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연기 / 청화스님

2015. 3. 28. 20:4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진여연기(眞如緣起)



당체즉공(當體卽空)

따라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만법이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는 무상이고,
같을 수 없이 변화무상한 것이고,
전변무상이라,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공간도
사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부처님 말씀에 제법이 공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해서 끝에 가면 공이라,
이렇게 보통은 생각하지요. 
그러나 부처님 대승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색즉공이라 했듯이, 색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제 몸도 역시 바로 공입니다.
여기 있는 테이블도 역시 바로 공입니다. 
색즉공이요, 소리도 역시 공입니다.
성즉공(聲卽空)이라, 다 공입니다.
 
같은 공도 분석할석(析)자, 빌공(空)자, 석공(析空)이라.
우리가 보통은 현대물리학자들 같이
분석한 다음에 공이 아닌가? 이렇게 느끼시기가 쉽습니다마는
부처님의 대승법은 그렇지 않고 바로 즉공(卽空)이라,
또는 몸체(體)자, 체즉공(體卽空)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입니다.
 
왜 공인 것인가?
이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시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바로 공입니다.
그러니까 무아입니다.
내가 없단 말입니다.
무상이고 공인 것을
‘나’라고 고집할 건더기가 어디 있습니까.
진여불성 자리, 부처님의 연기법에서 보면
다이아몬드도, 금도, 감투도, 대통령도, 모두가 다 공입니다. 
이 도리가 바로 반야바라밀 즉 반야의 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 없이 우리 중생병 못 고칩니다. 
반야의 지혜 없이 우리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공 도리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22년동안 반야설이라,
부처님의 요설변재(饒舌辯才),
그 대웅변 가지고도 22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공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부처님의 친종제인 제바달다는 도를 깨닫지 못하고서
엉뚱한 일을 많이 했지 않습니까.
반야바라밀이 존재해야 참다운 부처님의 지혜(智慧)입니다. 
반야를 떠나서는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문학적인 작품을 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세속적인, 그저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글이나 쓰는 것이지
그렇게 시원스러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걸작을 낸 사람들은
견성오도까지는 미쳐 못 갔다 하더라도
그 무상한 도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허무하지 않는가,
이런 도리를 조금쯤은 알아야
참다운 글도 쓰고 참다운 음악도 하고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도리를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됩니다. 
제법의 공도리를 알아야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다,
그런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서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진여불성 이것은 모든 존재의 근본 실상입니다.
진여불성 거기서 부터서 모두가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왜 나왔는가?
이것은 우주의 법칙 따라서 자연 본연적으로 나온 것이지만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면 무명심(無明心)이라,
우리 무명심 때문에 시초에 존재가 다 나왔습니다.

 
무명심과 십법계

무명심은 뭣인가? 
천지 우주가 오직 진여불성 뿐인데
우리가 우주의 순환 과정에서 마음이 가려져서
그것을 미처 모른단 말입니다.
학식이 많고 적고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설사 박사 학위 석사 학위가 몇 십 개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참다운 지혜가 못됩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세간적인 학문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불교에서 볼 때에는 아직은 무명심을 못 떠나 있습니다. 
 
무명심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것은 방금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의 실상 자리,
이 자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무명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명심을 여의어 버리지 못하면
무명심을 깨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생명의 고향인 진여불성 자리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무명심을 떠나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영원히 끝도 갓도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십법계라.
극락세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또 지옥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무엇인가? 
우리 무명심이 가장 어두운 세계입니다.

앞서 범어사 주지 큰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와 같이 청명한 날은 우리 기분도 좋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밝은 것을 다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 것인가? 
우리 생명 자체가 본래로 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만큼 마음이 어둡지 않습니까.
본래 진여불성에는 미움도 좋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것은 불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그만큼 우리 마음이 금방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물질에 너무 집착하여서
이렇게 욕심을 낼 때에
청정 미묘한 마음이 금시에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무명심에서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하면
본래 청정 미묘한 마음이 더욱 어두워집니다.
가장 어두운 중생심의 세계 이것이 지옥입니다. 
 
조금 밝아지면 아귀 세계라.
더 밝아지면 개나 소나 돼지 같은 축생 세계라.
조금 더 밝아서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 세계라.
훨씬 더 밝아지면 우리 인간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래도 그런 대로 무던히 밝아 온 샘입니다. 
더 밝아서 천상이요.
더 밝아서 진여불성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는 세계가 성문승이요.
더 깨달아서 우주의 연기법을 깨달아서 연각승이요.
모든 중생과 더불어서 성불로 가는 참다운 중생이 보살이고
온전히 깨달아야 비로소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지금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그런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전생에 다섯 가지 계율 정도는 닦았단 말입니다. 
살생도 별로 하지 않고
훔치지도 별로 않고
음탕한 행동도 별로 않고
이렇게 해서 다행히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진여불성 극락세계라 하는 우리 고향으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고 다시 인간 정도로 헤맬 것인가?

