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6분 정신희유분 (正信希有分)

2015. 10. 24. 19: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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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6분 정신희유분 (正信希有分)

이제 할 차례입니다.

정신희유(正信希有)라고 해서

바른 믿음은 올바른 믿음은 희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분입니다.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12쪽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이겠는가.”

 

하나씩 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라고 이제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법문을 들었던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을

5(五分)까지가 금강경의 핵심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핵심의 법문을 이제 다 들었단 말이죠.

다 듣고 났더니

범소유상이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라.’ 라고 한단 말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아상을 증장시키는 것이고 아상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어떤 삶의 원동력이 되는데

나중에 미래 세계에서 가서 부처님 법이 쇠퇴하게 되었을 때

그때 수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아상을 증장시키고자

상에 빠진 삶을 살고 당연히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텐데

지금 저희들처럼 부처님께서 직접 설법을 해 주실 때도 이 얘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는 부처님께서 직접 법을 설해 주시니까 그나마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는 문제인데

이 어려운 가르침을

나중에 후 오백세가 되었을 때

아주 말법이 되었을 때

그때 중생들이 이해 하기나 하겠습니까?

특히나 그때는 부처님도 안계실 때인데.

전해 내려오는 글자 경전만 가지고

후 오백세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바른 신심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던 겁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 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 것이다.”

 

여기서 후 오백세라고 하면

우리가 이제 몇 가지 말세라고 느끼는데요.

이것을 몇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요.

500년씩 해서 5주기로 나누기도 하구요.

그것은 111쪽에 나오는데

 

1기는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즉각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아주 법이 서 있는 때를 말하며,

 

2기는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라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이는 좀 드물지만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시기이고

 

세번째는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라고 해서

경전을 읽고 외우는 사람들은 많지만

참된 수행을 닦고 선정을 닦는 사람은 드물어

부처님의 법력이 많이 감소되는 시기를 말하며,

 

네번째는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라고 해서

선정을 닦고 경전을 읽고 하는 사람들조차 줄어드는 시대입니다.

이 때에는 공부나 수행은 없고

오직 기복적으로 사찰과 탑을 세워 복과 공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기복불교의 시대가 네 번째 시대이구요.

 

다섯번째 오백년은 이걸 다섯번째 시대를 말기라고 부르는데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라고 해서

불법도 많이 쇠퇴하고

복을 바라며 절을 짓는 것들조차 사라지고

절의 재산을 가지고 오히려 싸우고 다투고,

불법을 팔아 서로 옳고 그름을 분열하는 그런 시기를 얘기합니다.

 

다섯개의 시기가 오백년씩 이어지니까

말법 오백년은 이천년에서 이천오백년까지이겠죠?

지금 불기 몇 년이죠?

여기에서 말하는 말기를 넘어섰습니다. 지금

절의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시대라고 이 경전에 나오고 있고

또 불법을 팔아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시기라고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 다섯 개의 주기 가운데  

마지막 주기 이후를 후 오백세라고 부릅니다

맨 마지막 이후에 있는 오백세다.

또 다른 설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시대라고 나눕니다.

보통 이것을 주로 많이 쓰는데요.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자 마자

500년간을 정법시대라고 해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해서

쉽게 깨달음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 500년을

여기저기 자료에 따라서

그 다음에는 오백년 혹은 천년이라고 하는데도 있어요.

상법시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시기라고 하구요.

 

말법 천년이, 천년이나 오백년이

그 이후의 500년 간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

불법이 쇠퇴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또한 오백년이나 천년씩을 본다면

2500년이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아주 전형적인 말법의 시대라고 알려진

시대의 끝자락에 우리가 서 있는 거에요.

어떤 설을 하든

앞의 비유를 하든 뒤의 비유를 하든

지금의 시대는 2500년이라는 정법 상법 말법이

이미 쇠퇴해서 끝나가는 시대를  이야기 합니다.

 

잠깐만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이런 시대라고 해서 우리가 좌절하면서 괴로워해야 되느냐?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 법이 2500년이 지나면

한 부처님의 어떤 정법이 쇠퇴하는 시기가 되지만

이것은 하나의 여기서도 주기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화의 주기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 몸의 있는 세포 하나조차 끊임없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다운되는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고 주기가 있습니다.

호흡도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고

우리 삶도 잘나갈 때가 있으면 못나갈 때가 있고

하루도 아침이 있으면 밤이 있고

계절도 봄여름이 있으면 가을 겨울이 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임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시대도 나라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주기화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의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더라도 말법시대의 끝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보면

기독교에서 보면 휴거가 곧 온다고 해서 난리였던 적이 있었죠?

또 어떤 종교에서는 뭐라고 하죠?

후천개벽을 한다고 얘기를 하는데도 있고

수많은 종교들에서 지금은 완전히 법이 쇠퇴해서 뭔가 새로운 시대가

혹은 어떤 데서는 세상이 이제 멸망할 것이다.

