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영원한 생명의 빛 / 청화스님

2015. 3. 20. 15: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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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영원한 생명의 빛 / 청화스님 




저는 토인비의 말을 기억합니다.
토인비가 원자력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류가 대량적으로 집단자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들이 누구나가 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그 분들이 도달한 인생관까지 우리 수준을 높여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원자력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집단자살을 면치 못한다,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선량한 분이라 하더라도
역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자기의 큰일을 도모하겠지요.
또는 어려운 고비에 있어서는
자기만을 생각 아니 할 수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성자가 아닌 우리 중생이
이 몸뚱이보고 나라고 생각하고
이 몸뚱이가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이런 한에서는
위선적인 행동을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석가의 정도, 예수의 정도
또는 세인트프란시스나 또는 아우구스티누스나
그런 정도가 돼야 비로소 위선을 떠난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엄격하게 자기를 반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원죄(原罪)를 짊어지고 있다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근본무명(根本無明) 근본무지(根本無智)를
못 떠나고 있습니다.

근본무명 무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실존도 미처 못 보고
우주의 실상도 못 보고 있단 말입니다.
가상만 보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실상을 볼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자가 될 것인가.

따라서 성자가 되지 않은 한에는
내 생명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살기 위해서는
참다운 어버이가 되고
참다운 스승이 되고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가 다 성자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만이, 불교인만이
수도(修道)하고 마음을 닦고
행위를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다가 다 그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사니까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기 스스로 자기의 본래면목자리,
우주의 본질인 영원한 그 자리를 알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祈禱)를 모시고 바이블을 외고
불경(佛經)을 외고 염불(念佛)을 하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아멘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 자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불교인의 참선도 역시 왜 하는 것인가.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자리, 본래 고향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불심(佛心)이고 부처님인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그 자리에다 머물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참선한단 말입니다.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모두가 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 자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불멸한 생명자체의 대명사를 외면서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기위해서
순간찰나도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와 적과 싸운다고 생각할 때는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 하면
다시 원수 적군이 자기 세력을 만회해가지고 공격을 하겠지요.
따라서 적을 공격할 때는
적이 숨 내킬 겨를도 안 주고서 공격을 집중해야
적을 정복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종교인들은
우리 번뇌, 마음의 번뇌를 가장 큰 원수로 봅니다.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또는 자기 소유만 생각하고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이라,
사실은 자기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거든
따지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집이요, 내 것이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과거 전생을 돌이켜 본다고 생각 할 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생만 몇 십 년 동안 국한된 금생만 이 몸이 있는 것이지
과거 전생에도 없었고
또는 죽은 뒤에 어디 가서 이 몸이 있을 것입니까.
흔적도 없단 말입니다.
내생 가서는 우리가 지은대로 우리 번뇌 따라
다시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우리 몸을 제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곱게 꾸민다 하더라도
죽을 때는 이 몸뚱이는 간다는 말도 없습니다.
가장 잔인한 배신자(背信者)가 우리 몸이란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영생불멸한 부처님자리, 하나님 자리, 우주의 진리 자리,
진리나 부처님이나 하느님이나 또는 광명(光明)이나 
똑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참선을 하고 기도를 많이 모신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정화(淨化)가 된 만치
광명을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보고 광촉(光觸)이라,
빛 광(光)자 접촉할 촉(觸)자 광촉이란 말입니다.
기도나 참선이나 염불이나 또는 바이블이나
성자의 가르침을 받들고서
우리 마음을 거기에 의지해서
오로지 닦아나간다고 생각할 때
틀림없이 자기라는 관념을 차근차근 떠나고 맙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모든 걸 다 바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강할수록
우리한테 광명이 더욱 더 강렬한 치열한 빛으로 비쳐옵니다.
기독교 가르침이나 불교 가르침이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영생불멸한 그 자리, 생명자체의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항시 머물게 하고
그와 동시에 모든 이웃들,
사람뿐만이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또는 식물이나 자연의 물이나 흙이나 모두를 다
자기 몸 같이 사랑한단 말입니다.

