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臨濟錄)/무비스님 강설

2015. 6. 6. 20: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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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臨濟錄)』무비스님 강설

 

 

 

 

시중(示衆)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의 目前現今聽法底人하야

入火不燒하며 入水不溺하며 入三塗地獄호대

如遊園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하나니

緣何如此오 無嫌底法일새니라.

 

?若愛聖憎凡하면 生死海裏沈浮하리니 煩惱由心故有라

無心煩惱何拘리오 不勞分別取相하면 自然得道須臾니라

?擬傍家波波地學得하면 於三祇劫中에 終歸生死하리니

不如無事하야 向叢林中하야 牀角頭交脚坐니라.

 

《해석》

“오직 도를 배우는 벗들의 눈앞에 법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악도의 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정원을 구경하며 노는 듯하고,

아귀 축생에 들어가도 그 업보를 받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法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은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아서 생겨나는 것이니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사람을 구속하겠는가?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느라 헛수고하지 않으면

저절로 잠깐 사이에 도를 얻을 것이다.

 

그대들이 분주하게 옆 사람에게 배워서 얻으려 한다면

삼 아승지겁 동안 애를 써도 결국은 생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강설》

모든 사물은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없다. 물에 빠져서 젖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말을 하고 말을 듣는 이 사람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빠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정원을 거닐며 구경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다.

축생이나 아귀에 들어가도 그 축생이나 아귀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道는 꺼려할 것이 없는 法이기 때문이다[無嫌底法].

 

물론 좋아할 것도 없는 法이다. 보고 듣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무슨 차별이 있는가.

아하고 싫어할게 어디 있는가.

그래서 혜능조사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取捨選擇하지 말고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훤하게 밝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다.

성불이고 견성이고 열반이고 깨달음이고 조사고 부처님이다.

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이다. 너고 나다. 삼라만상이고 우주만유다.

 

선이라고 좋아하고 악이라고 싫어한다면 좋고 싫고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분별이 있게 되어 사랑과 미움이 있게 된다.

편견과 치우침이 있게 되어 양변에 떨어진다.

편견과 치우침으로 양변에 떨어지면 그것이 곧 삼악도다.

지옥이다. 윤회다. 불에 타고 물에 빠지는 일이다.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고 탐욕의 물결에 떠내려간다.

물과 불에 반복하여 윤회하게 되며,

아귀와 축생에 끌려 다니며 윤회하게 된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主體가 되지 못하고 從이 되어 끌려 다닌다.

타인이 손해를 입히고 비방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리고

모함하는 일에 휘말린다.

그런 일에 따라다니며 윤회하게 된다.

하루 종일 시시비비에 떠다닌다.

그래서 나는 없다. 온통 남이다.

경계뿐이다.

 

산은 산, 물은 물대로 그대로 두고 보라.

장미는 장미 목련은 목련 그대로 두고 보라.

밤나무는 밤나무 감나무는 감나무 그대로 두고 보라.

눈앞에 벌어진 온갖 현상들에 쫓아다니지 말고 주인이 되라.

그러면 어디서나 행복하리라.

이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상대적 편견에 떨어진 온갖 이론들을

애써 배우느라고 삼 아승지겁 동안 돌아다니느니 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않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入火不燒(입화불소)하며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生死海裏沈浮(생사해리침부)하리니 煩惱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라.

 

‘唯有道流(유유도류)의 目前現今聽法底人(목전현금청법저인)하야 ’,

그 주체성이라고 하는 것, 그게 뭐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임제스님은 바로바로 드러내 보여요.

오직 그와 같은 당당한 삶의 주체는

오직 여러분들의 目前(목전) 또 現今(현금), 지금, 지금 눈 앞에서

聽法底人(청법저인), 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겁니다.

 

내가 가끔 말씀드리죠. 지금 말을 듣고 있거나 말을 하고 있는 이것,

들을 줄 아는 그 事實, 그 能力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여.

비구도 아니고 비구니도 아니여. 아무런 조건이 필요치가 않아.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을 초월해, 승속을 초월해 있는 거요.

그러니까 그것을 가만히 우리가 사유해보면

‘入火不燒(입화불소)’, 불에 들어가도 그 사실은 타지 않는다는 거.

이게 지금 비구로서나 비구니로서 듣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참 신기한 존재에요. 듣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은 무슨 조건으로 듣고 있어요?

아무 條件 없이 本來로 생긴 그 모습 그대로 활발발한 그 當體야.

 

이게 우리가 흔히 마음이니 佛性이니 自性이니 法性이니 이런 表現을 쓰는데,

이게 우리 마음에서 思量으로라도 짐작이 되어져야

그게 자기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설명을 드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 事實은 절대 이건 그 무엇도 아니야.

무슨 조건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니까 불하고 아무 관계없는 것입니다.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이다.

 

‘入水不溺(입수불익)하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를 않는다.

왜 안 그렇겠어요?

이것은 물이라고 하는 조건도 아니고 불이라고 하는 조건도 아니니까.

