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극락암과 경봉대종사

2015. 4. 18. 10: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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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극락암과 경봉대종사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라”

통도사 극락암과 경봉대종사


 
 
통도사 극락암  경봉대종사는 이곳에서 선풍을 드날렸다.
1882년 4월9일에 광주김씨 영규(榮奎) 거사와 어머니 안동 권씨를 인연으로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스님은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 1907년 6월에 출가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1908년 3월 통도사가 설립한 명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 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호(淸湖)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종무소에서 소임을 보는 틈틈이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 라는 〈화엄경〉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 참선 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의 혜월(慧月)선사를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으로 가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등 이름난 선원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스님과의 선담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안양암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하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겸 설주(說主)를 맏아 철야로 설법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20일에 방안의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가 바로 그 것이다. 그 뒤 깨달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오대산 한암(漢岩, 1876~1951), 가야산 효봉(曉峰, 1888~1966) 직지사 제산(霽山, 1862~1930)스님 등 제방의 선지식에게 서간문을 보내고, 만공(滿空, 1871~1946)선사와 용화사 전강(田岡, 1898~1975) 스님과 법문답을 했다.


성해스님을 은사로 15세에 출가

1927년 촛불 춤추는 것 보고 大悟

1953년 극락호국선원 조실 추대

30여년간 극락암서 후학 제접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현재의 선학원) 이사장, 1949년에는 다시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며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을 선양했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입적하시던 날까지 이 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 내원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셨다. 경봉스님은 언제나 온화하고 자상했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해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다. 열려진 방문에는 언제나 구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스님은 특히 알아듣기 어려운 선법문이 아닌 일상생활 주변에서 선도리를 말했으며, 옛 스님들이 해놓은 법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사 자신의 안목으로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갈파했고, 시와 시조, 선묵(禪墨)에도 뛰어났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는데 90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시자의 부축을 받고 법좌에 올라 설법했는데, 매회 1,000명 이상의 불자들이 운집했다. 또한 가람의 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 건립,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재 봉행, 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若)의 창건, 극락암의 정수보각(正受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파고다 공원 안에 만해선사 기념비의 건립도 추진했다. 또한 18세 때부터 장장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기셨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의 근세사가 그대로 담겨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로 전해져온다.

1982년 미질(微疾)을 보인 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제자로는 벽안법인(碧眼法印) 학월경산(鶴月京山) 활산성수(活山性壽) 원명지종(圓明智宗) 고원명정(古園明正) 원산도명(圓山道明) 우송취원(友松就願) 벽산경석(碧山慶碩) 법산경일(法山鏡日) 동주행산(東洲幸山) 송암혜명(松巖慧明) 원공일진(圓空一眞) 월천월성(月泉月星) 취암능엄(翠巖楞嚴) 서암도명(瑞巖道明) 법준(法俊) 도오(道悟) 활성(活聲) 시명(是名) 취원(翠苑) 지연(智演) 등 31명이 있다.

손제자로는 근암지일(近庵志一) 정악태응(定岳泰應) 눌암지정(訥庵志正) 무주정각(無住正覺) 정산도훈(定山道勳) 무애성호(無碍性浩) 성암종범(惺庵宗梵) 범하명호(梵河明浩) 인산지준(忍山志準) 요산지안(樂山志安) 백우도승(白牛道承) 범웅철인(梵雄哲印) 초현(超玄) 현대(玄大) 지태(志泰) 지견(志見) 지근(志勤) 법선(法船) 종원(宗元) 관행(觀行) 정수(正秀) 정호(正浩) 명현(明玄) 반산(盤山) 혜원(惠遠) 등 100여명과, 증손제자로는 석우(碩友) 정수(正守) 선지(善智) 보윤(普潤) 우진(友眞) 영일(靈一) 신본(信本) 종현(宗玄) 정도(正道) 자광(慈光) 보명(普明) 등이 있다.

스님의 저서로는 〈법해(法海)〉, 〈속법해(續法海)〉 와 한시문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일기집인 〈삼소굴일지〉,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삼소굴소식〉 등이 있다.



