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청화스님

2015. 4. 11. 2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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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불교는 무엇인가?
불교는 헤매지 않고서 본래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자리 이것은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인데
진여불성자리는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거기다가 보탭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모두가 다
진여불성에다가 붙인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공부가 제일 쉬울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사람들은 어렵게끔
어려운 것을 우리가 공부하면은 훨썩 더 차원이 높고
또 간단하고 누구나가 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공부하면은
차원이 낮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주 생긴 대로,
사실 생긴 대로 우리가 공부하면 된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이나 우주의 본질인 진여불성이라고 하면은
바로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하면은
그 부처님의 성품 이름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내 생명의 그대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것이
사실은 제일 쉽고 사실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쉬운 것이 없습니다.
쉬운 것은 이것은 공부가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쉬우면서 닦기가 쉽고 또 극락세계에 가기도 쉽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엄격하고 준엄합니다.
우리가 지은대로 받기 때문에 준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본래가 어느 것도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종당에는 다 모두가 부처가 돼 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가장 자비스럽고 한도 끝도 없는 사랑에 충만한 그런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알아야 참다운 지혜인 것인데
그렇게 알지 못하고 이 겉만 보고서 근본 뿌리를 보지 못하면
그때는 참다운 지혜가 못됩니다.

참다운 지혜란 것은 여러분들이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般若)의 지혜라.
반야의 지혜는 참다운 지혜란 뜻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상이 없는 지혜란 말입니다.
상이 없는 우주의 본바탕을 그대로 보는 지혜가
반야의 지혜입니다.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란 말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돼야 이것이 참다운 지혜인데
참다운 지혜는 방금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둘이나 셋이나 그렇게 분열되지 않은 지혜란 말입니다.
하나의 지혜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자리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진여불성의 도리입니다.

영가(靈駕)들도 하나의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저승에서 헤매지 않고서 극락세계에 바로 가십니다.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공덕이
우리 마음에는 본래로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를 의심없이 믿으면
설사 금생에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의심 없이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의심 없이 믿는 그 순수한 마음 때문에
극락세계에 비약적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經典)에 보면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있는 법문입니다만,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꼭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악도에 떨어질 만한 사람들이 죽을 때는
임종(臨終)때 굉장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임종 때 여러분들, 돌아가신 분들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어느 분들은 고요히 가십니다.
어느 분들은 그냥 뭐 손을 내젓고서 아주 몸부림 치고 말입니다.
그 고통하면서 소리도 고래고래 지르고 가신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틀림없이 자기가 들어갈 세계,
자기가 들어갈 그 어두운 세계,
고통 세계의 여러 가지 상황을
벌써 상징적으로 그대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삼악도에 틀림없이 떨어질 만한 죄를 범한 사람도
아까 제가 말씀 드린바
임종 때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서 반야바라밀[반야지혜]을 느끼고,
반야의 지혜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지혜란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나나, 또는 어느 존재나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하나의 만능을 갖춘 것이 내 생명이다,
그 자리가 진짜 나다,
그 자리를 깨달아야 그래야 참다운 인간입니다.

여러분들 참 진(眞)자, 사람 인(人)자,
진인(眞人)이란 말씀을 들으셨지요.
진인이라, 참다운 사람.
또는 대아(大我), 큰 대(大)자, 나 아(我)자,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다 같은 뜻인 것인데
그렇게 참다운 사람은 무슨 사람인고 하면은
그 진여불성을 자기로 한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달은 분입니다.

한데 그 진여불성,
진여불성이 참다운 나다, 이렇게 느끼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를 많이 지어서
꼭 지옥에 떨어질 사람도
순간적으로 죽는 순간적으로 그냥 정화(淨化)가 돼서 말입니다.
극락세계에 직행한단 말입니다.
직행도 그냥 직행한 것이 아니라 성중래영(聖衆來迎)이라,
아미타 부처님이 25보살을 거느리고서 마중 온단 말입니다.
죽어서 자기 영혼(靈魂)이 홀로 외롭게 가는데
마중 올 사람이 없으면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헌데 그냥 보통 사람이 마중 온 것이 아니라
아, 부처님께서 우리를 마중 온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제가 지어서 한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경(經)에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깊이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眞理)라는 것은 우주에 공변된 진리입니다.
사사로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지어서 지은 대로 받습니다.
우리가 짓는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우리 생명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보다도 더 중요한 길이 없습니다.