 

‘入三塗地獄(입삼도지옥)하대’, 삼도지옥에 들어가도,

‘如遊園觀(여유원관)하며’, 저기 놀이공원에서 노는 거와 같애.

예를 들어서 형법에 걸려 가지고 형무소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아무 죄 없이 형무소에 들어갔든지 죄가 있어서 들어갔든지 간에.

몸은 수갑에 채워져서 형무소 철장문 안에 갇혀 있지만

그 當體 , 그것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거야.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그건 철장에 가둘 수 없고 수갑에 채워지는 것도 아니여.

그러니까 삼도지옥에 들어가더라도 마치 놀이동산에 노는 거와 같애.

 

‘入餓鬼畜生而不受報(입아귀축생이불수보)하나니’,

아귀축생에 들어가더라도 그 報를 받지를 않나니

‘緣何如此(연하여차)오’, 어째서 그와 같으냐. 무엇을 인연해서 이와 같으냐.

‘無嫌底法(무혐저법)일새니라’, 싫어할 수 없는 法, 싫어함이 없는 法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선악이 떠난 法이다, 떠난 道理다 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을 超越한 存在다.

남녀를 초월해 있고 승속을 초월해 있고

동서를 초월해 있고 일체를 다 초월해있어.

그래서 생사까지도 초월해 있는 그 자리다.

 

‘?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할 거 같으면 ‘生死海裏浮沈(생사해리부침)하리니’,

생사의 바다 속에서 가라앉았다 떴다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지 그 이름뿐이고

범부라고 하는 것도 그 이름이에요.

범부도 성인도 아니여. 그저 사람이 있을 뿐인데 거기에 우리가

이름을 지어놓고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마음이 생긴 거죠.

그런 말을 쫓아다니다 보면 끊임없이 生滅에 놀아나고 있는 거죠.

 

生死海裏(생사해리)에 浮沈(부침)하리니, ‘煩惱由心故有(번뇌유심고유)라’,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있다.

우리 마음이 범부니 성인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이름

끄달리지 아니하는 것은 그야말로 동요가 없다는 뜻이고(不動心)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生滅心이라.

 

‘無心煩惱何拘(무심번뇌하구)리오’, 번뇌는 전부 마음을 말미암아 있는데

만약에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마음을 구속하리오.

‘不勞分別取相(불노분별취상)하면’, 수고로이 分別해서 相을 取하지 아니하면

‘自然得道須臾(자연득도수유)니라’, 저절로 그러하게 道를 터득하는 것이

잠깐 사이에 될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는 세상을 分別하고 取相, 상을 취하는데

그것을 분별해서 상을 취하지 않기가 너무 어렵죠.

그거만 안한다면 현재 이 자리에서 그냥 다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擬傍家波波地學得(이의방가파파지학득)하면’,

그대들이 傍家(방가), 옆집으로, 자기 자신을 놔두고, 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놔두고 波波地學得(파파지학득)이라,아주 바쁘게 배워서

얻으려고 한다면 ‘於三祇劫中(어삼지겁중)에’, 삼아승지겁 가운데서도

‘終歸生死(종귀생사)하리니’, 삼천 아승지겁이 지나면서 닦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생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죽고 살고 하는 이런 虛妄한 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랬습니다.

 

이 傍家(방가), 이게 중요한 거죠. 나 말고 나 이외의 다른 옆집,

經典이 됐든지 그 외 어떤 現象이 됐든지 간에 나 아닌 다른, 내 라고 하는

主體性을 두고 달리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結局 삼아승지겁 동안 닦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生死의 윤회로 돌아가고 만다.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일 없음과 같지 않아서,

‘向叢林中(향총림중)하야’, 총림을 향해

‘牀角頭交脚坐(상각두교각좌)니아’, 선상 위에,

상각두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는 선상 위에 앉아서 공부하니까

선상 위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세상을 지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총림에 들어가서 무심하게 좌선하고 있는 모양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참 바른 소견을 드러내는 입장에 있어서는

아주 뛰어난 가르침이죠. 

 

 

 

 

 

 

어머니의 쑥개떡 / 겨울나무감산 



팔순이 넘은 나의 노모는 봄이 되면
자식들 주겠다고 봄쑥 뜯어 놓았다가
쑥개떡을 만들어 주신다
이 떡 몇 번이나 자식들 입에 넣어 주시겠냐며

힘들어도 만드신단다


 

노모는 봄을 먹이려 하신걸까
자식의 어린 시절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한

미안함을 갚으시려 한걸까
남은 생으로 자식들 위해 아직도 해줄 것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시는 걸까
이 일만큼은 어미의 유일한

생존의 의미로 여기시는 걸까

 

노모의 손은 아직도 자식들 입에 머물러 있다
노모의 손은 아직도 분주하다
노모의 손은 봄햇살만큼 따뜻하다
노모의 손만큼은 서럽게 싱싱하다

어머니
이 떡 몇 번이나 더 먹을 수 있을까요
떡을 집는 나의 손은 흔들리고
내 입은 노모의 손을 삼키고
내 입안에는 어머니의 쑥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