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수레바퀴 / 청담스님

2015. 6. 6. 19: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인연의 수레바퀴 / 청담스님

도대체 흥망성쇠는 누가 하는 일이며, 누가 당하는 일인가?
이 개성 없는 인간들이, 개성없는 하늘, 땅, 만물, 이것들이 다 무엇인가?

어디서 생겨났으며 없어져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가기는 가나 그 무엇이 가는 것인가? 정말로 답답한 일이다.

도깨비 장난이 아닌가?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나다 너다 할 것이며,

어떠한 것을 가리켜서 흥망 성쇠라 할 것인가? 도대체 막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 우주 모든 것이 모두가 연기 법칙에서 무한으로 저 천문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추측조차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흐르고 흘러서 최후에는 아주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말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생에 남 잘되는 것 미워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그런 사람은 금생뿐 아니라 내생에서 부모 덕도 없고 시집가도 남편 덕도

없고 장가가야 마누라 복도 없고 자식 낳아봐야 모두 불효하고 명 짧고 박복한 아이만

내 앞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하는 수 없다.

그러나 복만 짓고 나면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되니 큰 돈 번 사람들은 꼭 운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불교에서는 인과라 한다고 일소 하지만 그러나 인과는

알고 보면 과학적인 내용이 다 있다.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것도 들어맞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얼굴도 가령 정치가라든지 큰 사업가라든지 다 업보로 타고나는 운명이 있다.

누가 돈을 가져가도 그 사람 갚을 건가 안 갚을건가 그 사람 얼굴에 나타난다.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시간시간 미래에 관한 관상이 얼굴에 나와있다.

관상 잘하는 사람은 내일은 뭐가 되고 모레는 뭐가 되고 미래를 다 설명한다.

손금에도 거기 평생이 다 들어 있다. 정말 잘 보는 사람은 피 한 방울만 봐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 평생을 알 수 있다. 더 잘 보면 전생도 알 수 있고 죽어 내생도 알 수 있다.

인류는 누구든지 간에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회나 인류의 행복이 신의 가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과

자비스러운 자기 행위에 있는 것이다. 남을 도와주는 자비는 곧 자작자수의 인과로서

자기가 받을 마음의 농사인 것이다.
마음의 원리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중생들은 항상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고 의식주를 위해 생존경쟁을 하다가 죄를 짓고 온갖 고업을 받는다.

금생은 전생의 연속이며 무한 내생의 연결이며 금생에 주어진 후경이나 운명은 전생에 지은

원인으로부터 맺어진 결과이며, 금생에서 선악간에 하고 있는 우리의 일거일동은 다

내생에서 받을 결과에 대한 원인이다.

천지만물들은 서로가 연이 되며, 또한 이 연과 연끼리가 서로 모여서 어떠한 사물을

이루었다가 그것들끼리가 흩어져서 홀연히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만사가 저 뜬구름 같으며 꿈 같은 일이다. 원한을 푸는 방법은 오직 참회 뿐이다.

영혼은 전생의 인연관계를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첫눈에 좋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을

다 알고 있다. 부인이 밤에 잘 나가더라도 어디 가느냐고 등불을 들고 바래다 주고

(나의 힘과 재주로는 우리 마누라를 마음껏 즐겁게 해줄 수 없으니 제발 당신이 우리

마누라 비위를 좀 잘 맞추어 주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야 한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전생의 죄가 참회되고, 그래야 내생에는 그러한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이 세상만사는 모든 것을 다만 그 인연에 맡겨 지내가면서 억겁다생으로 사생에 윤회하는

것이며, 항상 그때 그곳에서 받아 태어난 그 몸뚱이만을 자기라고 고집하여 육신본위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휩쓸리고 만다.
불과 같이 일어나는 욕심에서 생겨나는 불만과 고독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와

비애에서 허덕이며 저지른 구원겁의 모든 죄악의 업습을 쉬어버리고 다시는 이

진아인 마음을 저버리고 허망무상한 육신만을 본위로 하지 말라.

가끔 부처님의 진법신이 허공과 같다고 비유로 말하지마는,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인 이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이 법신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말하되,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이 저 허공에 두루하였으므로

허공이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 하니 이것은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 원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만일 저 허공과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과 마음을 따로 갈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허공이니 법신이니 하는 것은 다만 제

스스로가 별명을 지어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 무한대는 아닌 것이다.