무수한 성자(聖者)가 무수한 철학자(哲學者)들이 모두가 다
그 자리를 탐구(探究)하고
그 자리 때문에 생명도 바치고 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를 마다고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자리만이 참다운 행복의 자리입니다.
극락세계에 들어가야 만이 영원히 죽음이 없습니다.
이별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따라서 참다운 행복은
극락세계에 들어가는 행복만이 참다운 행복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극락세계는 도처에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깨달아 지면은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이라 하는 참다운 나가 되면은
그때는 이 사바세계에 있다 하더라도 극락을 느낀단 말입니다.
또는 저 맑은 공간에도 극락세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 만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 깨달으면은
그때는 어디 먼 데 갈 것도 없이 이 자리,
자기가 선 채로 이 자리에서 극락세계를
우리가 수용(受用)을 합니다

왜 그러는가?
아까 제가 말씀은 드렸지요.
부처님의 청정(淸淨)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다 부처같이 보이니 무슨 갈등(葛藤)이나 반목(反目)이나
또는 여러 가지 투쟁(鬪爭)이나
그런 싸움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다 부처같이 보이니
부처란 것은 훤히 다 광명으로 빛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니 우리한테 불행이나
또는 여러 가지 우리 마음의 그런 어두운 마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 깨달으면
그때는 도처가 다 극락이란 말입니다.

오늘 불자님들이시여!
천도를 받는 영가(靈駕)들이시여!
극락세계는 절대로 먼 데가 있지가 않습니다.
또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는 방법도 어렵지가 않습니다.
나한테 원래, 내 생명의 본바탕이 바로 부처인데
그 부처자리, 부처님의 그 자리,
그 자리에 가기는 우리가 버릇이 들어서 쉽게는 갈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가장 쉬운 법은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을 외이면은
그 때는 이름을 외이는 즉시에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하고 같이 상통이 됩니다.
중생이 부처님 생각하면은
천지우주가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어놔서
부처님은 또 우리를 그대로 굽어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절을 하면은
부처님은 우리가 절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면
또 부처님도 공명(共鳴)을 다 하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주저 없이 우리 몸 이대로 갖고 가지고 있는 대로
참다운 실상(實相)적인, 가상적(假想的)인 그런 사람이 아니라
참다운 본래 우주생명 그대로인 참다운 진인(眞人)이라.
참다운 ‘나’라.
진아(眞我)라.
이렇게 되셔서
위없는 행복을 영원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과 성자(聖者)의 차이는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겉만 봅니다.
겉만 보나, 성자는 근본 본성품(本性品)을 본단 말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어느 분들은 부처님 법이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은
저는 어디 가서나 얘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그래서 제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은 사실은 제일 쉬운 법이란 말입니다.
제일 쉽고 성불하기가,
부처가 되는 법이 제일 쉽다고 저는 역설(力說)하고
제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래서 제가 지금 부처가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법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말으십시오.
제가 그 증거를 또 하나 하나를 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쉬운 것인가?
없는 것을 돈을 많이 주고 사가지고 온다든가
또는 꿔가지고 온다든가 그런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부처님 법은
없는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구해가지고 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아, 그럼 부처란 것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불교(佛敎)란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한 공부입니다.
부처가 안 되면은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동시에 우주가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지금 세상은 모두가 다 연관 돼 있어놔서
기업(企業)도 국제적(國際的)인 기업 아닙니까?
한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도,
한 나라만 가지고 안 됩니다.
국제적인 합의(合議)라든가 국제적인 협조가 서로 있어야
한 나라도 역시 안정적으로 질서를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거창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개인문제도 그래요.
우리 개인이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의 문제와 같이 연관 돼서 알지 않고서는
근본 뿌리를 모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아까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존재의 근본 뿌리나 우주의 근본 뿌리나
같은 뿌리란 말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면 저것도 확실히 알아지고
저것을 또 확실히 알면 이것도 알아진단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같은 뿌리기 때문에
내 생명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이걸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천지우주의 본질을 알아진단 말입니다.
또 모르고서는 내 존재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는데 다행히도 쉬운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내 생명의 뿌리나 우주 생명의 뿌리나
아까 제가 몇 번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성 이것이
내 생명의 뿌리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뿌리 입니다.

