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흉내라도 내어라 / 우룡스님

2015. 6. 6. 20: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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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흉내라도 내어라 / 우룡스님 

                                                            
윤회하는 우리의 생각,
윤회하는 우리의 알음 알이로는
진리의 바다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론만 가지고는 이를 수 없으므로 좀 힘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노력을 하여 불교의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기도를 하든, 안 흔들리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어디에도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됩니다.

결국 꿈틀거리는 마음,
흔들리는 마음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수행법 중 자신에게 맞는 한 가지를 택하여
죽으나 사나 무섭게 몰아부쳐서 곁에서 폭탄이 터져도
까딱도 하지 않을만큼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구하면 전체가
다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부처님을 자꾸 추측을 하고 더듬어 가려고하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모양을 만들어서 모양 없는것을 추구하다보니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수 없으니까 일부러 생각을 흔들어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염불하거나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하다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스러움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되고 습관화되어 갑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자꾸 익숙해져 가게 됩니다.

몇 시간을 서서 목탁을 치거나 소리를 내어 염불을 하거나 앉아서
화두를 들어도 피로하거나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편안해지면서 계획적으로 다듬고 만들어가던 생각이
조금씩 주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비를 넘어서게 될 때 불교에서말하는 삼매나 선정에 들게 됩니다.
이 상태는 의식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식이 홀연히 툭 떨어지면서 제3의 세계가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기도의 영험을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욕심을 간절하게 내어, '꼭 이루어지소서. 꼭 이루어지소서'하는
상태로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고비를 넘어서버려야 합니다.
한 고비를 넘어서야 기도의 영험이라고 하는것이
내가 생각지도 못하였던 쪽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속에 구하는 마음이 잔뜩 뭉쳐진 상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불교공부를 지어나가는 것을
옛날 시골장에 돼지를 팔러 가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요새는 교통수단이 좋아서 아무리 덩치가 큰 소나 돼지들도
트럭에 실어 가면 됩니다만,
1970년 이전만 하여도 형편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연, 시골 사람들이 큰 돼지를 장에 팔러 나갈 때는
지게에 지고 갈 수도 없고 하여 회초리 하나를 들고 돼지를 몰면서 갔습니다.
이 돼지가 논이나 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회초리로
톡톡 쳐서 그리 못 가게 하고 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만큼 길 가운데 쪽으로 가려고 하면 회초리로 톡톡 쳐서
길 가 쪽으로 몰고 가고...회초리로 요리 조리 몰아 10리 20리
밖의 장터까지 몰고 갔습니다.

내가 불교공부를 해본 결과, 그 공부의 방법이 회초리로
톡톡 쳐가면서 돼지를 먼 장터까지 몰고 가는 것과 똑 같은 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두공부를 하든 염불공부를 하든, 잔뜩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답답하니까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해라"고 하신 말씀에 집착이 생겨 버립니다.
또한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고 꾸지람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지 말아라, 공부 방법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해라" 하는
그 말씀에 또 집착이 생겨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애를 쓰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과 공간이 떨어져버리고 의식이 떨어져 나가는 제3의 세계가 체험이 됩니다.
이 체험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인간이 만든
시간으로,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목적지인 장터까지 회초리로 돼지를 톡톡 치면서 끝까지
몰고 가는 수밖에는 딴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드렸지만, 불교공부는 잃어버린
비단을 찾기 위해 돌장승을 두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따뜻한 봄날, 고갯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비단짐을 잃어버린
등짐장수는 원님에게 달려가 비단짐을 찾아 줄 것을 하소연하였고
현명한 원님은 묘안을 짜내었습니다.
원님은 등짐장수가 낮잠을 자던 자리에 서 있었던 동장승을
'도둑을 본 목격자'라 하면서 잡아들인 다음, 훔쳐간 놈이
누구인지를 이실직고 하라고 다그치며 곤장을 쳤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원님의 행동을 어처구니 없어하며 비웃었고
원님은 이들에게 법정모독죄를 뒤집어 씌워 옥에 가두도록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가족에게
'방면을 바라거든 비단 한 필씩을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가족들이 가져온 비단 속에는 등짐장수가 잃어버린 비단이
여러 필 들어있었고, 원님은 그 비단을 구입한 경로를 역으로
추적하여 진짜 도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돌장승을 잡아들여 매를 치며 재판을 하는 것은 미친 짓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미친 짓거리로 보이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추리를 하고
추리를 하여 결국은 비단 도둑을 잡아내게 된 것입니다.