본래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동일철학(同一哲學)이라,
동일률(同一律)이란 말입니다.
스피노자 철학이나 또는 하이데거 철학이나
또는 게오르게 철학이나 모든 위대한 철인들은
동일률이라,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그렇게 돼야 사람끼리도 참답게 화합할 수가 있고
자연도 훼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뉴턴 식으로 또는 데카르트 식으로
자연은 자연이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이용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우리 인간만의 행복을 위해서
수탈과 약탈과 파괴를 함부로 한단 말입니다.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끈으로 해서 이어져 있습니다.

또는 잘 모르는 분들은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과 나와는 둘이 아닌가,
따로따로 별도가 아닌가,
부처와 나는 다르지 않는가,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나 그리스 철인들이나
또는 현대 철인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둘로 안 봅니다.

하나님과 나도 둘도 아니고
부처와 나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원죄에 가리어서
원죄를 극복하지 못하고서
우리 무지를 조복을 받지 못하고서
우리가 범부 중생으로 있기 때문에 둘인 것이지
우리 마음이 본질을 떠나서,
우리 마음이 이른바 명경지수(明鏡止水)라,
조금도 때가 없는 거울같이 고요한 물 같이
마음에 탐욕심에 파동이 안치고
또는 분노하는 마음에 파동이 안치고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영원자와 나와 하나가 돼버린다 말입니다.  

달라이라마가 있는 티베트라든가 인도의 요가라든가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추이입니다.
같은 길입니다.
라마 크리슈티나도 한 말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둘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의 주의란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목표는 다 같단 말입니다.
현대는 그런 때입니다.
현대는 각 제도적인 종파 간에,
종교 간에 벽을 무너뜨리는 때입니다.
무너뜨리지 못하면 결국은 자기도 죄를 범하고
사회에도 참다운 도움을 못 주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얼마나 추태를 많이 보입니까?

현대문명은, 현대물리학은
옛날 성자들이 밝힌 것을 말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차근차근 지금 껍데기를 벗기고 있습니다.
일체존재가 허망무상한 것을 현대물리학은 증명 합니다.
본래로 공간성이 없고 시간성이 없고
본래로 물질은 없는 것이다,
다만 에너지만 존재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란 말입니다.
에너지가 그때그때 인과의 법칙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물질적으로 물질화 된 것이지
본래적인, 변치 않는 일정불변(一定不變)한 물질은 본래 없다.
그건 여러분들께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다만 현대물리학이 모르는 것은
순수 에너지 자체(自體)가 무엇인가?
그건 모른단 말입니다.
그것은 성자밖에는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때 묻은 중생의 눈,
원죄에 가리고 무지에 가린 중생의 눈으로는
공간성이 없는 세계를 볼 수가 없습니다.
체험을 못하는 것입니다.
공간성이 없는 생명자체는
청정한 성자의 안목에서만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내가 내 생명의 본질을 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꼭 그 자리를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어버이가 되기 위해서도 내가 무엇인가
또는 그대가 무엇인가 알아야 됩니다.
모르고서는 참다운 어버이가 못되지 않습니까.
남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자기 전공이 어떤 분야이든 간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야 참다운 스승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누구도 의무적으로
영생불멸한 성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생불멸한 그 자리는 완벽한 행복자리입니다.
어떤 것도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불행을 느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불행을 느낀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몸뚱이 그것은 죽이나 죽임을 받으나 또는 어디가 아프나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비록 몸뚱이는
그대로 두고 간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명은 영생의 나라에 다시 돌아간다 말입니다.

