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묘행무주(妙行無住) / 법상스님

2015. 10. 17. 21: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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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묘행무주(妙行無住) / 법상스님

 

그래서 이 다음 장에 제4분 묘행무주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묘행무주(妙行無住)

무주 머무는 바가 없는 묘행(妙行) 묘한 행

즉 이렇게 앞에 우리가 공부했던 것처럼

아상이라는 것도 그렇고 불성이라는 것도 그렇고 자아라는 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을 실체적인 자아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체적인 자아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데

그렇다고 '없다', '있다'라고 완강히 나눌 수는 없다.

묘하게 있다라고 알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묘하게 행할 수가 있습니다.

 

 

 

 

 

, 내가 돈을 벌어요.

그런데 공에 빠진 사람들은 중도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공에 빠진 사람들은 돈도 다 필요없어 공()한거야

돈도 벌지마 필요없어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묘유(妙有)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의 본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돈을 열심히 법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법니다.

돈이 공()하다는 것은 알아요.

집착할 게 없고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열심히 버는 겁니다.

그 열심히 버는 행위

알지만 묘하게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묘하게 행하는 것

즉 알지만 행하는 것은 뭐겠어요.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죠.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것은 이것은 인연 따라 연기법으로 만들어진 거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것은 이것을 묘행(妙行)이라고 합니다.

묘유(妙有)인줄 아니까 묘행(妙行)이 나오는 거에요.

실체가 아닌 줄 아니까 집착하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착각하는 거죠.

불교는 다 공()하다고 하니까

아무것도 할 게 없고 공부할 것도 없고 열심히 살 필요도 없고 돈 벌 필요도 없다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공()에 빠진 겁니다.

무기공에 빠졌다.

무기공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묘유(妙有)가 드러납니다.

묘행(妙行)이 드러나고

묘행(妙行)과 묘유(妙有)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우리들의 행은 어떤 행이냐 하면

집착하는 행이다 보니까

돈을 벌려고 할 때 미친 듯이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진급에 목숨 걸면서 진급하려고 하고

못했으면 과도하게 스트레스 받고

했으면 과도하게 우월감을 느끼고

자식이 공부로 성적이 좋으면 과도하게 막 주변에 자랑하고 싶고

성적 좋게 나오길 과도하게 집착해서 바래요.

이거는 묘유를 모르는 거죠.

그런데 묘행(妙行)을 하게 되면

자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을 그 말조차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말은 하죠.

성적에 대해서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 거에요.

여러분이 지혜로운 부모님이라면

지혜로운 방식으로 여러분들이 그래서

말이라는 게 말과 행동과 생각이 참 중요한 게

지혜롭게 말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해요.

어떻게 하느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이게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집착하지 않은 말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묘행(妙行)의 말이 나올 수 있어요.

이게 정어(正語).

8정도에서 말하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이런 겁니다.

집착하지 않고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게 되냐 하면

아들에게 성적을 잘 받는 것이 실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성적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면 자식들에게 무조건 공부 시키는 것이 목적이에요.

절대적으로 공부만 하라고 하라고 하라고 막 집착을 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했을 때 막 그냥 화도 내고

어떻게든 앞서 나가야 되고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그런데 공부에 대한

집착 없이 없게 되면 집착은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시키는 부모님이 아닌 거에요.

집착 없이 아이를 공부시키는 방법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공부하라고 막 시키기보다

아이를 데려다 놓고 앉아서

얘 너가 만약에 공부를 이렇게 하게 됐을 때

이러이러한 일이 아마 벌어지게 될 거야.

그러고 네가 성적이 좋게 나오면 지금 이렇게 좀 열심히 해서 하면 이럴거야.

아빠는 엄마는 보니까 어릴 때 공부를 안 했더니

한동안 너무 고생스럽더라

그런데 조금씩 차근차근 해 나가면 나중에 갈수록 공부 하기도 쉬워질 뿐더러

참 재미 있어질 거야

어떤 동기 부여를 해 주거나

그래서 스스로 제가 공부 한번 해야겠는데요.

언제나 이걸 깔고 있어야 합니다.

