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의 삭발과 부처님의 머리카락 / 선용스님

2015. 8. 22. 20: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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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삭발과 부처님의 머리카락 / 선용스님

 

 

삭발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원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부터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부처님께서 사문유관상에서 북쪽에서 만난 삭발한 수행자를 통해

괴로움을 벗어나는 수행자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을 일으키셨다는

기록이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 출가 이전 부터 삭발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큰 절에서 하는 삭발은 요즘 같이 사찰안에 목욕탕

시설이 잘 갖추어진 경우와 달리 예전에는 목욕탕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주로 큰 방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목욕날이면

욕두(목욕물 준비하는 소임)스님과 하판(출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랫스님)스님들이 함께 따뜻한 물을 미리 데우고 삭발할

물을 큰 방으로 떠와서

 

큰 방안에 세수대야와 삭발도구를 준비하여 놓고 종을 울려

대중들에게 삭발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고 대중이 운집하면

어른 스님들부터 차례로 앉아서 무릎위에 수건을 덮고 머리를

감으시면 하판 스님들은 어른스님들 앞에서서 합장하고

 "삭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어른스님들의 머리를 삭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 중에서 가장 난감한 경우는 삭발을 하다가 잘못하여 피를

흘리게 하는 경우입니다. 실수를 하여 피를 흘리게하면 어찌나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픈지...  하지만 앉아계시는 어른 스님들은

괜찮다고 아픈 마음을 풀어주시려 자비로써 위안를 시켜주시는

 모습들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본시 삭발할 때는 잡담도 못하게 하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삭발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삭발이 끝나면

머리에 물을 끼 얹어 비눗물을 씻어 드리고

 "잘 못 됐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면 어른 스님들은" 성불하십시오"라고 답례를

하는 것이 상례였답니다.

 

그리고 삭발목욕일에는 으례껏 찰밥과 미역국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관례화 되어 있습니다.

 

스님들이 머리를 깎는 것과 일반인들이 머리를 깎는 것은

용어에서부터 조금차이가 나죠, 일반인이 머리를 깎는 것은

아무리 대머리로 왕창 깎아도 <이발>이라고 부르고 스님이

 머리를 깎는 것은 <삭발>이라고 하니까요^^

 

 

 

부처님의 상호가 삭발이 아니라 곱슬이나 물결머리 형인 것도

의문을 가질만하다.

부처님 32상호 중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은

곱슬머리를 말한다. 이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부처님 입멸 후 500여년이 지난 뒤 처음 탄생한 불상은

그리스 미술의 산물이다.

그래서 당시 불상은 그리스인들의 물결모양의 머리형을 하고 있다.

영웅이나 성자의 머리를 물결 형으로 조각하는 간다라 미술의

영향으로 부처님만의 독특한 상호가 생겨난 것이다.

후대 제자들이 인도에서 죄인들의 머리형인 삭발을 부처님에게

적용하기 난감했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위 부분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위에 글들은 주로

불교학자들이 추상적으로 유추하거나 학문적으로 접근하면서

만들어낸 이론이라고 여겨지는데,

 

불경에는 부처님의 32상인 머리결에 소라같은 머리결이

오른쪽으로 감아 돌고 그 빛은 검푸르다라고 나와 있는

대목이 있는데, 이러한 상호는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만들어진 상호가 아니라

 

인도에서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성자나 전륜성왕의 상호가 바로 32상이었으며

이러한 관상술이 오랜 세월동안 전해져 내려왔는데,

부처님 역시 이러한 32상을 성불하신 뒤에 갖추신 것이 아니라

이미 탄생하시면서 갖고 태어난 상호라고 기록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아시타선인이 성자가

탄생하심을 알고 궁으로 찾아와서 싯달타태자를 뵙기를

청하였을 때 이미 32상을 갖추었다고 경전에 기록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부처님의 머리결은 결코 후대

그리이스 미술의 산물이라고 볼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또 후대 제자들이 죄인들의 산물인 삭발을 적용하기 어려웠다고

해석하는 것도 전혀 불교 경전을 이해하지 못한 학자들의 억지

논리라고 보여지는 것이니 우리 불자님들이 스스로 부처님의 32상을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부처님의 머리 카락은 왜 삭발형이 아니고 오른쪽으로

감아돈 나발형의 머리카락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으로 추측하여 보자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출가시에는 삭발을 하고 수행을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계속된 고행으로 6년 고행 기간에는 부처님 머리위에 새가

둥지를 틀기도 하였다고 경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고행시기 이후에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처음 삭발한 머리를 계속해서 삭발하였다고 볼 수 없으며,

 숱한 고행을 통해서 길어진 머리 카락을 지닌 채 나중에 고행을

중단하고 홀로 사유를 통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을 당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아마 지금 불화에 나오는 그런 나발형의

감청색 머리가 아니었겠나하고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출가 수행자들에게 삭발을 하라고 하신

이유는 부처님께 직접 여쭤보기 전에는 정답은 알수 없지만

제 나름대로의 답은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불자님 또는 일반인들도 항상 궁금해하고 차마 묻지

못하는 스님들의 삭 - 발,

 

왜 스님들은 삭발을 하실까?