요새 시한부 종말론으로 해서
모두 이상한 말을 많이 했지요.
예수님의 재림(再臨)은 몇 년 뒤에
어느 날 갑자기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청정(淸淨)해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이지
어두운 중생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천만번 나오고
석가(釋迦)가 천만번 나온다 하더라도 알 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이블이나 불경이나
고도한 성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도리는
상징과 비유로 돼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제대로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닦여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光明)을 스스로 체험을 해놔야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런 말은 이런 도리구나, 알맹이는 이런 것이구나,
짐작을 한다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기도를 한 시간 모시면 모신만치
우리 마음은 영생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더욱 더 광명으로 빛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은 다르지 않나 하지만
우리 마음이 가장 안온하고 행복스럽고 건강할 때
우리 몸도 가장 건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영생의 자리를 우리 마음에 둔다고 생각할 때
우리 몸도 제일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순수하게 우리마음을 영생의 자리에 두고서
영생의 광명을 훤히 생각만 한다 하더라도
우리한테 있는 나쁜 병소(病所),
가사 에이즈라든가 암이라든가 그런 것은
우리가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영생불멸의 자리는
무한의 가능의 자리입니다.
에이즈 병 하나 고치고 암균 하나 죽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사무치게 그렇게 못 된다 말입니다.
자꾸만 모양에 걸립니다.
허망한 자기 몸뚱이의 노예가 됩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길은
역시 영생불멸한 그 자리로
우리 마음이 한 걸음씩 가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길도
같이 더불어서 영생의 길로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친?맨錤柳?누구한테나 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돼야만 아까 말씀드린 인종적인 문제, 자연공해문제,
또는 단체의 여러 가지 반목 문제, 국제간의 문제,
이런 문제가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마치 뜨거운 화로에 한 점 눈이 들어가면 금시 녹아버리듯이
어떠한 번뇌나 우리마음을 영생에다 두고서
영생을 흠모하고 영생의 고향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려운 문제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광촉(光觸),
빛날 광(光)자 접촉할 촉(觸)자, 광촉을 잘 기억해두십시오.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꼭 광명을 체험을 합니다.
그 광명은 훤히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정화된 거기에 정비례해서
더욱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나 석가나 그분들은
천지우주가 광명세계(光明世界), 광명뿐이다.
그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광명세계란 말입니다.

광명세계를 우리가 체험할 때는
영원의 멜로디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들려온다 말입니다.
우리는 그냥 좋은 오르간 좋은 음악
이런 것만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보다도 훨썩 훌륭한 멜로디가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거칠어서 못 듣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불경에 보면 화명애아(和鳴哀雅)라,
평화로울 화(和) 울릴 명(鳴) 슬플 애(哀) 맑을 아(雅),
평화스럽고 애절하고 영원스러운 맑은 멜로디가
우리한테 항시 들려온다 말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설사 애매하게 누가 자기 목에다 칼을 꽂는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다 말입니다.
누가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그대가 나를 왜 죽여!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입니다.
이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셔서 이 자리에 축복된 여러분들
대단히 참 유타까지 오셔서 복스러운 분들이십니다.
우리 신부님도 아까 만나 뵀습니다만
얼굴이 굉장히 미남이시기도 하고 참 덕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도 만나 뵙고서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더욱 분발하셔서
절대로 종교의 벽을 너무 두지 마십시오.
인연 따라서 자기가 절에 가든 또는 교회 가든 말입니다.
또는 몰몬교를 믿든 그런 것은 좋습니다.
그건 인연이니까 좋으나
그렇더라도 다른 종교와 본래가 하나다,
성자의 길은 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오는 참다운 시대,
이른바 냉전시대가 끝나는 참다운 세계에 있어서
참다운 정말 하나의 종교가 됩니다.

꼭 하나의 종교를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고 분투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종교를 위해서 분투하시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자리,
그 광명자리, 행복과 영생과 모든 능력을 다 갖춘
그 자리<상락아정(常樂我淨)의 자리>를 항시 생각하시면서
그 자리를 가까이 하셔서
꼭 광촉, 광명을 접촉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너와의 사랑이 머물던 카페 
                          詩 / 美風 김영국
그리움이 찾아오면
너와 나의
달콤한 사랑 향기 풍기던
그 카페가 생각나
따스한 커피를 마시며
우리 사랑 키워가던
그곳 말이야
내가 웃으매 소리로 
이별을 얘기했잖아
그 말이 현실이 된 지금
가슴이 먹먹하고
바보처럼 왜
그런 농담을 했을까 하는 
자책감에
자꾸만 눈물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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