여느 사람들은 잘 모르고서
인본주의라, 인간이 제일 높다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기는 합니다만
인간이 제일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보다도 더 높은 천상도 있습니다.
욕계도 천상이 있고, 색계 무색계에는 천상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보다 훨씬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 고향 자리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것은 우리 결단에 달린 것이고,
또 우리가 인생고를 떠나서
마음의 고향 자리로 가기 위한 가르침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 이외는 없습니다. 
기왕이면 빨리 가고 싶은데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믿어야 빨리 갈 것인가?
 
불자님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암시(自己暗示)라는 법문을 알으시지 않습니까.
법문이라기 보다는 일반 심리학적인 용어입니다만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별 볼일 없지 않는가.’,
‘내가 아무리 바로 살려고 해도
진심(嗔心)이나 욕심(慾心)을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다’ 
이렇게 자기 비하를 하고
이렇게만 생각할 때 자기 발전이 오겠습니까.
 
본래 석가모니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우리보다도 훨썩 위대하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고,
나는 과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고
금생에 타고난 죄도 역시 많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절?酉?말으십시요.
견성오도나 성불은 나하고는 무관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요.

석가모니 마음과 예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똑 같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도 역시 똑 같습니다. 
진여 불성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더하고 덜하고, 또는 청정하고 더럽고
이런 차이가 없습니다.
도둑놈 마음이나 도둑놈 몸이나 우리 몸이나 똑 같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그 텅 빈 상만 차이가 있습니다. 
상의 결합적인 차이만 있습니다. 
 
같은 탄소도 결합 여하에 따라서
더러는 검은 숯 부스러기가 되고,
또는 결정체로 되면 그때는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결합 여하에 따라서 숯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그와 똑같이 진여 불성이 결합 여하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성자가 또는 중성자가 됩니다. 

본래는 우주의 순수 생명인 그 진여불성,
현대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순수 에너지가
그때그때 결합 여하에 따라서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합니다.
또 그들의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합니다.
어떤 물질이나 그런 원소로 안 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한 말씀 더 명심해야 할 것을 말씀드린다면
현대 물리학과 불교는 굉장히 밀접 불가분리(不可分離) 합니다. 
현대 물리학이 사실은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가면 갈수록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현대 물리학은 모든 것은 본래로 비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에너지는 파멸이 안 되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에너지가 산이 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하여도
에너지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다.
그 허망 무상한 상만 모양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은 변질이 없다, 
이러한 것이 현대 물리학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바
예수의 몸이나 내 몸이나 석가모니 몸이나 똑같은 몸입니다.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으므로
석가모니 마음 내마음 차이가 없어야 하겠지요.
다만 우리 중생이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우리가 잘못 봐서 나는 나요,  너는 너요,
나는 못나고, 너는 잘나고, 이런 마음 때문에
스스로 우리가 범부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범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나 나나 누구나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러기 때문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불자님들은 말로는 심즉시불을 모르는 분이 별로 없으시겠지요. 
마음이 바로 부처다,
우리 마음이 닦으면 부처라, 
닦아서 석가모니처럼 되면은 부처라, 
이렇게 생각 하신 분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닦을 것도 없이 바로 이 마음,
남 미워하고 욕심내고, 이 마음 바로 부처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석가모니한테나 예수한테나
달마 스님한테나 누구한테나 꿀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진정으로 내 마음 이것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은 본래로 오염이 안 되어 있다, 100% 믿으면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마음을 열으셔야 합니다. 
위대하고 무한한 우리 마음이
그 별것도 아닌 자기 몸뚱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제아무리 값비싼 팔찌를 하고 귀걸이를 한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해서는 우리 가치가 높아지지 않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 목숨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릅니다. 
그렇게 허망 무상한 우리 인생인데
무슨 필요로 생명의 본 고향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셔야 합니까.
본래 부처인 우리가
잠시간 졸고 있는 그 동안을
오랫동안 연장을 시킬 것이 아니라
다시 깨어서 본래 부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마음 이대로 바로 부처인 것이고,
석가모니 마음, 공자 마음, 예수 마음, 하나님 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일미 평등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본래 내가 부처라.

 

 

 

 

 

메아리 / 마종기

 

 

작은 호수가 노래하는 거
너 들어봤니
피곤한 마음은 그냥 더 잠자게 하고
새벽 숲의 잡풀처럼 귀 기울이면
진한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물이 노래하는 거 들어봤니?
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첼로 소리인지 아코디언 소리인지
멀리서 오는 밝고 얇은 소리에
새벽 안개가 천천히 일어나
잠 깨라고 수면에서 흔들거린다
아, 안개가 일어나 춤을 춘다
사람 같은 형상으로 춤을 추면서
안개가 안개를 걷으며 웃는다
그래서 온 아침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우리를 껴안는
눈부신 물의 메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