?瀏【?불교공부는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비단을 찾기 위해 돌장승을 두드리는 것과 똑 같은 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동떨어진 짓이요 딴 짓입니다.
아무런 연관도 없고 뜻도 없는 영 엉뚱한 짓이고, 아무 것도
안 될 듯한 짓이다 이겁니다.
그러나 이 엉뚱한 짓이 시간, 공간을 초월한 제3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찾아가는 것은 전부 헛것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 내 마음' 이라고 자주 말하지만
실제의 '내 마음'은 모르고 있습니다.
'진심, 진심'하면서 한평생을 살아도,
혓바닥으로  '양심,양심'소리를 수만 번 하면서도,
내 양심, 내 진심은 도무지 체험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럼 언제 잠깐이라도 체험을 할 수 있는가?
법회시 큰스님께서 갑자기 '악'하고 할(喝)을 하면, 그 '악'하는
고함 소리를 들으며 깜짝 놀라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망상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 진심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수계를 받기 위해 연비를 할 때 '앗! 뜨거워'하는 그 생각뿐이지,
앞도 뒤도 없게 되는 그때 잠시나마 내 진심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백년을 산다고 해도 대부분이 망상 속이고 꾸밈 속이고
거짓 속일뿐, 진심이라는 것을 도무지 체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화두를 들든 절을 몇 천배를 하든,
전부가 거짓이고 꾸밈 속에 사는 것이지
우리의 진심 한 번 체험을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어떤 고비를 넘어가면서
제3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할 수 없이 좋든 나쁘든 자꾸 흉내라도 내면서 가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공부를 지어나가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업을 저지르고 과보를 받으면서도 공부하는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기적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나에게 1년에 한두 차례씩 꼭 찾아오는 어느 비구니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구니는 17세에 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사르고]를 읽고 환희심을 일으켜
결심 했습니다.

'나는 일엽스님과 같은 길을 가겠다.
출가하여 대해탈을 누리리라.'
그러나 20세가 가까워지자 아버지와 계모는 맞선을 보아 결혼할 것을 재촉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거나 말대꾸를 하지 않고 산 그녀였지만
이미 뚜렷한 결심이 있었기에 이 말씀만은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나는 비구니가 되고 싶습니다.
17세 때부터 이 결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를 절로 보내주세요."
아버지의 허락 없이 승려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를 설득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무가내였고 부녀 간의 골은 더욱 깊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방에서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빨리 부엌에 있는 식칼을 가져오너라.!"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하며
그녀가 식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년이 말을 안들으니까 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 아버지는 그녀의 멱살을 잡고 목에 칼을 들이대었으며
순간 그녀의 머리에는 번개불처럼 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결혼 흉내라도 내자.
그래야 아버지 곁을 벗어날 수 있다.'
그녀은 외쳤습니다. "아버지, 딸은 출가외인이지요?"
"'그래, 출가외인이다.""내가 시집가면 아버지가 내 일에 간섭 안 하지요?"
"그래, 안 한다." "그렇다면 시집 가겠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결혼을 하였고 3개월만에 집을 뛰쳐 나와
출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체 연락을 하지않다가 7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누워계셨고 계모는 무슨 병 때문인지
자꾸 하혈을 하여 곧 죽을 형국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간병해야 할 계모가 먼저 죽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병명은 말하지 않고,
'이상하다'며 7일 뒤에 수술을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비구니스님은 가족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7일동안 기도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절대로 수술을 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는 법당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어느 절을 찾아갔는데
법당 안에는 두 채의 빨간 좌복을 깔고 앉아계신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비구니스님은 밤낮 없이 목탁을 치며 지독하게 정근을 했습니다.
피곤도 잊고 잠 자는 것도 잊고 열심히 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여 마지막 날 새벽 2시 경이 되었을 때
비구니스님은 잠깐 목탁채를 놓고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부처님 밑에 받쳐 놓았던 빨간색 좌복이 뽀얗게 변해 있는 것이 었습니다.
'이상하다? 저 붉은색 좌복이 어찌 희게 보일까?'
가까이 다가가 만져 보았더니 이미 타버린 좌복은 소로록 내려앉았고,
부처님도 화끈거려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황급히 그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두 청년을 깨워 불상을 옮겼는데
놀랍게도 타들어가던 불탁자도 손상됨이 없었고 불상의 개금도 변질된 곳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날이 밝자 스님은 회향을 한 다음 계모를 찾아갔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계모의 병은 기적처럼 나아 있었습니다.
그 뒤 계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시중을 들었고
지금도 스님이 있는 토굴을 1년에 한 두 차례씩 다녀 가신다고 합니다.