이 지구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곳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종교에서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과학에서도 상당히 합리적인 무언가가

큰 무언가가 일어난다고 하는 뒷받침을 하고 있는데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로가 지금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끝나는 주기인건 분명해 보인단 말이죠.

지금 우리 시대만 봐도 옛날 같으면 몇백년에 걸쳐서 일어나야 될 변화들이

지금은 오년 십년에 확확 변화가 일어나죠?

여러분 어릴 때 물을 사 먹을 거라고

돈 주고 사 먹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잖아요.

손바닥에 인터넷이 있어서 전 세계가 여기로 연결될 거라는 생각을 상상도 못했잖습니까?

미국에 어디에 있는 도서관 국회도서관에

우리가 여기서 모든 논문을 검색해 볼 거라고 어찌 생각하고 살았겠습니까.

지금은 그야말로 놀라운 시대이고 급격한 변화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또 전 지구적으로 보더라도 환경 오염 이런 것들 때문에

엄청난 뭐랄까 재앙이라고 불릴만한 환경 오염이 일어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 그것들은 더욱 더 일어날 확률이고

칠레에서도 지진이 일어나고

일본에서도 엄청난 해일이 오기도 했었고

이런 일들이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지고 있잖습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제 두려움에 떨기 시작합니다.

걱정하기 시작하고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명쾌하게 분명하게 아는 누군가가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대략적으로 우리가 예상해 보고 상상해 볼 수 있는 게

탄허 스님께서도 뭐 이런 비슷한 예언을 하셨는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아 이제 지구가 멸망하겠구나

이제 곧 우리도 다 죽어 없어질 수 있겠구나

그래가지고 두려움에 떨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두려움에 떨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치를 알고 나면 두려움에 떨게 하나도 없는 것이죠.

우리가 생사라는 것이 본래 둘이 아니다 라는 걸 알면

죽음이 오더라도 다른 곳에서 다른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의 이 주기가 끝난다 라는 것은

멸망해서 모든 것이 끝장난다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가 하나가 끝난다 라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론 하나가 한가지가 끝날 때는

여러분도 삶이 뭔가 새롭게 변화될 때는 어때요?

그냥 새롭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뭔가 한번 아픔을 겪고 나서 새롭게 탁 깨어나거나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그 아픔을 겪고 났을 때 더 성장하거나

이런 일들을 겪는단 말이죠.

그래서 지금의 말법적인 징조들

세계적인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이런 것들은

하나의 그러한 어떤 잠시의

털고 갈 것은 털고 가야 할

털어야지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어떤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그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이 끝장나는 시대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런 시기일수록

어떻게 하면 되느냐?

지진 해일이 오니까 바닷가에선 절대 살면 안되고

또 뭐 폭발할 테니까

미국에는 그런다데요.

어는 지역에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가 거기 뭘 만들어 가지고

수십억 주고 집을 미리 사놓는데요.

지구가 멸망할 때 되면 거기 들어가 산다고.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겠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 파두고 들어간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죽지 않을 수는 없다.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것은

그 집이 없어 죽는 게 아니고 땅 파고 들어가지 않아서 죽는 게 아니고

업이 그 사람을 죽이는 거 거든요.

자기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어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 것이냐가 결정되는 거 거든요.

 

그러니까 하다 못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바닷가 속초나 고성에 살더라도

바닷가에 살더라도 거기에 지진 해일이 일어나서 나를 죽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아무나 죽일 수는 없다

죽지 않을 사람이라면

마침 내가 십년 이십년 삼십년 거기 살았는데

그날 서울에서 무슨 결혼식이 있어서

이십년만에 외출해 가지고 서울에 왔는데 갑자기 지진 해일이 와 가지고 나는 살수도 있다

 

삼풍백화점에 평소에 전혀 가지도 않던 사람이

그날따라 갑자기 삼풍백화점에 가서 죽을 수도 있지만

거기서 맨날 살고 하는 사람도 갑지기 뭔 일이 생겨서 잠깐 바깥으로 나왔다가

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이 그냥 우연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지구가 멸망한다

여기에 대해서 두려움에 떨 필요가 하나도 없다

단지 뭐만 하면 되겠습니까?

어차피 내 업이 그렇다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아도 나는 죽고

지구가 멸망해도 살 사람은 살고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의식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얼마만큼 의식적으로 깨어날 것이냐

또 하나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얼마만큼 이타적인 삶을 살 것이냐

베풀고 살고 나누며 살 것이냐.

지혜와 자비가 구족한 삶을 살 것이냐

이게 핵심입니다.

지혜와 자비로운 삶을 살게 되면

그 어떤 폭풍우가 오고 지진 해일이 일어나고 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죽지 않을 수가 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죽고 사는 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집어 삼키지 못한다.