그러기에 그 뿌리를 알아버리면은
그때는 일반적인,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가 눈을 한 주먹 넣으면은
그냥 금새 녹아 버리지요.
그것이 이른바 홍로일점설이라,
숯불이 번져서 이글이글하게 타고 있는데다가
눈 넣어 보면 금방 녹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나와 남의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사소한 문제는 다 그 속에 포함시켜서
저절로 알아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진여불성은 알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도 하십니다만 이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여불성이 밖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자리, 우리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 입니다.
불성을 안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심이 바로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佛心)이고,
부처 불(佛)자, 성품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 그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렇더라도 마음을 깨달아야 불심으로 온전히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깨닫지 않더라도 불심은 조금도 훼손도 안 되고
석가모니마음 불심이나 우리마음 불심이나
예수님 불심이나 공자님 불심이나 다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 신앙(信仰)이라 하는 믿음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합니다.
뭐 학문을 많이 배우고, 무슨 체계를 세우고 이렇게 해야
훌륭하다고 보고 말입니다
그냥 우리 마음으로 단박에 학문이나 문자를
조금도 거기에 개입을 시키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으로 간절히 믿는 갈앙심(渴仰心),
간절히 그리워하는 흠모심(欽慕心)으로 해서
단박에 우리 마음을 깨달아 버리는 그런 공부를
보통은 또 소홀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보통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이것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란 것은 그냥 보통 그렁저렁한,
이것 생각하고 저것 생각하고 뭘 좀 기억하다 말고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란 것은
석가모니 마음 같은 그런 마음
또는 예수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
또는 공자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재적(天才的)인 그런 재주도
우리 불심에는 다 포함 돼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보살행(菩薩行), 보살행 하지 않습니까.
허나 어느 때나 어느 순간도 주저 없이
모든 중생을 위해서 내 몸뚱이 온전히 바치겠다 하는
그런 자비심도 불심 가운데는 다 충만해 있습니다.
그 외에 만능(萬能)의 자리란 말입니다.
만능의 자리, 어느 것도 불심 가운데는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변동이 있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고
또는 다시 변화가 되고 없어지고
그래야 변동이 있는 것 아닙니까?
허나 불심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생멸(生滅)이 없단 말입니다.
죽고 살고 없어지고 하는 법이 아닙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불심(佛心)은 똑같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잘못 살아서
금생에 지옥 들어가서 지옥고(地獄苦)를 받는다 하더라도
불심은 조금도 오염도 안 되고
또는 덜도 안 되고 더도 안 된단 말입니다.
아, 분명히 있다는 불심이 어째서 덜도 안 되고 더도 안 될 것인가?
있기는 있지만은 그것은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명부득상부득(名不得相不得)이라,
이름도 없고 또는 상도 없단 말입니다.
이름도 없고 상도 없는 것이 불심입니다.
또 그것이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입니다.
어떠한 것도 불심으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그 자리를 얻기가 왜 쉬운고 하면은
금생에 잘못 살면은 그때는 버릇이 많이 붙지 않습니까?
나쁜 버릇 때문에 그 자리를 다 인증(認證)을 안할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떡해서 불심을 그냥 얻을 것인가?
오랜 동안 난행고행(難行苦行)하고
달마(達磨)스님같이 9년 동안이나 토굴에서
그렇게 벽만 바라보고 참선도 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도저히 우리 더구나 재가(在家)불자님들은
아, 불심이 있다는 것만 거의가 아는 것이지
불심을 깨닫는 것은 도저히 가망도 없다,
이렇게 보통 생각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불심 이것은 시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있고 공간을 초월해 있단 말입니다.
불심은 어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모양이 없는, 모양이 없으면서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불자님들,
불심은 어느 처소에 가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때 언제나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는
무량무변한 우주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또는 그것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언제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어느 때나 존재하는 영생(永生)의 생명입니다.
조금도 오염이 안 된,
물질이 아니니까 오염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령 잘못 살아 가지고서 자기 부모를 살해한다,
아,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오역죄(五逆罪)라,
이 죄는 굉장히 무서운 죄입니다.
이 죄를 금생에 범 하면은
금생에 죽자마자 무간지옥(無間地獄) 들어갑니다.
그러나 금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죽자마자 틀림없이 무간지옥에 들어갈 사람도
그 사람 마음, 그 사람 불심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물질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무엇이 형체가 있어야 검정 물 들이면은 검게 되고
붉은 물 들이면은 붉게 되고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나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런 것인지라
도저히 우리가 설혹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는 오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마음입니다.
지금 김 씨 마음이나 또는 박 씨 마음이나
다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오염도 안 된 석가모니같은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심입니다.
본 불심(佛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