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13. 20:4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법전 큰스님을 회고하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큰스님께서 열반하시고 큰스님에 대한 이 글을 쓰는 순간 모든 경전의 첫머리에 왜 저 문장이 가장 먼저 나오는지 알 것 같다. 큰스님의 자서전, ‘누구 없는가’ 원고를 정리한 인연으로 이 글을 쓰면서 나 또한 스님께 들은 그대로 기록해보려고 한다. 12년 전인 2003년 5월에서 2009년 말에 책이 나오기까지 몇 년 동안 퇴설당으로 여러 차례 찾아뵙고 스님의 일생을 묻고 들었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최대한 축약해본다. 스님께선 언제나 조용한 목소리, 꼿꼿한 자세를 하신 채 단 한 번, 단 한 순간도 그럭저럭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으며, 때로는 하루 종일 때로는 하루에 몇 시간씩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성심성의껏 들려주셨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스님께서는 열네 살 출가하게 된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셨다.
“내가 어렸을 때 말끝이 분명하지 않고 흐렸어요. 그런 아이들은 명이 짧다는 동네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랐는데, 아버지께서 한 주역가에게 속가에 두면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백양사 청류암에 계시던 호남제일의 도인 묵담스님에게 데리고 갔지요.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아침 울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께서 ‘내일 다시 어머니와 오마’ 하셨어요. 얼마나 내가 어리석었는지 오늘 가는 분이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믿었어요. 묵담스님께서는 굉장히 엄하셨어요. 찬 물도 씻어자시고 싶다고 할 만큼 깔끔하셨고 조금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해도 회초리를 드셨어요. 새벽 2시 반에 일어나서 묵담스님의 세숫물부터 준비해놓고 예불을 드렸는데, 스님께서 문을 열고 신발을 신는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긴장된 나날을 보냈어요. 모두들 석 달 이상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다들 그렇게 나가는데 스님께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하셨나요?”
“얼마나 숙맥이고 계산을 못했는지 집으로 가는 길조차 몰랐어요. 종일 합장하고 서 있으라고 하면 서 있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던, 재주라고는 조금도 피울 줄 모르고 순진했어요, 그런데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행자도반들과 있는 자리에서 편지 한통 없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부모형제가 그리워서 ‘나도 집에 가고 싶다’늘 말을 처음 입에 담아봤는데 묵담스님께서 어찌 아시고 나를 부르셨어요. 청류암에 온 햇수를 물으시더니 3년 전 여기 올 때 입고 온 옷을 가져오라고 하시고는 입어보라고 하셨어요. 그새 키가 자라 훤히 드러난 팔뚝을 만지시더니, 집에 가려거든 여기 와서 밥 먹고 큰 이 살을 베어놓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구했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파안대소하시던 큰스님 모습이 떠오른다. 3년 동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황대에 올라가 그토록 보고 싶던 부모님을 기다리던 이야기, 묵담스님께 엄하게 교육을 받은 이야기들을 조용한 미소와 함께 들려주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출가를 영광 불갑사에서 하셨지요?”
“3년 만에 청류암에 오신 아버지를 따라 잠깐 동안의 휴가 명목으로 집에 갔다가 동네사람들과 집에서 멀지 않은 불갑사에 놀러갔어요. 그런데 내 염불소리와 부지런한 행동을 눈여겨본 대중스님들이 출가해서 같이 살자는 말에 솔깃해서 눌러앉았어요.”
“백양사 강원에서 공부하시는 동안 당시 대선지식이었던 만암스님께서 스님을 많이 아끼셨다고 들었습니다.”
“70여 년을 절에 살면서 일곱 분의 종정을 모실만큼 많은 선지식들을 접했는데, 그 가운데 만암스님께서 가장 덕이 원만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람을 귀하게 다룰 줄 아시던 분이었어요. 당시 스님께서 60대 중반이셨는데 매일 새벽 세시에 대중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셨고 입선은 물론 공양도 함께 했어요. 공양을 드시는 모습이 어찌나 덕스럽게 보였던지 밖에서 그 모습을 배우겠다고 구경을 다 왔어요. 스님께선 내가 염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틀린 곳을 지적해서 바르게 익히도록 하셨어요. 차담하는 자리에서는 나를 가리키시며 ‘아주 선지식이야’ 하시며 칭찬을 하셨죠. 천성적으로 남을 속이는 것을 모르고 조용히 내 일에만 충실한 탓이었는지 선배도반들에게도 신임을 받았죠.”
“백양사를 나와 해인사로 가셨는데 만암스님을 떠나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그때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거든요, 스님께서 나를 놓아주려고 하시지 않았지만 총림에서 공부하고 하는 내 간절한 심중을 끝내 받아들이셨는데, 그만 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죠.”
스님께 한평생 언제가 가장 행복한 시기였는가를 여쭤본 적이 있다. 스님께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백양사에서 나와 해인사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봉암사에서 성철스님을 비롯 청담, 자운스님 등 여러 선지식들을 모시고 공부했던 시절을 꼽으셨다.