그 어떤 인류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법이라는 것은

말법 시대에 불법이 쇠퇴하니까

온갖 잘못 된 일들이 벌어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정말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괴롭히기 위해서

진짜 인간들이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그 동안 지어왔던 업들을 털고 가는 시대라는 거죠.

털고 가는 시대

지금이 바로 그 털고 가는 시대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털고 가는 시대이지만 반대로

물질적으로 너무 치닫는 시대로 몰아가게 되면

물질적으로 치닫는 세상으로 가니까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끝장 나겠구나 생각을 했었어요.

우리가 십년 이십년 전에

너무너무 돈만 밝히고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아파트 살고

너무 삶이 편안해지면서 이렇게 살다가 우리 큰일난다고 다 생각했어요.

이웃사람과 아파트에서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모습을 처음에 보고 사람들이

저런 곳에서 살면 정이 없어지고

정신적인 어떤 정신세계는 피폐해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물질만 추구하는 시대로 치 달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이 바닥을 칠 것이다 라고 누구나 예상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더 급격한 속도로 빠른 속도로 물질적인 추구가 많아지는데

놀랍게 그 반대급부가 확대생성을 합니다.

지금과도 같이 전세계적으로 명상 웰빙 수행

이런 것들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선풍을 끌던 때는

역사 이래로 유사 이래로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이

전세계적으로 놀랍게 곳곳에 선풍을 끈 적이 없었단 말이죠.

이와 같이 지금은 놀라운 시대인 대신

옛날에는 어떤 시대였냐 하면요.

옛날에는 부처님 법을 구하는 사람도 적었지만

법을 내가 출가해서 부처님 법을 공부해야겠다 마음을 먹어도

마음대로 공부할 수 없는 시대였어요.

옛날에는 해철스님이나 이런 분들이

왜 손오공을 데리고 삼장법사가 여행을 떠났겠습니까?

이게 다 구법여행이에요

구법이에요.

중국에서 인도에 있는 경전 있잖습니까

인도에 있는 경전을 어떻게든 경전을 구해서

구법 여행을 통해서

목숨을 걸고 구법 여행을 통해서

반야심경 하나 금강경 하나를 손에 넣으면

그게 내 인생의 정말 최고의 진리를 내 손에 넣은 것이기 때문에

이걸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백번이고 천번이고 독송하고 사경하면서

이걸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했단 말이죠.

그러면서 환희심을 느꼈단 말이죠.

경전 하나를 만나면 깊은 환희심을 느끼고

몇 년 걸쳐서

인도에 가서 경전 하나를 받았을 때

그 환희심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언어를 모르니까

거기 눌러 앉아서 인도언어를 또 배우고 그리고 해석을 하고

그 경전을 가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고

이럴 정도로

옛날에는 법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또 어려웠다 보니까 간절하게 공부를 했겠죠.

지금의 시대는 그렇게 어려운 시대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어려운 시대였으니까

스님들이 그렇게 귀하게 법을 만날 때

그러다 보니까 옛날 스님은 출가할 때

요즘처럼 6개월 혼자 생활해서 출가하는 게 아니고

6년씩 10년씩 스님을 시봉 해야

겨우 금강경 강의 한번 해준단 말이죠.

반야심경 강의 한번 해주고

그래서 법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였다

아주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가만히 누워 가지고 리모콘 탁탁 누르면

큰 스님들의 법문을 언제든 들을 수 있고

클릭 몇번만 하면

우리나라 큰 스님뿐만이 아니라

꼭 불교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강의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고

이런 놀라운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서점에 가면요.

여러분들에게 제가 불서 같은 것을 권해 드리는 이유가

지금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잖습니까?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스승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내 옆에 스승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 하는지

우리가 우리 머리 속에서 스승은 인간의 모습을 띠고 와야지 그게 스승이야

하는 그 편견만 깬다면

놀라운 방법으로 스승이 등장합니다. 우리 삶속에.

그 중에 아주 직접적인 한가지 스승이 책인데요.

저 또한 지금의 제 공부해 왔던 여정 같은데 아주 놀라웠던 것들이

저는 시간 나면 아주 귀한 시간 날 때

저한텐 정말 귀중한 시간이 뭐냐 하면

저 강원도 있을 때도 그랬어요.

틈나면 뭔가 시간이 나고 하면

두시간 세시간 달려와 가지고

교보문고 같은데 그냥 앉아 있는 거에요.

그날은 월간 행사처럼

몇 달에 한번 그렇게 가 있는 날은 너무 행복한 날이에요.

그래서 아침부터 앉아서

뭘 살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냥 내 마음 안에

내 마음 안에서

책을 고르기 전에

우주법계에서 법신 부처님께서 나에게 지금 정확히 필요한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보시고

그 필요한 것을 저에게 법을 전해 주십쇼

하고 마음에

내가 하는 건 원을 세우는 것 밖에 없는데

그리고 그냥 눈에 띄는 걸 보는 겁니다.

