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불교의 우주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공(空)이다. 우주는 성주괴공을 반복하며, 무시(無始) 이래로 흐르고 있다.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무상이고 무아이고, 흐름의 과정일 뿐이다. 데이비드 봄이라는 과학자는 '우주의 총체는 흐름의 총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흐름이야말로 모든 만물의 근거이다. 하나의 위치에 고정된 음은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 고정된 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해주지 않는다. 고정된 음들이 흐름을 타야, 비로소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음악은 선율의 흐름이다. 우리의 존재도 인연따라 흐르고 있다. 예정되고 고정된 행로가 없으므로 우리는 삶을 무한히 창조할 수 있는 여백을 지니고 있고 또 악업을 지우고 선업을 새길 수 있는 가능성도 이러한 무상(無常)에서 나온다. 흐름상에서 영원불변하고 독자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대 과학이 이루어낸 성과들은 이러한 불교의 공(空)을 닮아가고 있다. 이러한 과학의 성과들은 아마도 인간의 지성이 추구하는 궁극은 결국 공(空)으로 낙착된다는 반증이 아닐는지... ...
불확정성 원리와 카오스 이론도 그 예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나 카오스이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불교의 '흐르는 우주'와는 걸맞지 않는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아, 뉴턴부터 언급하기로 한다.
2.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17세기), 위대한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뉴턴은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 법칙으로 환원하고, 이 법칙에 의하여 우주체계를 설명하는 '기계적 우주관'을 확립했다. 뉴턴 이후로 그를 답습한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우주는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므로,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졌다. 뉴턴의 만유 인력 방정식과 수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예견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었으며, 뉴턴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우주를 시계에 비유했다. 시계바늘 뒷면에서 작동하는 톱니바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들의 이면(裏面)에는 자연법칙이 엄격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양계 안에서의 행성들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도 재깍 거리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히 자신의 궤도 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린다는 것이다.
뉴턴 학파의 사람들이 우주가 시계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또 한가지 있다. 즉 일단 신이 시동을 걸어놓은 이상 우주는 정해진 길을 가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은 우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었으며, 그래서 미래는 완전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뉴턴의 이 멋진 아이디어는 그와 동시대인(同時代人)인 에드먼드 핼리가 핼리 혜성의 궤도를 뉴턴의 법칙을 이용하여 계산해내고 그 핼리혜성이 언제 돌아올지 예측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확고히 뒷받침된 듯이 보였다.
17세기에 뉴턴이 제창한 고전역학은 물리학 교과서의 앞 부분을 차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주의 규칙성으로 말미암은 우주행로의 '예측가능성'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우주는 무심하게 재깍 거리며 영원토록 하염없이 돌아가는 기계로 된 시계! 이제 이 톱니바퀴와 같은 우주는 우리의 손바닥 안에 있으며, 인간들은 창조주인 신에게마저도 큰 소리칠만 했다. 아니, 큰소리를 넘어서서, 이젠 창조주인 신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세계관도 스스럼없이 진리의 한면으로 신봉되며 역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인과법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양자역학(Quantum Physics)이 등장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성(理性)을 구가했으며,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3. 불확정성 원리 뉴턴이래 기계적 우주에 대한 예측가능성이라는 이 장밋빛 환상은 현대의 양자역학과 혼돈(chaos)에 대한 연구로 깨어지게 된다. 우주의 저변에는 만유인력 같은 단순한 법칙들이 흐르고는 있으나, 이 법칙들로도 뉴턴 시대의 사람들이 믿었던 환상처럼 미래에 대해 항상 완전히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아, 우리의 이성과 지성은 너무나 미미한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더 겸손해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양자역학에는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이 있다. 불확정성 원리란 어떤 소립자에 대해서 아주 정밀하게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즉,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글자를 읽기 위해서는 빛을 이용한다. 광원(형광등이나 태양)에서 나온 빛이 모니터에서 반사되어 우리 눈에 도달하면 이 빛에너지는 우리의 망막을 거쳐 신경신호로 변환되어 뇌로 전달된다.(유식학적으로 보면 안근인 눈에 의지해 활동하는 '안식'이 색(色)을 인식하고, 제6 의식이 안식의 내용을 분별하게 됨)
우리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광자(빛)가 화면을 때리고 튀어나온다. 그러나 광자(빛)에 얻어맞은 화면이 움찔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 이것이 뉴턴식 측정방법이다. 야구 경기 도중에 사람들이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는다고 하여 공이 공중에서 춤추지는 않으며, 방에 불을 켠다고 해서 가구들이 펄쩍 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뉴턴의 방정식이 '대체적으로'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뉴턴식의 사고방식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빛과 같은 무한히 작은 에너지가 공이나 가구들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이 글자들에 부딪혀 반사되어 나오는 빛으로 글을 읽지만, 이 빛이 모니터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 이 '미미한 것 (그러나 있음)'을 뉴턴은 아예 '없는 것'으로 가정해버렸던 것이다. 공(空)은 "비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이다. 세상은 비어 "있다". 이렇게 무한히 작은 빛도 그와 같은 크기이거나 그보다 작은 소립자에 부딪힌다면 막강한 파워를 지니게 된다.
