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悟,깨달음) / 청화큰스님

2015. 4. 3. 19: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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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悟,깨달음)

청화큰스님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깨달음도 그냥 한 깨달음으로 일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천(深淺)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2지(二地)에 깨닫는 분, 3지에 깨닫는 분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물론 원리 문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약간의 그 뉘앙스(nuance)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오()문제, 깨닫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 解悟...四善根位에서 如實知解를 頓悟함(似悟)..............凡夫位

    |

悟 |        ┌見 道...見性..................................菩薩初歡喜地 ┐ 聖

   └ 證悟 | 修 道...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地를 次第修證함    │

             └無學道...妙學.................................................. ┘ 位


頓悟漸修 ┌ 解悟後 證悟를 爲한 漸修

             └ 證悟(見道) 後 成佛을 爲한 漸修


저는 근본불교(根本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다른 것으로 안 봅니다. 가사, 아함경(阿含經)도 그 당시 구사종(俱舍宗)이나 경량종(經量宗)이라 하는 종파로 굳어 버릴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아함경 자체에서는 설사 말씀을 다 안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대승적인 근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더러는 소승법(小乘法)의 범주에 속하는 구사론도 말씀하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오()는 심천으로 보아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로 말합니다. 해오(解悟)는 4선근위(四善根位)에서 깨닫는 깨달음인데 4선근은 주로 근본불교에 나와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도 언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일반 선종(禪宗) 계통에서는 별로 언급을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선()과 교()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과 마음이 둘일 수가 없듯이, 선과 교도 둘이 아니라고 보는 견지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그때그때 수기응량(隨器應量)이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지 않겠습니까.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여실지해(如實知解)를 돈오(頓悟)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해(知解)는 반야 지혜(智慧)가 아니고 그냥 범부지견(凡夫知見)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범부의 지견으로 해서 돈오함이라, 돈오라는 말을 여기에서도 씁니다. 돈오의 말도 깊고 옅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오(似悟)입니다. 즉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상사각(相似覺)이라, 각에 닮은 각인 것이지 본래 본각(本覺)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범부위(凡夫位)입니다. 성자지위가 못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겠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 원래 변치않는 본체의 자리, 인연 따라서 변하는 수연자리 또는 성상(性相)이라, 성품자리 현상자리 또는 체용(體用)이라, 본체자리 활용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상대(相對)나 절대(絶對)나 그런 것에 관해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리사무애(理事無碍)도 알고 사사무애(事事無碍)도 알고 법의 해석은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오도 역시, 그냥 경()만 봐서는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 선근에 달려 있겠습니다만 같은 경을 본다 하더라도 참선을 한 사람이면 해오를 빨리 얻습니다. 경을 많이 봤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선정(禪定)에 들어 있지 못한분들은 해오를 못합니다. 해오를 했을 때는 어느 경전을 보든지 문자만 좀 알면 “아 그렇구나” 하고 짐작이 되어 교상(敎相)면에서는 걸림이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단계가 이른바 해오입니다.

그리고 증오(證悟)는 체험적으로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해서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견도할 때, 선종(禪宗)식으로 말하면 갓 견성할 때에, 초견성이라고도 합니다. 초견성이란 말도 선가(禪家)에서도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가 견도의 자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견성과 견도가 절대로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견성은 조사 것이니까 더 높고 견도는 불경 말씀이니까 낮다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도했다고 구경지(究竟地)까지 다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수도(修道)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도는 바로 견성이고, 보살 십지(十地)로 말하면 보살 초환희지(初歡喜地)입니다. 보살 초환희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환희심도 여러 가지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오욕락(五欲樂)에 대해서 너무나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만, 출가사문은 이 환희심에 대해서 깊게 음미를 해야 합니다. 오욕락은 참다운 환희심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 중생을 바로 보면 일체개고(一切皆苦)라, 삼계개고(三界皆苦)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바로 고해 아닙니까, 바로 못 보는데서, 중생 경계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뚱이를 훑어보거나 환경을 보나 또는 사람을 사귀어 보나 그런 자리에서 정말로 환희로움, 불멸(不滅)한, 멸치 않는 기쁨을 못 느낍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배신도 있고, 그렇게 좋아해서 만난 분도 서로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몸 밖에나 안에나 좋은 것이 어디가 있습니까? 삼십육물(三十六物)이라, 침, 오줌, 똥, 눈꼽 등 더러운 것이 뭉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을 보더라도 욕계의 범주 내에서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초환희지도 다른 말로 하면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범부 이생(異生)을 떠나서, 결국은 욕계를 떠남으로 해서 참답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초환희지까지 갈 때에도, 초환희지가 미처 못되어도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을 알아들음으로 해서 기쁨을 느끼고 또는 참선을 함으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경안(輕安)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닦으면 응당 필연적으로 경안이라, 꼭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계행도 바르고 자기 몸도 깨끗하고 여법(如法)한 법을 가지고 공부할 때는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열락(禪悅樂)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더 증장되어서 정작, 욕계 번뇌를 떠나고 자기의 본 성품을 깨달아 오직 일미평등한 진여의 자리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환희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도인들이나 환희지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사무쳐 가누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詞迦葉 Mahakasyapa)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초지에서 2지에 올라가고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 9지, 10지를 거쳐서 결국은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우리 세존같이 환희지를 성취하시자 마자 그냥 불지로 마구 구경성취를 하신 분도 계신 것이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분도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비약적으로 뛰어넘는 것은 돈초(頓超)라고 하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것은 간초(間超)라고 합니다. 보통 근기는 2지 3지 그와 같이 순서 있게 올라 가겠지요. 그러나 게으름 부리면은 초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더 못 가고 말아 버립니다.

