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좌(跏趺坐)의 여러 가지 형태(形態)

2015. 8. 29. 18: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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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좌(跏趺坐)의 여러 가지 형태(形態)

 

반가부좌(半跏趺坐, 반가좌半跏坐, 반가半跏)

왼쪽 다리를 구부려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얹고 앉거나, 혹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를 말한다. 전가부좌(全跏趺坐)를 여래좌(如來坐)라고 하는 데 반해 보살좌(菩薩坐)라고도 한다. 또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누르고 앉는 것을 길상좌(吉祥坐), 오른쪽 다리로 왼쪽 다리를 누르고 앉는 것을 항복좌(降伏坐) 또는 항마좌(降魔坐)라고 한다.

 

결가부좌(結跏趺坐, 전가부좌全跏趺坐, 본가부좌本跏趺坐)

가(跏)는 발바닥, 부(趺)는 발등을 말한다.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놓고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그 반대의 길상좌(吉祥坐)가 있으며, 부처는 반드시 이렇게 앉으므로 불좌(佛坐) ·여래좌(如來坐)라고도 한다.

 

 

 교각좌(交脚坐)

의상(倚像)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양 다리를 교차시킨 자세이다. 인도에서는 천인(天人)과 속인(俗人)이 앉는 방법으로 그 기원이 오래되었으며 간다라 보살상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특히 남북조시대 때 유행하여 주로 미륵상으로 많이 나타나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 신라시대의 성주 노석동 마애불상군의 오른쪽 협시보살상이 유일한 예로 알려져 있다.

 

 

윤왕좌(輪王坐)

한쪽 다리는 결가부좌하고 다른 한쪽 다리는 무릎을 세우고 편안하게 앉은 자세이다. 전륜성왕( 轉輪聖王)의 좌법으로 왼손은 왼쪽 다리 뒤로 기대고 있는데 반하여 오른손은 무릎 위에 걸치고 있 기 때문에 불상의 상체가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에서는 사자후관음이나 문수보살이 주로 이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중국에서도 북위시대부터 시작되어 그 예가 상 당히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형식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상 등 고려시대 불상에서 간혹 나타난다.

 

 

반가사유좌(半跏思惟坐)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반가(半跏)],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사유(思惟)]의 보살상을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라고 일컫는다. 이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였던 시절에 나무 아래에서 인생무상에 대하여 깊은 사유에 잠겼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질 때는 교각미륵보살상과 함께 관음보살로서 여래상의 협시보살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처음 나무 아래에서 사유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태자사유상이 북제·북주시대에 많이 만들어지다가 차츰 나무의 표현은 사라지고 독립된 형식으로 만들어져 반가사유상 혹은 사유상으로 정착되어 한국과 일본에 전해졌다.

 

 

선가부좌(善跏趺坐)

의자에 걸터 앉은 자세

  * 성불하소서.

 

 

 

 

The Letter To Chopin 쇼팽에게 보낸 편지 


저녁 노을이 들판에 누울때면 
빛과 어둠의 옷을 입은 네가 찾아오지
저녁 안개 속에서 나를 맞는 것은
풀잎의 바스락대는 소리와 물의 반짝임이라네.
 

바람에 실려 온 봄 노래가
대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네.
그 음은 투명하고 맑으며 귀에 익고 정겹네

마치 고향 처럼 은하수로부터 밤이 밀려와
반짝이는 장미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네. 
 

하지만 이 곳을 떠나기 전에
포도주 같은 네 음악에 흠뻑 취하고 싶네.
내 마음 속에는 너의 멜로디가 남아있네. 

 

 

 

시간 없는 곳에서 시간이 나왔고, 움직임 없는 곳에서 움직임이 나왔으며,

말 없는 곳에서 말이 나왔다. 바로 지금 이렇게 드러나 있다!

약삭빠른 여우처럼 이 앞에서 헤아린다면 몸과 목숨을 잃을 것이요,

오직 눈 먼 거북이 같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 일은 입 열기 이전에 이미 그르쳤고,

한 생각 움직이기 이전에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말과 글로 전하는 가르침 바깥에 별도로 가르침의 길을 열어 놓았으니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귀로는 들을 수 없고, 입으로는 말할 수 없고,

손으로는 잡을 수 없고, 몸으로 느낄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말과 글이 아닌 가르침은 돌멩이에서 꽃을 피우고,

바다 속에서 번갯불을 일으킬 수 있어야 비로소 배울 수 있다.

그러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잡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모든 것이 바로 그 가르침이다.

언제나 그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베껴 쓰고

남에게 전하여 주는 일을 일찍이 그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반야다라 조사가 늘 읽고 있는 이와 같은 경전이다!

이와 같이 보고 있고, 이와 같이 듣고 있고, 이와 같이 말하고 있고,

이와 같이 움직이고 있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고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이 이와 같을 뿐이다.

달빛 아래 무심한 물소는 뿔에 그대로 달빛의 무늬를 새기고,

아무 생각 없는 나무 말은 어떤 분별의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법이다.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어찌 수고로이 종이로 된 경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겠는가?

밝고 깨끗한 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으며,

온갖 분별과 망상을 단숨에 때려 부수고 생각과 감정을 뚫고 나간다.

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이것,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이것이 바로 지금 이렇게 신령스럽게 작용하고 있다.

눈앞을 바로 보라!

바로 지금 여기 이것이 한산이 잊어버린 왔던 길이요,

습득이 손을 맞잡고 돌아가는 곳이다. 바로 지금 이것이다!

- 몽지님의 종용록 법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