예컨대, 두 개의 당구공이 부딪히면 '두 개의 당구공 모두' 튀어나간다. 굴러간 당구공'만' 부딪혀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소립자를 관찰하기 위해 광자(빛)를 부딪히면 관찰대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소립자도 빛에 부딪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확정성 원리는 이렇게 선언한다.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 두 가지를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소립자의 위치를 정밀히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쓰면 쓸수록, 속도의 불확정성은 그만큼 커진다. 반대로 속도에 신경 쓰면, 위치에 대해서는 점점 모르게 되어버린다. 양자역학에서는 정확한 수치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확률을 사용한다.
뉴턴을 극복한 아인슈타인마저도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러한 영역이 우주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끝내 납득하지 못했다. 모든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아인슈타인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로부터 저 거대한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 삼라만상의 활동법칙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소립자의 개개의 정밀한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다는 양자론의 중심개념때문에 그가 꿈꾸던 통일장 이론을 완성치 못하여, 이렇게 닐즈 보어에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 비록 불가사의하지만, 결코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 못하게 할 정도로 악의적이진 않을거라 믿네. 신이 주사위를 가지고 놀리는 없쟎는가" 그러자 닐즈 보어는 "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마시죠."라고 대꾸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소립자세계)에서는 뉴턴의 방정식이 전혀 쓸모 없어져 버린다. 이러한 불확정성 원리는 불교의 연기와 공사상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현대과학의 성과이다. 모든 소립자의 상호작용은 기존 소립자의 소멸과 새 소립자의 생성으로 이루어진다. 소립자의 세계에는 끊임없는 生成과 消滅의 춤판,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하는 끊임없는 춤판이 벌어진다. 존재의 안팎에서 순간적인 형태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었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불교의 인과법칙(연기법)은 모든 진리의 기본전제라고 하는데,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인과법칙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양자의 세계에서도, 정확한 수치는 사용할 수 없지만 '확률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인과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위의 물음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연기법칙을 다른 말로 인과법칙이라고 말하지만, 불교의 인과법칙은 과학에서 사용하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을 '포함'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과학상의 인과법칙이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우주만물의 근본을 형성시키는 에너지의 원천, 즉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은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밖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상즉상입(相卽相入)하면서 인과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을 제외한 인과법칙'을 우주에 적용시키려니까, 눈에 보이는 거대한 뉴턴식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가 이원론적 세계로 분리되어 버린다.