누구에게나 깨침의 길 제시한 선지식

경봉대종사 자비 법문


선남선녀가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부모 밑에 학생시절에는 아무 생각과 걱정이 없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장가 가면 좋다고 아버지 흉내 내듯이 장가 보내고, 처녀는 어머니 흉내 내듯이 무슨 좋은 일이나 있나 싶어 시집을 간다. 가정을 이루어 놓으니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하기를, 어쨌든 이 두 가지에 초월해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들어지게 연극 한 바탕 잘 하고, 늘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살아가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이 산에 갔는데 큰 곰이 나타나 잡아 먹으려고 덤빈다. 하도 큰 놈이 덤벼 우선 급하여 큰 나무 뒤에 숨으니, 미련한 곰이 나무 뒤로 와서 사람을 잡아야 할텐데 나무를 껴안은 채 다리를 들어 사람을 잡으려 하니, 사람은 지혜가 있어서 곰 다리를 꽉 움켜 잡았다. 곰이 사람을 물려고 하니 나무가 있어 못 물고 어디로 달아나려고 해도 사람이 두 다리를 꽉 잡아서 못가고 꼼짝 못하고 있는데, 사람은 곰이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니 곰 다리의 냄새는 누리하게 나지만 다리를 놓으면 죽을 터이니 그것이 생명선이라 밥도 굶고 아주 죽을 지경인데 곰도 죽을 지경이다.

필사적으로 곰 다리를 거머쥐고 있기를 사흘만에 어떤 나무꾼이 큰 도끼를 지게에 얹어 왔는데 누가 큰 곰 다리를 거머쥐고 있는게 아닌가! “아이고 여기 있다가는 저 곰한테 죽겠구나”하고 달아나려 하자, 곰 다리를 거머쥔 이가 “그 도끼로 이 곰을 잡세. 이 곰 쓸개는 금보다 비싸다네. 이 곰이 쓸모가 많으니 이 곰을 잡읍시다” 했다. 그리고는 “여보게, 이 다리를 좀 쥐고 있게나. 나는 곰을 많이 잡아봤는데 도끼로 요긴통을 바로 딱 때려야 잡지, 만일 잘못해서 설 때려 놓으면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라며 겁을 주었다.

곰을 많이 잡아 봤다고 하자 나무꾼이 슬며시 곰 다리를 넘겨받아 쥐었다. 곰 다리를 잡고 있던 사람은, 사흘씩이나 굶고 곰에게 시달리다가 곰 다리를 다른 이에게 전장시켜 놓으니 어찌나 좋던지 “휴유”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또 실컷 쉬고는 말을 했다. “여보게, 내가 말은 그렇지만 실은 곰을 잡아보진 못했다네. 그러니 내가 잘못 섣불리 곰을 치다가는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 누가 오거든 나처럼 자네도 곰 다리를 전장시키고 가게나.” 그렇게 말하고 달아났다.


“현실에 너무 집착말고 남에게 관대하게 해야”


여러분들이 처녀로 있고 총각으로 있을 때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장가 가고 시집가니까, 마치 곰 다리 거머쥔 것과 같다. 이 곰 다리, 집안 살림살이의 곰 다리는, 아들 장성시켜 며느리를 맞아 전장시키고,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말을 왜 하는가 하면 본래 없는 것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놓으니 마치 곰 다리를 거머쥔 것과 같은 처지라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모든 일에 당기면 늘어지고 놓으면 오그러지는 신축성을 가지고 마음을 쓰게 하는, 폭을 너르게 하고 남에게 관대하고 물질과 사람에 초월한 정신을 가지고 멋지게 살라고 하는 말이다.

부모 태중에서 나올 때 영감을 업고 나왔나, 마누라를 안고 나왔나, 자식들을 안고 나왔나, 빈 몸 빈 손으로 나왔는데 이것에 애착이 붙어 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고, 밤 낮 없이 걱정만 한다. 그런 망상 다 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본연의 천진면목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그 망상(妄想) 없는 경지에 가 생각하면 올바른 생각이 든다.

그러니 현실(現實)을 실상(實相) 그대로 소중하게 여기긴 여겨도, 너무 집착도 하지 말고 물질과 사람에 모든 사람들이 집착하지마는 초연히 생각하고, 초월한 정신으로 사물을 대하면 모든 일을 달관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경(般若經)에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했다. 이 이름 뿐이다 이 말이여. 여러분이 김 아무개다, 박 아무개다, 이 아무개다 하고 이름도 있고 성도 있지마는 어디 본래 이름이 있나, 부모 태중에서는 이름도 성도 없는 것인데 다만 몸에 대명사로 붙여서 부르기 편리하게 한 것이다. 그와 같이, 진리법(眞理法)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과 조사(祖師)가 말을 붙여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요, 오늘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설법인 것이다.