“내 수행자로서의 삶은 봉암사에서 성철노장님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봉암사는 수행에 마음의 변화가 시작된 곳이고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곳이기도 하지요. 화두와 일념이 되지 않으면 견딜 재간이 없을 만큼 일도 고되었지만 총림처럼 자급자족하면서 생활하는 분위기가 하나만 알고 다른 것에 기웃대지 않는 내 성격과 잘 맞았지요. 봉암사 이후 다시는 그런 회상에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때 더 밀어붙여 공부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아있어요.”
“성철큰스님을 처음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태산을 만난 듯 했어요. 그 때 내 나이 스물넷이었고 노장께서는 서른일곱이셨는데, 천재적인 두뇌와 민첩함이 느껴졌어요. 확실히 도를 깨친 분이라는 믿음이 갔고 그 후 내 생을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해버렸죠. 그 날 이후 입적하시는 날까지 한 번도 마음이 떠난 적이 없어요.”
평생을 스승으로 섬긴 성철스님에 대한 존경심,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한 여러 일화들, 한국전쟁 직후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을 모시고 산 이야기는 그 시기만 따로 떼어내 단편을 써도 좋을 만큼 승가만의 고전적인 일화가 많다.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하라’는 성철큰스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가장 깊이 실천한 분이 스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성철스님을 가리켜 “평생 동안 모든 일에 그렇듯 철저한 어른은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일생을 자신이 정해 놓은 원칙에 철두철미하셨던 스님의 삶 또한 스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스님께선 서른두 살 때 대승사 묘적암에서 공부하신 것을 두고 ‘내 생에서 가장 여한 없이 목숨을 내놓고 공부한 시기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들어갈 때 쌀 두어 말이 있길래 저 쌀이 떨어지도록 어떤 변화가 오지 않으면 내 발로 걸어 나가지 않으리란 각오를 했죠. 한 겨울에 찬 밥 한 덩이에 김치 한 조각 얹어서 먹고 물도 데워먹는 것이 번거로워서 샘물 한 바가지 떠먹는 것으로 대신할 만큼 사무치게 정진했어요. 베개도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은 채 두세 시간 눈을 부치고 참선하고 나무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죠. 공부에 진척이 느껴지지 않아 울기도 여러 번 울었어요. 몇 달 후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마치 몇 백 길이나 되는 함정에 빠져있던 사자가 언덕을 기어 나온 것처럼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어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고 천하가 내 손안에 들어온 듯 했어요. 묘적암을 거치고 나서는 그만 정신이 번쩍 나고 눈동자가 매처럼 또록또록해지면서 공부가 잘 되었죠. 묘적암 이후에 웃기도 하고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그전에는 내가 웃는 것을 본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요. 음력 시월이면 솔밭 사이로 부는 바람이 아주 차갑게 느껴지는데, 내가 꼭 그렇게 살았어요.”
나는 스님의 말씀을 정리할 때 ‘공부가 안돼서 여러 번 통곡했다“는 표현을 두고 아주 오래 고민했었다. 삼십대 초반의 수행자가 공부가 안돼서 우는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스님께서는 묘적암에서 한 철을 나신 후 파계사 성전암에 계신 성철스님을 뵙고 다시 공부를 하셨지요?“
“노장께서는 내 경계를 들으시고는 공부를 더하라고 하셨어요, 바로 파계사 금당선원으로 내려가서 정진에 몰입했죠. 시간시간마다 경계가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성전암으로 올라가 노장님께 공부를 점검받았어요. 발이 땅에 닿는 줄도 모르고 성전암에 올라가면 노장님은 철망 안에서 나는 철망 밖에서 화두를 묻고 답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어요. 그 때 참된 변화가 왔어요. 꽉 막혀 있던 자리가 터져버린 듯 노장이 무엇을 물어도 대답이 척척 나왔어요. 물구덩이 불구덩이에 떨어진다 해도 겁날 게 없었어요. 노장께서 ‘니는 이제 됐다’고 하시더군요.”
스님께서는 그야말로 눈을 뜨지 못한 나를 앉혀두고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셨다.
“눈을 뜨고 보니 밤과 낮이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었어요. 탐진치가 바로 나였어요. 그것은 자성을 깨쳐야 실감되는 일이죠. 대장부답게 한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데에 가서 몸을 감추되 나는 세상을 환히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수미산에서 살아볼 작정으로 수미산으로 올라갔더니 그렇게 큰 산이 콩처럼 내 엉덩이 속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산은 보이지 않고 내 몸만 덩그러니 드러나버렸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갔어요. 향수해 속으로 몸을 감추고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향수해의 그 넓은 바닷물이 내 발 밑에서 자작거리고 마는 거예요. 몸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나는 스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의, 내 실력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나는 그 말씀에 대해 한 마디도 더 여쭙지 못하고 ‘누구 없는가’ 130쪽에 그대로 기록했다.