4. 카오스 이론 우리들 지식의 불완전성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이론으로 혼돈(chaos)이론이 있다. 공을 높은 탑에서 떨어뜨려 순간 순간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고, 지면에 떨어지는 시간가지도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은 전형적인 뉴턴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심장이나 날씨처럼 복잡한 시스템은 예측을 불허한다. 이처럼 규칙적이지 않은 무질서(혼돈)한 시스템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
예컨대, 수도꼭지를 조금만 틀면, 작고 느린 물줄기가 흘러나오지만, 좀 더 열면 물이 무질서(chaos)하게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초기 조건에 민감하다"고 표현한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조건에 민감한 특성을 지닌 현상으로는 물줄기, 커지는 눈송이, 심장의 박동 등이 있다. 혼돈시스템이 초기 조건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사실은 이들 혼돈 시스템의 미래행동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초기 조건이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되어 있으면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불행하게도 혼돈시스템의 미래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초기조건은 결코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예측과 실제가 한동안 '비슷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이는 커지기 마련이다. 혼돈시스템을 설명하는 데 과학자들이 예시하는 대표적인 예가 날씨이다.
일기를 측정하기 위해 기상학자들은 풍속, 풍압, 기압 등을 수천 번씩 측정하여, 24시간이나 48시간 단위의 예측은 상당히 정확할 수 있고, 일주일 전의 예보가 들어맞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특정장치가 정밀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뛰어나도 1년 후의 날씨를 예측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대기의 움직임이 갖는 이러한 혼돈의 특성은 '나비효과'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혼돈시스템 안에서는 영국 스코틀랜드 산악지방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조그만 일이, 우리 나라에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혼돈이론은 아직 미개척 분야이다. 그러나 혼돈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자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혼돈시스템의 예로 들고 있는 '나비효과'가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다. 물리적 인과법칙의 특성인 필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우연성이다. 물리적 인과관계에 사고방식이 물든 사람은 인과적 필연성과 반대되는 우연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연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으며, 우연은 어디까지나 맹목적인 것이다"라고.
그러나 "맹목적 우연"이라는 것도 기계론적인 우주관(뉴턴식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의 한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연의 의미를 보지 못하니까, 오히려 우리의 무지를 우연에게 뒤집어 씌워서 "눈 먼 (맹목적인)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는지....
부처님의 제3의 눈은 모든 것을 본다. 다인(多因)과 다과(多果)를 동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처님의 혜안으로 보면 이 우주에 '맹목적'인 것은 없다.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카오스이론을 여전히 연기법으로 설명하실 것이다.
5. 맺는 말 부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일체는 상호관계 속에 있으며, 홀로 독립해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그런데 현대 과학은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확증해주고 있다. (아래 글은 소걀 린포체 著, 오진탁 譯, 티베트의 지혜에서 인용, 민음사)
생태학자들은 알고 있다. 아마존 강의 열대 우림에서 불타고 있던 나무가 프랑스 파리의 시민들이 숨쉬는 공기로 바뀌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갯짓이 스코틀랜드의 헤브리디스 열대에 있는 양치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생물학자들도 개체와 그 정체성을 창조하는 유전자의 환상적이면서도 복잡한 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즉 먼 과거로부터 비롯한 개개의 정체성이 다양한 영향력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은 부처님이 우주 전체에 펼쳐진 반짝반짝 빛나는 그물 비유를 통해 제시한 것과 놀랄 정도로 유사한 양자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물 안에 있는 보석과 마찬가지로, 모든 입자는 잠재적으로 다른 입자들과 다양하게 결합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알고 있는 참된 영성(靈性)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身業), 말(口業), 생각(意業)일지라도 우주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조약돌 하나가 연못 전체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헛되고 헛된 것 / 조 병화
헛되고 헛된 것이 생이라 하지만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언젠가 너와 내가 강 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물은 흘러감에 다신 못 온다 해도 강은 항상 그 자리흐르고 있는 것
이 세상 만물 만사가 헛되고 헛된 것이라 하지만 생은 다만 자릴 바꿀 뿐 강물처럼 그저 한자리 있는 것이다
너도 언젠가는 떠나고 나도 떠날 사람이지만 언젠가 너와 내가 같이 한 자리 강마을 강가 이야기하던 자리 실로 헛되고 헛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그 사실이다
해는 떴다 지며 떴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감에 사람은 혼자서 살다가 가면 그뿐 그 자리엔 없다 해도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강물은 흐름에 마르지 않고 너와 내가 떠남에 실로 있었던것이다 언젠가 너와 내가 강 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젠가 너와 내가 강 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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