“한강 이남 제일 선원” 평가

극락암 극락호국선원의 어제와 오늘


경봉대종사가 주석했던 삼소굴.
극락암은 본래 염불만일회의 근본도량이던 것을 1953년 경봉대종사가 극락암 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되면서 선원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출가와 재가가 함께 정진하는 선원으로 운영되다가 점차 스님들만의 선원과 재가자 선원으로 나누어 운영되었다. 입적하신 전 종정 한암스님, 월하스님, 벽안스님, 보안스님, 혜암스님을 비롯하여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실스님들이 경봉대종사와 함께 모두 이곳에서 정진했으며,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선원으로 이름이 높다.

무량수각과 정수보각(1975년 건립)도 선원으로 쓰인 건물이며, 현재 정진처로 쓰는 조사각은 경봉대종사가 일본불교를 둘러보고 역대조사를 모시는 전각이 이 땅에 한 군데도 없는 점을 지적하며 건립한 당우이다.

 영지 위에 있는 극락교를 건너면 그곳에 극락암이 있다.

그러다 1991년 중수하면서 선원 정진을 위한 전각으로 개수한 건물이다. 스님은 공부가 무르익은 구참납자를 위해 특별정진처인 아란야를 1968년 건립했다.

또 스님은 항상 조실방의 문을 개방하여 언제라도 자신의 공부를 점검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고, 개인지도를 통한 정진독려도 많이 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가풍과 대종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현 선원장 고원명정스님은 수좌들과 정진하고 있다. 1995년부터는 주말 참선법회를 개설하여 매주 토요일 밤 철야정진을 통한 재가자 참선지도도 계속 하고 있다. 특히 2003년부터 수좌스님들의 공부여건 조성에 진력하여 도량주변의 정화와 정진분위기 고양에 적극 힘쓰고 있으며, ‘한강 이남 제일선원’이라는 전래의 명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매진하고 있다.



경봉대종사 관련서적 출판 목록


.1975년 설법집 ‘법해(法海)’ 발간 (극락선원 刊)

.1979년 11월 한시집 ‘원광한화(圓光閑話)’ 발간 (극락선원 刊)

.1979년 8월 설법집 ‘속 법해(續 法海)’ 발간 (극락선원 刊)

.1982년 9월 한시집 ‘원광한화(圓光閑話)’ 재판인 ‘야반삼경에 대문빗장을 만져보거라’ 발간 (女苑刊)

.1982년 9월 설법집 ‘법해.속법해’ 재판인 ‘극락에 길이 없는데…’ 발간 (女苑刊)

.1982년 9월 설법집 ‘법해.속법해’ 재판인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바탕 잘해 보거라’ 발간 (女苑刊)

.1983년 경봉대선사 선묵집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발간 (극락선원 刊)

.1984년 2월 서간집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발간 (美進社 刊)

.1985년 5월 경봉대선사일기 ‘삼소굴일지(三笑窟日誌)’ 발간 (해뜸 刊)

.1989년 5월이래 55판, 설법집 ‘경봉스님 말씀’ 발간 (극락선원 刊)

.1990년 법어집 ‘경허집’ ‘한암집’ 번역 발간 (극락선원 刊)

.1994년 7월 ‘월간 다담지’ 기고문 모음 ‘차이야기 선이야기’ 발간 (대원정사 刊)

.1997년 1월 서간집 ‘삼소굴소식(三笑窟消息)’ 발간 -118명과 주고받은 258통의 편지글 모음.

.근대한국고승 사진집 근간 예정

 

성공과 행복

성공이 행복의 열쇠가 아니라
행복이 성공의 열쇠다.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찬양받을 만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 사람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 -

 

 

정주영 회장의 어록


1. 운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운이 나빠지는 거야.
2.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지.

3. 무슨 일이든 확신 90%와  자신감 10%로 밀고 나가는거야.
4. 사업은 망해도 괜찮아, 신용을 잃으면그걸로끝이야.

5. 나는 젊었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났어. 더 많이 일하려고.
6. 나는 그저 부유한 노동자에 불과해.

7. 위대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야, 노동자를 무시하면 안 돼.
8. 고정관념이 멍청이를 만드는 거야.

9. 성패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에 달린 거야.
10. 아무라도 신념에 노력을 더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거야.

11. 내 이름으로 일하면 책임 전가를 못하지.
12.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좋은 일을 해야지.

13. 더 바쁠수록 더 일할수록 더 힘이 나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인가 봐.
14. 열심히 아끼고 모으면 큰 부자는 몰라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어.

15. 불가능하다구? 해보기는 했어?
16. 시련이지 실패가 아니야.

  
   오늘도 축복된 날 되세요 ♥

 

                                     나는 행복한 사람 - 이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