너는 공부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돼 너의 선택이야

 

엄마는 무조건 너에게 결정적으로 너에게 맡길 거야.

그건 너의 선택이야

너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라고 얘기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단 아이에게 이럴 수 있어야겠죠.

너가 공부 안 해도 된다

엄마도 너의 공부에 대해선 포기하고 대학 가는 거에 대해선 포기하고 공부하지 말아 버릴까?

하고 아예 딱 물어버리면

아이가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한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학도 안 가겠다고 하는 아이들은

이미 완전히 공부 때문에 엄마 아빠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그런 아이일 수 있어요.

그러면 얘가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대학은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럼 너 스스로 공부하면 정말 좋겠다. 너 스스로 할래?

아니면 엄마가 조금씩이라도 지도도 해주고 도와도 주고 할까?

본인이 판단하게 하는 겁니다.

 

본인이 한다고 하면 본인이 하게 놔두고

그럼 너가 한다고 그랬어

그냥 한다고 그러면

정 여러분들이 개입을 하고 싶다면 말이죠.

본인이 결정을 하게 만들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럼 네가 대학을 가야 하는데

네가 지금처럼 핸드폰만 하고 게임만 하고 놀기만 하면

당연히 못 가는 결과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네가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좋을까?

예를 들어, 집에 있을 때 어느 정도 공부할래? 물어보는 거에요.

엄마 생각에는 세시간은 공부했음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조금 부풀려 얘기 하는 거에요.

엄마 생각에는 다섯 시간은 공부했음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저는 한 시간이면 될 거 같은데요.

그래? 그래. 그럼 세시간 쯤에서 타협을 하면 어떨까?

그럼 아이들이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마음을 열고 대화하기 시작하면

애들이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래요.

좋아요 그럼 까짓 거 세시간으로 하죠.

그러면 이 세시간에 대해서는 네 스스로 해라

엄마와 약속하자

그러면 좋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게 스스로 선택한 거잖아요?

그럼 나중에 스스로 선택했으니까 안 할 때도 할말이 있어요.

너 스스로 선택한 거잖아.

굳이 뭐라고 할 필요도 없이

그러더라도 못할 수도 있어 그래도 될 수 있으면 하면 좋겠다

어떻게든 결정은 본인이 내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옆에서 대신 결정을 내려 주는 것 자체가

집착 때문에 그런 것이고

대신해서 내려주면 이 아이는 독립성이 없어져요.

내 스스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자꾸 눈치를 보게 돼요.

엄마가 지금쯤이면 빨리 공부하라고 할 때가 됐는데 하고

계속 게임을 하고 있는 거에요.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 돼서 공부를

시작 하려고 하지 그런데 독립적으로 스스로 하려고 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하다가 스스로 끌 줄 안다 말입니다.

자의에 의해 스스로 끌 줄 알고

새롭게 공부를 시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됩니다.

그러려면 맡겨줄 수 있어야 됩니다.

본인이 결정하는 걸 들어줘야 돼요.

그런데 본인이 결정 안하고 내가 결정을 굳이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식 인생인데 왜 내가 결정해요.

집착하니까 그렇습니다..

집착을 조금만 내려 놓으면

아이에게 말을 할 때 덜 집착하는 방식을 이야기 하게 됩니다.

내 스스로가 집착이 별로 없으면

말할 때 조금 더 마음을 열고 대화하게 돼요.

그러면 저절로 정어(正語)가 나오게 됩니다.

실제 행동도 그렇게 하게 되고

그리고 한번쯤 성적 나쁘게 나오면 어때요.

계속 90 100점 맞는 애들보다는

한번쯤 50 60점 딱 맞아 가지고

본인이 스스로 충격을 받아 보는 게 아주 좋은 효과가 있어요.

지금 생각에서는 수능, 내신 조금 비틀거리고

성적 조금 잘 못 맞으면 큰일 날 거 같지만

큰일 나지 않죠.

집착이 있을 때는 큰일 난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집착을 내려 놓게 되면 묘행(妙行)이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건지가 저절로 드러나게 돼요.

