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불(肉身佛) - 설봉 의존(雪峰義存.822-908)

2015. 6. 6. 20:0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육신불(肉身佛) - 설봉 의존(雪峰義存.822-908)

 

설봉대사의 휘(諱)는 의존이며 천주남안(泉州南安)땅 증씨(曾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독실한 불자 집안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사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 하였으며, 모든 냄새나는 음식이나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를 아주 싫어 했다고 한다.

 

갓난아기적에 부모가 그를 안고 절에 가면 범종소리를 듣거나 불상을 보면

반드시 거의 모습이 숙연해 졌다고 하는 걸로 보아도 그가 과거의 숙세(宿世)부터

어느정도 불법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를 대략이나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의 나이 열두살이 되자 아버지를 따라 포전에 있는 옥간사(玉澗寺)를 유람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경현율사(慶玄律師)를 뵙더니 문득 예배하고 말하길

"저의 스승님 이시군요." 하더니, 이윽고 그곳에 남아서 그의 시중을 들다가

머리 깎고 출가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후 그곳에서 회창 5년, 무종의 폐불사태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사도 예외없이 법난을 

피하려고 유생의 옷으로 변복하고 부용산(芙蓉山)에 주석하는 홍조대사(弘照大師)를

찾아가 배알 하였다.

 홍조대사는 그를 처음 보더니 기특하게 여기고 그를 어루만지면서 무너져가는 불법을

감당할 법기로 여겼으며, 대사는 그곳에서 6년을 머물면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며 지냈다.

그뒤 시간이 흐르면서 불법탄압이라는 법란이 약간 느슨해지자 북쪽 유주(幽州)에 있는

보찰사(寶刹寺)를 찾아가서 구족계를 받고서야 비로소 스님으로서 위엄과 형식을

빠짐없이 갖출 수 있었다.

 

그 뒤론 오랜 세월동안 천하에 산재해 있는 선원들을 편력하고 더러는 선지식들을

참배 하면서 본분사를 빈틈없이 참구 하다가 덕산(德山)의 처소에 도착하여 비로소

그와 인연이 일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도를 이루고 나서 함통(咸通) 년간에

남쪽 지방에 있는 설봉산으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절을 개창하자 사방에서 제자들이

법을 구할고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고 한다.

 

대사는 이곳에서 불법의 오묘한 법륜을 굴리며 그 깊은 종지를 오랫동안 드날렸으며,

이 때 그를 찾아 모여든 청법대중들이 항상 일천오백명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대사의 법력과 교화가 어느정도 성대 하였는지를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겠다.


당시의 의종황제는 대사의 그러한 높은 도덕과 성대한 교화를 흠모하여 진각선사

(眞覺禪師)라는 호와 자가사(紫袈娑. 자주색 가사)를 하사하여 대사를 극진한 예로써

정중하게 예우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 가면서 어떤 넘지 못할듯한 사고의 벽을 어느순간 홀연히

타파하여 해묵은 숙제가 일시게 풀리는 계기가 있게 마련인데, 그러한 계기를

불교에서는흔히들 기연(機緣)이라고 말한다. 기연이란 모든 사람들 개개인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적 조건을 말한다. 선사들이 도를 깨닫는데도 의외는 아니어서 그들이

도를 깨닫는데는 반드시 어떤 상황적 계기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대사는 전국의 선원을 편력하고 선지식을 참배하러 다니는 수행과정에서 어느날은

동산에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대사는 부엌에서 밥을 지어 대중들에게 공양하는

공양주의 책임을 맡았었다.

 어느때나 다름없이 하루는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는데 마침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산대사는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쌀을 씻으면서 모래를 골라내어 버리느냐, 아니면 먹을 쌀을 버리느냐"

그 말을 들은 대사는

"모래와 쌀을 동시에 버립니다." 라고 대답하자, 동산대사는 다시 말하였다.

"일시에 다 버리면 대중들은 무얼 먹고 살라구..."

설봉의존대사는 그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쌀항아리체로 번쩍 들어서 땅에 엎어 버렸다.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본 동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득도할 인연은 나에게 있지 않고 덕산에 있어야만 하리라."

이 말에 따라 대사는 동산을 하직하고 그의 나이 43세에 덕산을 찾아가

그에게 예배를 올리고 물었다.