알 수 없는 계모의 병, 그리고 스님의 기도와 완치!
붉은 좌복이 뽀얗게 타버린 것과 겉잡을 수 없는 하혈이 멈춘 것이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뚜렷이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진심의 힘이요
진심의 기적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심이라는 것을 체험하지는 못하였어도
거짓이든 꾸밈이든 억지로든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지장보살을 부르거나 주력을 하는 등 어떤 기도라도 있는 힘을 다해
몰아치면 비록 눈앞의 욕심이라 할지라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영험이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약삭빠르게 꾀만 피우면서 열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
실제 기도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언제쯤 되면 떨어지려는가? 이만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따지고만 있지 실제 기도는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자취가 있는 유위심(有爲心)으로 모양을 가지고
모양을 찾아가지만, 끝까지 그렇게 몰아 붙이고 나면 우리의 눈앞에
분명히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힘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하셔야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내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고마움을 알아야 하고
그분들에게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가족이 고맙고 주위분들이 고맙고 대우주가 고맙다'는
마음이 가득차서, 푸근한 고마움 속에 잠길 때가 되면 내 곁의
모든 모순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반대로 내 가슴 속에 불만이 가득하고 무언가를 구하는
마음이 샘솟고 욕심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 내 곁이
편안하지 못하고 내가 구하는 것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입춘이 지났지만, 옛 어른들은 입춘이 다가오면
보리 뿌리 한 가닥을 캐어 작은 쟁반에 올려놓고
입춘 시간을 재었습니다.
그런데 입춘 시각이 되면 틀림없이 보리 뿌리의 새 촉이 탁 틉니다.
이렇듯 대우주는 참으로 묘합니다.
동지 때에는 갈대를 태운 재를 상자에 담아 방안에 놓아 두는데
정확하게도 동지 시각이 되면 갈대를 태운 재가 날립니다.
이것이 바로 대우주의 회전으로, 새해의 기운이 열리는
첫 시각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우주의 변화에 맞추어 우리 주변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집안에 웃음꽃이 피고
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럼 과연 어떻게 변화해야 되는가? 무엇보다도 가족에 대한
내 마음이 달라져야 되고 말이 달라져야 되고 행동이
달라져야 됩니다. 지금과 같은 용심(用心)이나 말이나
행동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힘이 들더라도 '나'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부디 명심하십시오.
내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내가 흔들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아가면 됩니다.
내 업 때문에 내 가족이 힘들고 내 업때문에 내 가족이
애를 먹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언제나 새 기운을 불러일으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잘 단속하며 자꾸 흉내라도 내어 부지런히
공부를 지어가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리고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