그 묘행(妙行)이 드러나려면 무주(無住) 가능 해야 합니다.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무주(無住) 머물지 않는 거

머물지 않는 것이 묘행(妙行)이고

묘행(妙行)이 바로 무주(無住)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묘행(妙行)인지에 대해서 나옵니다.

 

한번 같이 82쪽을 한번 독송해 보겠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 (聲香味觸法) 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보살은 마땅히

경계()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 해야 한다.

라고 얘기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부처님 어떻게 살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수행해 나가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마땅히 일체 중생을 구류 중생을 일체 모든 중생이

모든 중생을 모든 탐진치(貪瞋痴) 삼독이 없어지며

멸도(滅道)에 들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면서 살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죠.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은

아상을 채우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타인들을 어떻게 하면 타인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타인들을 행복을 넘어서서 완전한 멸도(滅道)에 들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고통을 없애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죠.

그 부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데 보살아 마땅히 경계()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여기서 보시는 남에게 보시하는 거 돈을 주고 법을 설해 주고 물질을 주고

이런 보시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일체중생을 멸도(滅道)에 들게 하는

그 사람의 아픔을 없애주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애시 이것도 보시죠?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법시

법을 알려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보시는

하나의 물질적인 보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법시 재시 무애시라고 하는 세가지 모든 보시를 얘기합니다.

좀 넓게 말하면 자비를 베풀으란 얘기구요 사랑을 베풀어라 나눔을 실천해라

중생구제를 하고 이타행을 실천해라

한마디로 보시라고 설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를 하는데 어떻게 보시를 하느냐?

마땅히 경계()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는 거죠.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하고

성ㆍ향ㆍ미ㆍ촉ㆍ법 (聲香味觸法) 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말이 뭐냐 하면요.

우리는 남들한테 보시 할 때, 남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사랑을 베풀 때

상없이 보시하지 않죠.

우리가 보시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항상 남들에게 잘 하죠

잘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오던 보시는 상에 얽매이는 보시기 쉬웠단 말이에요.

경계에 얽매이는 보시였다.

즉 지금 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내가 나중에 이런 도움을 받겠지?

그 사람이 훌륭하다 싶으면 더 잘 도와주고

더 잘 베풀고 더 잘 보이려고 애쓰고 이러기 쉽단 말이죠.

상에 머물러서 보시 하는 겁니다.

어떤 상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이 잘 났는지 못났는지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돈이 많은지 적은지

어떤 명함을 가지고 있는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지

좋은 가방 좋은 백을 들고 다니는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거에 얽매여 가지고 상대방을 대한단 말이죠.

여기서 보시는 어떻게 대할 것이냐? 이런 겁니다.

따듯하게 대하는 거 자체가 보시잖아요?

함부로 대하는 것은 보시를 행하지 않는 겁니다.

대충 봐서 무시해야 할 사람은 무시하고

무시하면 안 될 거 같은 사람은 귀하게 대하죠.

이게 바로 상에 머무는 보시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경계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한다.

 

잘난 사람 훌륭해 보이는 사람 눈에 보이죠.

그런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 치우치는 분별을 가져선 안 된다.

차별 없이 그냥 보시 해야 된다.

또 인간에게만 보시를 하고 자연만물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배 부르자고 재미로 시간 때우기 위해서 낚시를 하고 짐승을 죽이고

이러면은 그것은 온전한 보시가 아니다.

구류중생에게 모두 경계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라는 거 아니겠어요?

모든 중생에게 보시를 해야 되는데

개미 한 마리가 있어도 조심해야 되고

차를 타고 가다가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도 조심해야 되고

 

일곱살 동자승이 한달 후에 죽을 업인 겁니다.

큰 스님이 보니까.

그래서 얘가 여기서 살다 가면 어떻게 하겠나 싶어서

어머니한테 보내서 한달 후에 와라 하고 보냈단 말이죠.

그런데 얘가 한달 후에 멀쩡히 돌아왔어요.

