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하착(放下着) 염불수행(念佛修行)/법상스님

2015. 3. 13. 12:4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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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수행의 근본은 '놓음'에 있습니다.
일체를 놓았을 때 진정 법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모습은 '잡음' 만을 추구합니다.
보다 많은 것을 부여 잡으려 애쓰는 모습들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잡음'의 바탕에는
'나다' 하는 아상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정신적인 잡음과
'내 것이다'고 하는 물질적인 잡음...
그리고 이 몸 편하게 하고자 하는 몸뚱이 착이 그것들입니다.

이러한 아상 때문에 우리들 '잡음'의 철학은 더욱 힘을 발합니다.
모든 일상에 '나'가 빠지고 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훨씬 더 맑아 질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무아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아를 채득 했을 때,
진정 '나' 라는 굴레를 벗어 버렸을 때
우린 보다 자유로운,
그리고 고요하고 적적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이렇듯 '놓음'에 있습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수행자가 가져야 할 본분사인 것입니다.

방! 하! 착!
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 속에 일체의 모든 수행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놓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을 여실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붙잡고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그 '잡음'으로 인해 괴롭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잡고 있으며 잡음으로인해 괴롭다는 현실을
명확히 관찰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린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늘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잡음'의 억압이 우리를 목죄며
빠른 속도로 우리를 잠식할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순간 순간 올라오는 일체의 모든 내면의 마음들,
외부의 경계들...
이 모든 것을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됩니다.
올곧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진정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관찰하고... 방하착 하고...
이론은 쉽지만 역시나 현실은 어렵습니다.
놓고 싶지만 놓은 듯 느껴지지만 여전히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진리에 대한 믿음...
부처님에 대한 믿음...
내 안의 참생명에 대한 강한 믿음...
방하착 수행에 대한 믿음...
이 모든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수행은 허공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어설픈 믿음으로 백년을 수행하고... 염불하고... 참선하는 것 보다
금강과도 같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루 수행함이 더욱 값진 수행입니다.

이렇게 굳은 믿음으로
마음을 관찰하고... 일체의 집착을 놓아 버리고...
그러나 아직 수행중인 우리들에게 이는 그저 간단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하면 되지 하지만 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놓아라' '놓아라' 하는데에 집착이 되어 버립니다.
'놓아라'하는 그 놓음을 다시 붙잡아 버립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쉬우며 직바로 갈 수 있는
'방하착'의 수행이 바로 '마음공양'입니다.

이 마음 '놓는다' '놓는다' 하기 보다
그 마음 부처님께 그저 모두 공양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을 향한 공경심을 연습하는 것이며
'내가 수행한다'는 상을 깨고 일체의 모든 공덕 또한
부처님께 회향하는 일입니다.

수행도 내가 한다고 하면 병통이 되기 쉽습니다.
그저 부처님께 공양 올릴 뿐입니다.
온갖 마음의 분별심, 이기심, 탁한 마음에서 맑고 밝은 마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마음을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나면
욱 하고 올라온 그 마음은 이미 중생으로서의 내 마음이 아닌
부처님의 참생명, 한마음으로 고스란히 변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혼탁하던 분별심도
부처님에게로 가면 밝은 한마음이 되어버립니다.
우리에게는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선악 이라고 하는
분별심이 있기에 혼탁함이 생겨나지만
부처님 한마음에는 이렇다할 분별심이 있지 않기에
그 어떤 마음도 모두 녹아 부처님 마음, 불심이 되어집니다.
마치 용광로가 온갖 잡스런 녹슨 쇳덩이 조차 다 녹여 버리듯...

이렇듯 언제나 일체의 모든 마음 부처님께 공양올리며 살아가는 이는
참으로 당당한 힘이 나옵니다.
나의 모든 생각, 행동, 말 한마디 조차 공양올리며 행하기에
이는 내 생각, 내 행동, 내 말이 아닌 모두가 부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을 비우세요...
모든 것은 '부처님'께로 되돌려 놓으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가야할 길만을 무섭게 찾아 나아가시면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일은 자연스러워 질 것입니다.

마음 공양을 올리라고 하니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염! 불! 수! 행!
그 하나면 족합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일체의 모든 마음들...
외부의 모든 경계들...
그 안팎의 모든 경계에 대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끊임없는 염불은
우리의 내면을 맑게 정화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처님께로 밝게 공양 드릴 수 있도록 안내 할 것입니다.
염불수행이 곧 마음공양입니다.
염불수행이 곧 방하착입니다.
염불수행이 곧 관(알아차림)의 수행입니다.
이 모두는 결코 둘이 아닌 하나로 돌아갑니다.
수행은 오직 하나입니다.

밝은 놓음...
밝은 관찰...
밝은 믿음...
밝은 마음공양...
밝은 염불수행...
밝게 밝게 이루소서...

 

 

 

내가 수행을 하는 이유

 

 

내가 감각적 욕망에 눈이 멀었을 때는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았다.

 

내가 어리석어서 눈이 멀었을 때는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보고 흰 것을 검은 것으로 보아

진흙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벌을 받았다.

 

내가 감각적 욕망의 실체를 알아 밝은 눈을 가졌을 때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어떤 번뇌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를 누렸다.

 

내가 어리석음의 실체를 알아 밝은 눈을 가졌을 때는

바른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지 않게 보아

어떤 번뇌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감각적 욕망과

어리석음을 가지고 고통을 겪고 있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