이런 데서, 자비심이 많은 도인과 지혜가 더 수승한 도인의 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지증(智增)보살이라, 지혜가 더 수승한 보살들은 “본래 중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공부, 선정을 닦는 데만 주력을 다하고 또 자비심이 많은 분들은 선인후기(先人後己)라, 남을 먼저 앞세우고 자기가 뒤에 갑니다. “본래가 둘이 아닌 것인데 중생들이 법을 몰라서 고생하는 것이니까 꼭 중생들을 안락세계(安樂世界)로, 안양세계(安養世界)로 인도 해야겠구나” 하고 초환희지만 성취해도 더 안 가버립니다. 이분들은 비증(悲增)보살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마땅히 금생에 꼭 환희지를 성취하여야겠지요. 그리고는 자기 자비심을 점검하여서 환희지에 머물러도 도인이고 2, 3지에 올라가도 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견성하고 구경성취한 묘각(妙覺) 자리는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 무학도(無學道)라 합니다. 이렇게, 같은 깨달음도 해오와 증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제가 그 암증선(暗證禪), 암중모색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견성오도(見性悟道)라든가 견성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선정에 들어서 초환희지까지, 견성까지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굉장히 기쁜 것을 많이 느낍니다. 자기 몸도 그냥 텅 비어 버려서 자기 몸이 어디에 있는가 느낄 수도 없고, 몸이 공중에 들떠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안 느끼고, 더러는 훤히 밝은 광명이 빛나고,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계가 다 견성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해오만 되어도 “아 그렇구나, 모든 것은 본래가 둘이 아니구나” 하여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기분이 참 쾌적해서 비할 수 없는 느낌을 갖는 분들은 “내가 지금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깨달았다는 만심(慢心) 때문에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버리는 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상만(增上慢)입니다.

이런 것을 점검할 때는 “과연 저 사람한테 욕심이 다 떠났는가, 저 사람한테 진심(瞋心)이 조금도 안 보이는가, 칼을 가지고 저 사람의 목을 애매하니 찌른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가 없을 것인가” 이렇게 점검해 볼 때는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됐다고 할 때는 대망어(大妄語)죄에 해당합니다. 승려 자격을 박탈 당하는 것입니다. 비증(非證)을 증()으로 하고 못 깨달음(未悟)를 깨달았다() 할 때는 4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 바로 승려 자격을 빼앗기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나 남이나 암중모색하는 것을 깊이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漸修)가 분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보살 초지(初地)에서 견도하고,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을 위해서 또 점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해오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하고, 또한 증오한 뒤에도, 증오 자체가 세존같이 정각(正覺) 자리를 다 원만하게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마땅히 성불(成佛)을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한 다음에 점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에 한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증오한 다음에 닦는 법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점차, 고하 또는 계급, 차별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무념수(無念修),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합니다.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 오염하면 참다운 선()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은 꼭 무염오수행을 해야 합니다.



今頓見者 已是多生漸熏而發現也 檀經云 法無頓漸 頓漸在機者 誠哉此理

-都序-


다음은 도서(都序)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문득 깨달은 자는 이미 다생겁래에 점차로 닦아옴이 있어서 금생에 발현(發現)하는 것이라,” 지금 돈오를 했다 하더라도 금방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차 닦아온 공덕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선근이 깊으면 영운(靈雲800년대 위산?山弟子) 대사같이 복숭아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는 동산(洞山 807-869)스님같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깨닫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다 과거에 닦아 나온 과보인 것입니다.

“단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본래 돈과 점이 없으나 돈점은 그 근기에 있다는 이 이치가 진실로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시길 바랍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 / 법정스님

                  


사랑은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풋풋해지고
더 자비스러워지고
상대방이 좋아할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누구나 자기 집에 도자기 한두 점 놓아두고 싶고
좋은 그림 걸어 두고 싶어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거기 그림이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손안에 넣는 순간 흥미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단지 바라보는 것은
아무 부담없이 보면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사랑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차 한잔의 생각 ...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은 내 죄가 아니지만
내가 가난하게 죽는 것은 내 죄이다.

빌게이츠가 한 말입니다.
우린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그 누구든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자 집에 태어나든 가난한 집에 태어나든
다 선택받은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였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산다는게 때론 죽음보다
더 힘들다고 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삶은 결코 그리 녹록치 않고
우리에게 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기도 하며

더러는 소중하고 귀한 목숨을
스스로 포기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여 태어 날 수 없듯
시련과 고통 또한 선택 할 수 있는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는 것 입니다.

어떤 이는 시련과 고통을즐기며 살아 갑니다.
어떤 이는 늘 원망과 증오로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