신기해 가지고 큰 스님이 봤더니

얘가 집으로 가는 길에

개미들이 비가 와 가지고 개미들이 막 떠내려 가는 걸 보고

개미들이 물에 떠내려 가서 죽을 거 같아서

하루 종일 그 앞에서 앉아 가지고 자기 옷을 벗어 가지고 개미들을 마른 땅으로 이끌어주고

개미들을 한 마리라도 살려 주려고 옆에서 계속 앉아 가지고 개미들을 도와주고 있었던 거에요.

한나절을 개미들을 그렇게 마른 땅으로 옮겨주고

그러고 나서 자기 집으로 갔던 겁니다.

그 하나의 행위가 개미를 살리려고 했던 그 하나의 행위 때문에

그 수많은 중생들을 살렸던

생명을 살리고자 한 그 마음 때문에

실제 이 개미들은 물에 떠내려 가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내 의도가

살리고자 하는 의도 이게 중요한 겁니다.

살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면 그것은 살린 겁니다.

실제 눈에 돌아가는 물질 세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에요.

일체유심조고 만법유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진정 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그건 살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명이 늘어난 거에요.

이 아이는 단명의 업보를 그 일로 인해서 벗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누군가를 도왔어요.

도왔는데 마음 속에서 이걸 도우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한테 도움이 되겠지?

이렇게 해서 도왔습니다.

그건 의도가 돕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내가 득 보고자 한 의도였기 때문에

이것은 실질적으론 베풀었지만 베푼 게 아닙니다.

물질 세계에서는 베푼 거지만

마음의 세계에서는 베푼 게 아닙니다.

의도가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이런 얘기 있죠.

보시할 때는 보시를 딱 하고 나서는 딱 잃어버려라.

설사 내가 보시한 돈이 그 사람이 그 복지 단체에서 잘 못 써 가지고 나쁜데 써버렸어요.

옛날에 그거 때문에 한참 시끄러웠거든요.

 

저도 참 거기 봉사활동도 가고 어릴 때 그랬는데

소쩍새 마을에 제가 충청도 그쪽 옆에 고향이 그쪽이라

소쩍새 마을에 봉사 활동 많이 갔거든요

코 묻은 용돈 모아 가지고 보내기도 하고

그런데 이 소쩍새 마을에 스님이

PD 수첩인가요? 그걸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어린 나이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 스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가 어떤 맘으로 보시했느냐가 중요하지

그 보시한 것이 어디에 쓰였느냐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이미 그 스님의 업으로써 그 과보는 그 스님이 받는 거지

너는 너대로 너가 지은 너가 의도한 바의 공덕을 다 받을 수 밖에 없다.

마음이 중요한 거기 때문에

내가 보시한 걸로 그걸로 끝난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굳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그 행위를 하느냐

사람들을 만날 때도 분별하지 않고 그 사람을 대하는 게 가장 위대한

엄청난 공덕이 깃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아주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서 잘해줬다.

밥을 한끼 사줬다.

이건 그렇게 큰 공덕이 없어요.

그런데 분별하지 않고 네가 누군지 모르고 네가 뭐 하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너가 배고프니까 나는 너에게 밥을 사준다

당장 이 사람이 힘드니까

내가 너가 누군지 모르고 두 번 다시 만날지 안 만날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돕겠다 하고 도와줬을 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는

상상할 수 없는 공덕이 있는데

어떤 공덕이 있느냐 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죠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 

이게 십방(十方)을 얘기하죠

동서남북(東西南北) 사유상하(四維上下)라고해서 시방세계(十方世界) 할 때 십방을 얘기합니다.

이 시방에 있는 모든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이 우주법계 이 우주 끝까지를 양으로 헤아릴 수 있어요?

없단 말이죠.

 

“그런데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 공덕이 얼마나 큰가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내 앞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상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했어요.

그것은 그렇게 큰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공덕이 되긴 되죠. 안 한거 보다는

내가 백만원 보시하면 백만원만큼의 공덕만 됩니다.

밥 한끼 사준 공덕밖에 안돼요.

그런데 내 마음 안에서 네가 누군지 아무 상관 없이

물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한다라는 사실만이 중요한 거에요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와주고 바로 탁 뒤돌아섰다.

그것은요.

동서남북 사유상하(四維上下)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듯이

그 공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복덕이 됩니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의도냐면 나라는 상이 없는 의도

내가 득 보겠다는 생각이 없는 의도입니다.