시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또한 법신도 그렇다. 오직 이 마음자리만이 이 우주에

두루할 뿐이다. 현재는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현재가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니 미래니 할 것인가?

과거다 미래다 하는 말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하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물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억한다는 말이 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서 지나가 버렸다. 작년 3백 65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것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이다.

또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도

경험할 수 없고, 미래도 경험할 수 없고 현재도 또한 경험할 수 없다.

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백년에 한번씩 이따금 흘러간다면 현재도 있고 과거도

있겠지만, 억조만분의 1초도 멈추는 일이 없이 찰나찰나 흘러가는 것이고 보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확실한 기억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확한 기억이라는 것은 생길 수는 없다. 비슷한 것, 거의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사회도의와 질서를 몰각하고, 윤리와 인성을 땅바닥에 처박으려, 사리사욕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해 다툼에는 맹수보다 영악한가 하면, 인간사회에 상호

불신의 씨를 뿌리며 동족과 이웃의 불행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국가사회의 이익에

앞질러 개인 축재와 향락에만 몰두하며 탐욕과 음유와 시기와 중상과 위선과 가식과

비열과 무교양과 파렴치의 온갖 죄악을 뱃속에 가득 담고, 아부의 웃음과 교활의

눈초리를 빈들거리는 무리들이 너무 많이 들끓는 것을 보면 벌써부터 우리 세상은

이 기계 문명의 소산인 가짜 인간들에게 침식당하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구제받을 길 없는 가련한 생명체들을 구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들로 하여금 소유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이들의 가슴속에 내일을 심어주고 절망과 체념에서 구출하고 생명의 자유와 영원성을

믿을 수 있도록 신앙을 가질 줄 아는 마음, 자기 종교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을 넣어주어야 겠다.

 길 (道路)

 

길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 뜻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
둘째는 방도를 나타내는 길,
셋째는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은 본래는 단순히 보행을 위한 육상교통의 수단으로서의 길만을 가리켰다. 이런 뜻에서 길을 정의한다면,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땅 위에 뻗은 공간적 선면(線面)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그 길의 양태나 규모에 따라서 ‘길’ 앞에 어떤 관형어를 붙여 오솔길·고샅길·산길·들길·자갈길·진창길·소로길·한길·지름길 따위와 같이 의미를 구체화하여 사용한다. 이와 같은 보행을 위한 육상 통로는 교통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개념이 확대되고 다양화되어 실체가 없는 관념적 통로까지를 일컫게 되었다.

 

그리하여 물위를 다니는 배의 통로는 뱃길, 철제의 궤조(軌條: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나 전철의 통로는 철길, 항공기가 다니는 공중의 통로는 이를테면 하늘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에서 뜻이 분화되어 어떤 일에 취해야 할 수단이나 방법을 뜻하는 방도(方途)라는 개념이 파생되었다. ‘무슨 길이 없을까?’, ‘손쓸 길이 없다.’라고 할 때의 길은 교통 수단의 길이 교통 이외의 수단으로까지 확대된 개념이다.

 

또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은 정신 문화가 깨쳐지면서, 특히 동양 사람들에 의해서 철학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동양에서는 인생이 곧잘 여행에 비유된다. 이때 세상은 여관으로, 사람은 나그네로, 인생살이는 길 가는 것으로 관념하는 일이 많다.  요즘 우리 가요에 “인생은 나그네길……” 하는 노래가 불리고 있는 것도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일것이다.

 

유교나 불교·도교 할 것 없이 동양 사상에서는 그 이념을 길[]이라 하고,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의니 도덕이니 하여 길로써 표현한다. 심신의 수양행위도 도(道)로 표현된다
跆拳道 國仙道 紳士道등이 예가 될수있다.

 

길은 예로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하므로 길을 소재로 한 글이 많다. 먼저 우리 격언이나 속담에 나타난 길의 예를 찾아보면, ‘길로 가라 하니까 뫼로 간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 ‘길 닦아 놓으니 용천배기 먼저 간다.’, ‘시앗 싸움엔 길 아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길을 알면 앞서 갈 것이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등등 많은 표현이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세가지길이  중요하다

좋은 하루 되시길....

 

 

 
영화 길의 주제곡  Nini Rosso-Gelsom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