‘누구 없는가’를 읽은 어느 한 사람에게서 스님의 일생 중에서 태백산에서 농사지으며 사셨던 10년 세월의 고독이 스님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님께선 태백산 시절을 이렇게 들려주셨다.
“태백산에 들어가 허름한 토굴을 지어놓고 남이 가져다주는 것은 티끌 하나 받지 않고 홀로 농사지으면서 살았어요. 장작을 짊어지고 다녀도 생기가 넘쳤고 누가 와서 칭찬을 해도 욕을 해도 전혀 동요가 없었어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눈앞에서 어떤 청천벽력이 일어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왔어요.”
“태백산을 나오셔서 수도암에서 15년 동안 사셨는데 불사를 하시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해인사에 잠시 있다가 조용히 공부하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폐사가 되다시피 허물어진 법당을 보수하면서 선원을 겸해 쓰던 요사채를 헐고 선원도 새로 지어서 공부하는 수좌들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길도 나지 않은 깊은 산속에 불사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반대했죠. 그러나 한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성격에다가 젊었기 때문에 선방이 다 지어질 때까지 인부노릇을 할 수 있었어요. 그때 얼마나 무거운 짐들을 져날랐던지 어깨 근육이 돌처럼 굳어졌고 자갈풍까지 생겼어요. 여든이 넘은 지금도 양 어깨가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고 아픕니다.”
나는 스님을 뵙고 나서 수도암에 갈 때마다 승복을 입은 채 서까래를 져나르던 스님의 모습, 전화가 없던 시절 전화 한 통 쓰려고 증산면 우체국까지 왕복 수십 리의 거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셨던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 땅의 불교가 어떻게 면면이 이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곤 한다. 진정한 종교혁명은 제도나 형식에 잇는 것이 아니라 선지식 한 사람이 자신과 같은 참으로 눈 밝은 사람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선원을 지어서 함께 공부하고 싶어 하셨던 스님의 염원은 입적하시기 전까지 변함없던 것으로 알고 있다.
수도암에서 출가한 상좌 한 사람에게 간곡하게 들려주셨다는 이야기는 스님께서 얼마나 눈밝은 수좌 하나를 키우고 싶어하셨는지 짐작하게 한다.
“너는 참선을 하되 30년을 한눈팔지 마라. 만일 하다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생각을 하면 병에 금이 간 것이다. 25년을 잘 하다가도 한 생각 비틀리면 병에 금이 간 것처럼 깨져버리고 마는 것이 이 공부다. 한눈팔지 말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30년을 하면 갈 데가 없다.”
스님을 뵙고 나서 내 삶의 지침으로 여기면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말씀이 있다.
“수행자가 사는 방법은 간단해요. 남이 방일할 때 방일하지 않고 남이 잠잘 때 잠자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할 때 쓸데없는 소리하지 않고 남들이 건들거릴 때 건들거리지 않고 누가 보아도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노력하고 살면 됩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휘황찬란한 세상에 산속에 들어앉아 세끼 밥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어디 그게 사람이겠는가 할지는 모르나 그렇게 등신소리 바보소리 들어야 공부할 수 있어요.”
이 금과옥조와도 같은 말씀이 어디 수행자분들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여담으로 스님께 여쭌 적이 있다.
“스님 영화보신 적 있으세요?”
“세 번 보았어요, 성철 노장과 함께 무슨 동물영화인가를 본 기억이 나네요.”
“비행기는 타 보셨어요?”
“제주도에 불사 회향식이 있어서 가느라고 세 번 타 보았어요. 외국엔 안 가보았어요.”
“도인이 많이 난 중국에 한번 안가보고 싶으셔요?”
“중국에 도인이 한 사람 나왔다면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은 있으나, 아직 그런 소식이 안들리는 걸 보면 도인이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눈을 뜨면 다닐 일이 없어요.”
몇 년 전, 손상좌를 잃고 나신 직후에 스님을 뵌 적이 있다. 나는 손상좌스님에게 스님과의 여러 일화를 들었던 터라 갑작스런 부음에 충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섭섭하시지요?” 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계시기만 했다. 과묵한 말씀 너머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분이셨다.
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나서 불교방송에서 추모특집을 방송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곁에서 뵌 큰스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분이시란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자유는 철저한 자기절제와 지행합일이 실천된 삶에서 나온다는 것을 스님을 뵙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스님을 뵙고 부처님 일대기를 써보리란 서원을 지니게 되었다. 과거 미래 현재가 한 순간임을 감안해볼 때, 스님을 뵈면서 부처님의 제자분들이 어떠한 분들이었겠으며, 스님께서 존경해마지 않았던 조사스님들이 어떻게 공부하며 일생을 보냈으리란 짐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처님 일대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세상에 나와 만난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던 한 분과 다시 만날 것이다.
2006년 11월 금강정진회 때 법전 큰스님 법문을 듣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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