나라는 상이 없는 의도는 무엇을 얘기 하냐면요.

그 의도를 일으키는 순간 내가 득 보겠다는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너와 내가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너와 나라는 차별심이 없고 그저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도와준 것일 뿐입니다.

너와 나라는 차별이 없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둘이 아니라는 밑바탕에 자각을 깔고 있는 겁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의식에서 베풀었어요.

그것은 내 개인의 복덕만 구족 되는 게 아니고.

우주법계의 모든 무량대복(無量大福)이 나에게 와서 붙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의도는 내가 복 받겠다고 하는 의도로 복을 지은 게 아니고

나라는 걸 내려 놓은 채 그냥 베풀었기 때문에

이건 우주법계 전체의 사유상하(四維上下)허공 전체에 있는 우주법계 전체의 무량한 공덕을

다 내가 쓸 수 있는 것과 똑같단 말입니다.

이렇게 보시하는 것이 습관이 돼 있는 사람은요.

언제 무엇이 필요하든 마음으로 요청만 하면

우주법계가 그 사람에게 무엇이든 가져다 줍니다.

이걸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해요.

한 생각 일으켜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어요.

우주법계로부터

이러한 복이 붙습니다.

이것이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작은 실천으로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내가 상대방이 나한테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보시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차에 예쁜 단주나 좋은 책이나 이런 것들을 사다가

또는 음료수 하나라도 사다 놓고 다니고 있다가

제가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 보니까

고속도로 매표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네요.  

괜히 시비를 걸고 이런 사람들이 많대요. 의외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답니다.

그런 분들 눈을 마주치면서 싱긋 웃어주면서  

수고 많으십니다.

음료수 한잔 휙 주고 지나가면

그 사람이 나를 두 번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절대 못 보는 거에요.

누가 준지도 모르고 보시한 겁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묘행무주(妙行無住)의 보시가 되는 겁니다.

어떤 불자님께서 몇 억을 종단에도 보시하고 동국대에도 보시하고

어떤 스님은 한 오억인가를 동국대에 보시하고

어떤 스님은 삼억을 보시하고

이런 경우들이 있는데 그냥 딱 주고 갔다고 그러던데요.

이런 일들이 있던데요.

불전함에도 보면은 한번씩 보면은

그냥 뜬금 없이 돈 백만원씩 들어 있을 때가 있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뒤집고 찾아봐도 이름 하나 안보이고 이런 경우들을 한번씩 보게 되거든요.

구세군 자선남비에도 매년 1억씩인가를 보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왜 가능할까요?

그것은 나라는 상이 상을 내려 놓은 사람만 가능한 행위입니다.

묘행무주(妙行無住)가 가능한 사람

나라는 상이 있으면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요 무엇을 의미 하냐 하면요

누구나 한번 맘 먹으면 할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의식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으면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의식이 어느 정도 올라가지 않으면

내가 돈 백만원 되는 걸 아무도 모르는데 보시할 수 있겠습니까>

못해요.

이것은 의식상승과 똑같이 일치가 됩니다.

내가 어떻게 남들에게 상 없이 보시를 하느냐?

상 없이 보시했다 이것은 내가 이만큼 공부가 되어 가고 있구나

이것을 반증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아들 딸들과 아프리카에 있는 어린 애기들

일인당 삼만원 오만원이면 되거든요.

자매결연을 한명씩 시켜주면

일년에 한 두어번씩 편지가 와요.

아이들이 직접 써 가지고 한글로 번역까지 해 가지고 편지가 와요.

엄마가 대신 돈 내주면 안 되고

엄마가 이번 달부터 용돈을 삼만원 올려줄 테니까

너가 돈을 조금 모으고 이렇게 모으고 저렇게 모으고 해가지고

이렇게 모은 것을 우리가 저금을 하면 어떨까?

아니면 집에다 보시함을 만들어 가지고요.

이를 테면 가족들 다 같이 오늘 밤 피자를 시켜 먹을까? 통닭을 시켜 먹을까?