 

"부처님 이후 위로부터 전승해 내려오는 종승사(宗承事)를 저도 배울 분수가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덕산은 손에 쥐고 있던 주장자로 대사를 한번 후려치더니 말하였다.

"무슨 말을 하느냐"

대사는 "모르겠군요" 하고는 다음 날에 이르러 다시 법문을 청 하였더니 덕산은 말 하였다.

"나의 종지(宗旨)에는 차별적이고 허구적인 언어문구란 없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부여 해 줄 만한 실제하는 한 법도 없다네."

그 말을 들은 대사는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다.

 

그 뒤 암두스님과 길을 가다가 풍주(楓州)의 오산진(鼇山鎭)에 이르렀는데 마침

폭설이 내려 길이 막혔다. 그곳 여인숙에 머물면서 암두는 매일같이 잠만 자고 지냈으며

그와는 달리 대사는 한결같이 좌선을 하였다.

 

좌선을 하던 그가 하루는 자고 있는 암두스님을 부르면서 말 하였다.

"사형, 사형, 일어 나십시요."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암두는 말 하였다.

"무어하려구."

"금생에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부질없는 문자나 깊이 있게 익히는 놈이 되어 수행하러

가는 곳마다 상대방에게 마음이 걸리게 될 것 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계속하여 잠만 자다니요."

암두는 "할"하고 소리치더니 그에게 말 하였다.

"침상 위에서 매일같이 졸고 앉아 있는 모습이 흡사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모셔진

뻣뻣한 토지신과도 같구려. 다른날 그대는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이게 되리라."

 

대사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이 두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말하였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아직도 마음이 안온하지를 못 합니다. 때문에 감히 태만하게

지나지를 못하는 것 입니다."

암두는 말 하였다.

"나는 그대가 훗날 외로운 산봉우리 정상에서 초가암자를 짓고 불법의 큰 가르침을 

전파하리라고 여겼더니 오히려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저는 정말로 마음이 안온하질 못 합니다."

"정말로 이와 같다면 그대가 보았던 곳에 의거하여 낱낱이 말을 해 보라.

그 가운데서 옳은 곳은 옳다고 증명해 주고, 옳지 않은 곳은 제거해 주리라."

 

그러자 대사는 말 하였다

"내가 처음 염관(鹽官)에 이르러 그 가 법당에 올라 색공(色空)의 의미를

거량(擧楊)함을 보고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 이 이야기는 평생토록 다시는 거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또 동산대사의 오도송인 과수송(過水頌)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이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였더군요."

 

상대방에게서 찾는 마음 간절히 조심하라

아득히 멀어 나와는 소원하리라

그가 지금은 바로 나이지

나는 지금 그가 아니라네 라고

 

"이처럼 했다간 자신의 구제도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그 뒤 덕산스님을 찾아가 한 방망이를 맞았을 땐 그 경지가 마치 통밑이 쑥빠진듯

시원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암두는 "할"을 하더니 말 하였다.

"그대는 듣지도 못하였더냐. 무엇이든 문을 따라 버젓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물건은 집 안의 보배가 아니라는 말을."

"그가 들어간 뒤엔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그가 문안으로 들어간 뒤에 만일 큰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한다면 낱낱이 자기

마음에서 흘러나와 나에게 가져와야만 그 기상이 천지를 덮게 되리라."

이 말을 들은 대사는 순간 대오하여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암두에게 예배하고는

연이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형, 오늘 오산진에서 비로소 도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수행의 기연을 겪고서야 번뇌의 무거운 짐을 풀어버리고 절대

해탈한 안락인이 되어 기울어가는  당나라 말기 선종사를 기사회생시킨 탁월한

거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길고 긴 수행의 여로를 끝낸 대사는 다시 남쪽 설봉산으로 되돌아와 그 곳에

개산하여 후학들을 제접하고 불법을 천양하기를 종신토록 하였다.

 

대사는 특히나 시를 짓는데도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많은 시가 그의 어록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희자되고 있는데,

그중 설봉산의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한 시 한수만을 여기에 소개해 보겠다.

 

기이한 봉우리 ?인 눈에 부용산 은둔하여

그 모습 그림과 물감으로 묘사함 아니라오

비개인 날 멀리 세 섬 위에 떠 있는 달 조망하니

차거운 달빛에 항상 사시의 겨울을 보이네


신선이 사는 곳 꽁꽁 얼어 길을 찾지 못하는데

옥같은 나무에 피어난 꽃 소나무와 어울렸네

스님은 상방(上方)의 은빛 세계에 머무는데

허명한 그림자 속에 범종소리 드문 드문 

 

양나라 태조황제 개평(開平)원년 정묘에 이르러 대사의 나이가 86세가 되었다.

