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를 길들일 수는 없다 / 릴라 임순희

2015. 9. 12. 23: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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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를 길들일 수는 없다 / 릴라 임순희

<심우도(尋牛圖)>는 불교 선종에서 본성을 깨닫는 과정을 소 찾는 것에 비유하여

소개한 그림입니다. 선수행의 단계를 소와 동자를 출현시켜 10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어서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합니다.

동자가 깨달음의 마음을 내고 소를 찾아 떠납니다.

우연히 소의 발자국을 보고 그 자취를 따라가다가 소를 보고 잡습니다.

야생의 소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동자는

채찍과 고삐로 소를 길들인 후 소 등에 올라타서 유유자적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채찍과 고삐도 놓아버리고 소도 사라지고 동자도 사라져

텅빈 공간만 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자연그대로의 상태로 환원하며 이후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깨달음을 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미혹에서 벗어나는 꿈의 여정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과 간단한 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공부 하는 이들에게 대략 마음공부의 내적 여정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많은 이들의 공부 여정에 훌륭한 안내가 되고

있습니다만, 자칫 오해의 소지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견우(見牛) 즉, 소를 본다는 것은 본성을 체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소를 잘

길들여 나가는 것(得牛, 牧牛)은 분별없는 본성에 익숙해진다는 뜻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동자가 소를 길들인다'는 것은 오해될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본래 완전한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나'라는 분리에서 시작되기에

'동자(나)가 소를 본다', '동자(나)가 소를 잡는다', '동자(나)가 소를 길들인다'는 것은

오히려 '나'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성을 보고 얻고 길들인다는 입장에서 체험이후의 공부를 해나간다면

적지않은 혼란과 장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본성을 보고 얻고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되어 본성이 저절로 드러나 밝아지고 이 과정에서

'나'라는 자의식이 소멸되는 과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본성을 체험하고 나서 겪게 되는 혼란이 이 '나'라는 것이 공부를 주도하려는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흔히 본성에 대한 체험을 한 후 이것을 챙기려 드는 마음의

습관성을 보입니다. 어렵게 얻은 것이니 잃지 않으려고 이 자리, 이것에 집착하지요.

이 자리, 여기에 있으면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아 편안하기에 이 맛이 좋습니다.

물론 이 공부의 맛을 보아 더 힘을 얻고 나아가는 임시적인 쉼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여러가지 인연을 만납니다.

그럴 때 편안함에 탐착하여 산란한 경계를 피하려 하고 산란한 경계를 만날 때마다

고요하게 만들려는 조작을 자기도 모르게 시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를 길들이는 오후 보임이라는 착각을 하게도 되지요.

그러나 원래 번뇌는 내가 세상을 통제하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의 인연은 나의 의지와 나의 뜻과 상관없이 인연따라 나고 사라집니다.

내가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고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지 않다고 죽지않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만 살고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심리는 나라는 분리된 존재가 자기를 유지하려는 수단입니다.

나의 안위, 나의 안전을 위해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긴장합니다.

일시적으로 나의 편안함과 나의 행복을 맛보았더라도 이것을 유지하려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마치 호수에서 우아하게 노니는 백조가

수면아래서는 쉼없이 발로 물을 젓고 있는 것처럼. 해탈은 바로 이 근원적인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근원적 해탈은 분별된 나라는 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데서 비롯됩니다.

나의 허상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나의 안위를 위한 투쟁이 멈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 공부에서 조차 자칫 나의 안위로 향하는 잘못된 방향성을 구축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편안해지기 위한 공부가 아니며,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계가 있는 편안이며 행복입니다.

불편과 불행이 어느때든 침범할 수 있는 편안과 행복이어서 마음놓고 쉬지 못합니다.

​나의 행복도 불행도 넘어섰습니다. 나의 편안과 불편도 넘어섰습니다.
나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니 나를 돌아보지 않을 일입니다. 내가 본성 속에

녹아들어버리는 길입니다. 내가 소에 익숙해지고 내가 소에 길들여지고 결국에는

소도 사라져 이 꿈같은 여정이 본래 시작도 하기전에, 꿈의 여정가운데도 한결같이

받치고 있었던 원상 그대로 임을 깨달을 뿐입니다.

이 세상은 분별된 존재들을 인정하는 분별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변하고 변하여

덧없지만, 본성의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멈춤없는 생동성으로 한결같다고 방편삼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라는 것도 투영된 것이고 세상 모든 것이 물결처럼

드러난 것이어서 물결로 드러난 내가 물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라는 것이 그림자와 같고 물결과 같음을 깨달아 그동안 나라는 물결이 물이라는

본성을 얻고, 통제하려는 착각에서 벗어날 뿐입니다.

행복이 찾아와도 맞아들이고, 불행이 찾아와도 맞아들입니다.
혹은 행복이 찾아와도 놓아버리고, 불행이 찾아와도 놓아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는 행복에서도 깨어나고 불행에서도 깨어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성은 나의 행복도 불행도 아니며, 나의 행복과 불행과 상관도 없지만,

행복과 불행 그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나의 안위에 상관된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음이 바로 소에 길들여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소와 나가 따로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 본성을 체험했을 때는

심적으로 따로인듯한 소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이것은 나라는 것이 여전히

따로 있는 듯한 분별의 습관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어느 순간 소가 따로 없었다는 깨어남이 있으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따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의 여정이 꿈이었음을 보게 되어 본래 동자가 깨달음의 마음을

내기도 전에 본성은 완전했고, 그후 여정을 떠난 동안에도 아무 일이 없었으며,

모든 꿈에서 깨어났어도 그런 일이 없음을 여실히 볼 뿐입니다.

꿈은 계속되지만 그저 꿈 그대로 깸임을, 분별된 세계 그대로 분별되지 않은

세계임을 스스로가 납득할 뿐입니다.

 

 

 

 

 

 

一笑一少  一怒一老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노하면 한번 늙는다.

笑門萬福來

웃는 사람에게는 많은 복이 온다.

 

영원히 살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제임스딘-

 웃음은 가장 값싸고 효과있는 만병통치약이다.   -러셀-

 

 

 

♡가장 아름다운 보석 / 딜카네기

미소는 돈이 들지 않지만, 많은 것을 이루어 냅니다.
받는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지만,
주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미소는 번개처럼 짧은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기억은 영원히 지속되기도 합니다.
지친 사람에게는 안식이고,
낙담한 사람에게는 희망의 빛입니다.

세상 어려움을 풀어주는 자연의 묘약입니다.
하지만, 미소는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강요할 수도 없으며, 훔칠 수도 없습니다.

미소는 댓가 없이 줄때만
빛을 발하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