남편하고 우리 치맥을 한잔 할까? 이리 생각을 했다가

우리 이 돈을 오늘 먹지 말고 보시하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먹으려고 했던 그 맘을 탁 접고

우리 가족 모두 함께 OK 해 가지고 보시함에 탁 넣는 거에요.

그렇게 만들어 낸 돈 그거 가지고 보시를 한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내가 어렵게 어렵게 이거 하나 안 먹고 보시한 거를

아프리카 아이를 도왔는데 그 아이가 나한테 편지도 보내주고 그런다

그러면 얼마나 감동을 받겠어요?

아이들이 어떻게 크겠습니까?

편지가 일년에 한두통씩 온다면 본인이 살아가면서 뭘 배우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덕목들을 저절로 배우겠어요?

지금 아이들에게 천원 오천원도 좋습니다.

한달에 다만 오천원이라도 천원이라도 만원이라도

어딘가에 보시하는 습관을 들여줘야 돼요.

그리고 부모님들도 먼저 당신들이 보시하고

보시할 때 그냥 보시해 주는 것도 좋지만

내가 뭔가 더 사고 싶은걸 안 사고 보시할 때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내가 한번 내 욕망을 내려 놓음으로써

누군가에게 복을 지을 수 있는 그런 어떤 것을 실천하면 좋겠죠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보시는 그냥 하나의 단어라고 했습니다.

이웃에게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

이웃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복을 베푸는 것

그 사람이 힘들고 아픔이 있을 때

그 힘든 것을 멸도(滅道)에 들도록

그 힘든 것을 소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모두가 보시행입니다.

 

그런데 뭔가 바라고 도와주는 게 아니고

그냥 도와주고 끝나는 거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무량한 공덕입니다.

사유상하 허공을 다 헤아릴 수 없듯이 무량한 공덕이 있다

그것은 아상이 타파되는 데서 오는

그것을 베푸는 순간 상 없이 베푸는 순간

우주법계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우주법계에 가득 채우는 마음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무량대복이 깃드는 것이다.

얼마나 어찌보면 어렵지만 어찌 보면 얼마나 쉽습니까?

이게 공부라는 게 금강경에서 말하는 실천 수행이 얼마나 직접적이고 삶과 연결되어 있고

하루하루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가 실질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죠.

 

어떤 보살님은 그 얘기를 하시대요.

당신이 아이를 학원도 보내고

공부도 잘 해야 되니까 학원을 보내야 되고

학원을 보내고 하다 보니까 남편 월급으로 모자라고

그래서 내가 열심히 일을 해 가지고

그걸로 자식들 대학 공부하고 해야 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일을 했고

일을 하다 보니까

남들을 만나고 이런 일을 해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자꾸 치장하는 거에 관심이 생기고

액세서리에도 관심이 생기고

예쁜 옷에도 관심이 생기고

자꾸 좋은 가방에도 관심이 생기고

자꾸 막 사는 걸 좋아하고 이렇게 살다가

아이가 원하는 학교를 못 가더라는 거에요.

원하는 학교를 못 가고 났는데 갑자기 뒤통수 맞은 충격을 받았다는 거죠.

내가 이 아이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이렇게 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런 결과가 있구나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

마음공부도 하고 금강경 공부도 하면서

아이와 계속해서 대화하고 사랑하고

얘를 공부시키는 건 이제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와 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더 대화하고 그랬더니

지금은 완전 친구 같은 자식과 완전 친구가 되어서

지금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너무 너무 행복하다는 거죠.

그렇게 내려 놓고 났더니

금강경 공부하면서 확 와 닿는 구절이 그거더랍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물거품과 같고 환영 환상과 같고 실체가 아니더라

실체가 아닌데 여몽환포인데 꿈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뭐가 실재가 있느냐?

그 얘기를 듣고 탁 깨닫고 나서는

갑자기 예쁜 옷 예쁜 가방 예쁜 악세서리에 이런 거에 대한 관심이 탁 떨어지게 됐대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우리 삶이 바뀌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는 조금 힘들지만 누군가를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은 특히나 아무런 바람 없이 도움을 줬다면

그것은 놀라운 공덕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