그 때 대사는 자신의 육신을 봉안할 탑의 모양을 스스로 그리고 설계하여 사람을 시켜

그 설계도를 민왕에게 바치라고 하였다. 설계도를 받아 본 민왕은 사신을 강서 지방의

서적산(瑞迹山)으로 보네어 그곳에서 좋은 석재를 골라오게 하여 대사의 탑과 영정을

모실 영당(影堂) 세 칸을 건립하라 하고, 대사에게 관으로 쓰일 감실(龕室)을 조성해 주었다.

 

대사의 나이 87세, 그해 3월에 이르러선 약간의 병을 보이자, 민왕은 의사에게 진료하고

보살피라고 명령 하였다. 이에 대사는 말하였다.

"나는 병이 들지 않았다"하고 끝내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4월 15일에 대사는 법당에 낮아 유언을 남기면서 말 하였다.

"물거품이나 허깨비처럼 실제의 모습이 없이 인연으로 생기한 몸은 오고 감이 일정하지 않다.

이 문제를 근 사십년간 여러분들에게 설법하면서 고구정영하게 권하지 않은 일이 없다.

요사이엔 불법이 얄팍하여 세상일인 신심으로 시주하는 신자들에게만 은근히 할 뿐이다.

그리하여 중들이 일생을 마치면 그들 은혜에 보답할 만한 선행이라곤 없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와 서로 호응하지 못하므로 여러분은 이점 약간의 반성이 있어야 하리라.

나의 사대(四大)가 흩어지는 날엔 먼저 이미 나무관과 석탑의 감실을 준비해 두었으므로

이 모두를 원래의 뜻대로 따라서 배치해야지, 나의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

만일 수건을 펴고 눈물을 뿌리는 자는 나의 권속이 아니다."

 

그 말씀을 들은 대중들 모두가 대사의 명령을 받들어 그렇게 따르겠노라고 함께

맹세 하였다. 석탑의 조성이 거의 끝날 무렵 서쪽 감실의 덮개를 아직 갖추지 못하였는데

그날 밤 사나운 비바람이 우뢰를 동반하여 골짜기를 진동하며 흔들렸다.

그 비바람 때문에 언덕위의 땅이 홀연히 진동하며 균열이 생겨 그 폭이 한발 남짓

하였는데 마치 숫돌처럼 그 위치가 평평하였다.

그곳을 이용하여 준비된 탑재를 들어서 안치 하였더니 함과 덮개가 서로 꼭 걸맞아

그것을 보는 사람들 모두가 기이하게 여겼다.

 

5월 2일에 이르러 대사는 손수 백여 단어의 편지를 써서 민왕을 이별하고, 아침에 잠시

유행하다가 저녁에 되돌아와선 목욕을 하였다. 그리고 이날 밤 여덟시에 이르러 우측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 고요한 열반의 세계를 따르시니, 그의 세수는 87, 법납은

59세 였다. 이달 15일에 이르러 대사의 전신을 화장하지 않고 미리 준비된 탑 속에

봉안 하였다.

 

그는 39년간 설봉산에서 교법을 전개 하였으며,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는 우리들의

귀에 익숙한 현사사비.장경혜적.운문문언 등이며, 이들이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독특한 설봉종풍을 드날렸다.

 

설봉의존 선사가 태어나서 생존했던 시기는 당나라 역사상 가장 큰 격변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여 중앙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각 지방의 군벌들이

발호하여 끊임없는 세력 확장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송나라의 이전인 오대(五代)의

시대를 이행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후세 중국 학자들은 이 시대를 중국 역사상

도상문폐(道喪文弊)의 극치를 이루었던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불교사적으로는 중국불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가운데

하나인 당나라 무종(武宗)의 회창(會昌)5년 법난사태가 있었다. 또한 황소의 난도 있었다.

 

이처럼 시대가 혼란하고 불교가 극심한 탄압으로 끊어져 가던 불법의 혜명을 이어

후대에 법맥을 전승 오늘날까지도 끊기지 않게 한 의존선사야 말로 일대사인연

(一大事因緣)을 위하여 세간에 출현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