 

스님들이 삭발을 하는 이유는 바로 수행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님들이 머리를 기르고 있다면, 여러가지로 수행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마음이 해태해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면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가면

어떻게 스님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머리를 기르고 있다면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나쁜 행동들을

마음껏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분율에 보면 부처님께서 스님들에게 머리에 천 같은

것을 덮어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차도르라는

 망또 같은 천으로 몸을 감는 것으로 옷을 삼는데 만약 그 차도르로

머리를 뒤집어 쓰고 다니면 스님인지 속인인지 분간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스님들에게 분명하게 스님의 표시인 삭발한 머리를

내 놓고 다니라고 하신 것이지요.

 

또 만약 삭발을 하지 않고 머리를 기른다면 머리를 감고 빗고

 모양을 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입니다. 그렇다보면 결국

진짜 마음 공부는 저만치 멀어지고 무상하고 허망하기 짝이없는

겉치레에 치중하여 허송세월을 하게 될 것이니까요.

 

또 머리를 기른다면 결국 남자와 여자의 경계가 분명할 것입니다.

스님들은 수행자로서 이미 남자나 여자의 경계를 넘어선 청정한

 금욕 수행을 생명으로 하는데 머리를 길러 남자 같은 모습 여자

 같은 모습을 한다면 생각 부터가 이미 남녀를 구분하는데 어찌

분별심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삭발을 하는 것이라고 저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머리를 기르면서 스님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인 불교를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

원공법계제중생자타일시성불도

 

 

 

 









 

 


  감사하면 스트레스 이상 무!             이시형

 

 

우리 정신의학에서는 ‘스트레스의 대가’ 하면
한스 셀리(hans seyle-내분비학자)라는 분을 듭니다.
이분은 1958년도에 스트레스를 통해서 노벨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캐나다 분인데, 이분이 고별 강연을 하버드 대학에서 했습니다.

제가 그때 마침 그 대학에 있어서 정말 아주 감동적인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 하버드 강당에 백발의 대가 노교수들이 빽빽이 들어섰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내려가는데 웬 학생이 길을 막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스트레스 홍수 시대를 살아야 하는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비결을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 그러자 이분이 딱 한 마디를 말했습니다.
“Appreciation!” 감사하며 살라는 그 말 한 마디에 장
내는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여러분, 감사만큼 강력한 스트레스 정화제도 없고,
감사만큼 강력한 치유제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종교인이 장수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종교인들이 범사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이나 하찮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 자세가 종교인이 장수하는 비결로 의학에서는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속에는 미움, 시기, 질투가 없습니다.
참으로 편안하고 마음이 그저 평온하면서 또 우리가 뇌
과학적으로 말하면 이러는 순간 세로토닌이 펑펑 쏟아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로토닌이 건강체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감사라는 것이 인간을 그저 편안하게 하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감사기도입니다.

여러분, 기도라는 게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게 되겠습니까?
고생하는 아내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또 이른 봄부터 밭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에게도 우리는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요즘 가끔 길에서 저의 동년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힘든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동지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보, 노형 당신이 용케 살아남았구려.” 이렇게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고, 그렇게 고마운 것입니다. 동지애 같은 느낌이 듭니다.

힘든 세월을 우리는 참으로 땀 흘려 가며 죽어라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된 것이지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침마다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의 기도문을 꼭 외웁니다.
이분은 ‘홍당무’를 지은 작가입니다. 신체가 허약해서
 아침마다 이렇게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인생은 참 아름답다.”

저는 이 기도를 들을 때마다 제 몸에 한없는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내 발로 이렇게 대지를 버티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생활을 어느 한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아침에 제 발을 주무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발이 제일 고생을 하니까.

“수고했다. 고맙다. 조심할게. 잘 부탁해.”
저는 정말 진심을 담아서 발을 주무르면서 내 발에게
부탁을 드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내 몸에도 감사를 드려야 되겠지요?
이렇게 감사할 일을 찾아보십시오. 지천에 널린 것이 감사뿐입니다.
정말 감사를 생활화하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