것이니, 범부의 모습으로 성인이 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알고 보면 이 세상 전체가 80년 평생을 머물러야 하는 거대한 총림이요 또 수도원이다.
서로 의지하며 또 참지 않고서는 함께 살 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선 붙박이건 떠돌이건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했다.
그것은 나와 남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20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 보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 오조(五祖) 법연(法演) 선사
수백 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마당 한편의 화강암 수곽은 12월이 되면서 물을 담는 본래 역할을 끝내고 바닥을 드러낸 채 제 몸을 말리고 있다.
설사 생명 없는 돌이라 할지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쉼이 해마다 있었기에 그 자리를 오 늘까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사람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쉼을 통한 한 매듭은 한 켜의 나이테가 되고 한 해의 연륜이 되며 또 한 살의 나이가 된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 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 계종학명 선사
◑오늘은 어제의 또 다른 날이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철 스님이 말하는 집 또한 본래의 자리, 즉 깨달음의 길이기에 멀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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