여기 저기에서 이책 저책을 보면서 보는 거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랍게도

유명하고 안유명하고

이 책이 유명한 책이고 안 유명한 책이고 상관 없이

정말 지금 돌아보면요.

내 의식에서 정확히 필요했던 책

내가 그 정도 의식에서 정확히 그 책이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이십년 전에 지금 놀랍게 느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이십년 전에도 제가 읽었던 책이에요.

대학 다닐때 선배가 줘 가지고 읽었는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좋다고 보지? 라고 생각했던 책이에요.

 

그것처럼 자기 의식의 파장과 맞지 않으면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그게 나를 변화시키지 못해요.

그런데 그렇게 원을 세워서 서점에 딱 가면 정확히

도서관에 가도 마찬가지에요.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책을 법계에서 탁 골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두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조금 더 조금 더 발전할 수 의식의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그런 공부가 됩니다.

그래서 정말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때 필요했던 가르침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오고 있었단 말이죠.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마음만 내면 책에서든

옛날에는 지금 놀라운 어떤 책들을 보면요.

이런 책들은 이 정도의 이야기는 옛날 같으면 몇 년 묵혀야지만 볼 수 있는

이를 테면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티벳에 가면 티벳의 파탈라궁에 저 깊은 곳에

아주 그 아주 그야말로 비밀의

티벳 불교가 비밀 불교 밀교잖습니까?

비밀불교인 이유가

정말 얘기해 줄 수 있는 법이 얘기해 줄 수 없는 법들이

놀랍게 가지고 있는 불교인 거에요.

그래서 이것은 때로는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정법이 아니다 싶은 놀라운 얘기들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얘기를 안 해주는 거죠.

너무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는 거죠.

그때 같으면 비밀서고에나 있을법한

어느 정도 공부가 된 스님들 한테만 전수해 줬을 법한

그런 놀라운 가르침들이 지금은 서점에 깔려 있어요

전 깜짝깜짝 놀라요.

야 이런 이야기를 일반신도님들이 보시면 이해를 할 수 없겠다 싶은 이야기들도 있어요

 

여러분 예를 들어 그런 이야기가

얼마 전에 읽은 책중에 티벳에 있는 스님이 쓴 책인데

티벳에서 스님들이 놀라운 의술을 행했습니다.

놀라운 의술을

지금 생각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해라고 느끼는 그런 의술을 행했었어요.

지금 훌륭한 병원의 의사들이 도저히 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의술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들이 상당히 놀라운 것들일 수 있어요.

또 어떤 공부하는 데 있어서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수행의 방법이 지금 우리는 호흡관 하고 이렇게 하지만

또 다른 어떤 방식이 있단 말이죠.

스님과 제자간에 이어지는 또 다른 어떤 방식도 있단 말이죠.

그런 것들은 아무나 본다고 해서 그냥 휙 던져버리고 말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어느 정도 나와 주파수가 맞기 시작하면 그런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이런 것처럼

우리가 지금의 시대는 놀라운 깨달음이 공유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전세계 수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깨달음이라는 것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마음 알아차림

관하는 이 공부가 전 세계적으로 누구나 다 하는 공부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정말 놀라운 속도로 전 지구적으로 깨어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여기서도 55주기 시대 끝이 이미 지났잖아요.

2500년 지났으니까

끝이 지났다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

새로운 시작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해요,

지금은 이미 새로운 시작이 열리고 있는 시대일 수 있습니다.

그 열린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뭔가 개벽을 하는 갑자기 휴거가 돼 가지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로 들어 올려지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파도가 치고 해 가지고 쓸어 죽이고 이런 방식이 아니다.

그런 방식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단 말이죠.

또 다른 방식으로 차원으로

지금 우리들이 놀랍게 깨어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만나보는 신도님들 중에도 보면요.

그냥 공부하는 신도님만 계신 게 아니라

저분 참 많은 놀라운 공부를 하셨구나

정말 옛날 같았으면 그야말로

야 이거 견성이라고 싶을 만한

성품을 보고 놀라운 공부가 되셨구나.

그런데 견성을 하면

여러분 다 끝나는 거 같다고 착각을 해요.

사실은 신도님들이 견성을 하면 괜찮아요.

스님들이 견성을 하면 좀 안 좋습니다.

왜냐하면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거든요.

성품을 봤기 때문에

아 이러한 성품이 있구나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되는구나

라는 확신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견성을 하고 나면

야 뭔가 모르게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보니까

야 내가 엄청난 걸 봤구나.

이렇게 착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성품을 봤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부처님께서 가섭존자가 하다못해 사람들의 몇생전을 볼려고 하니까 안 보이니까

부처님이 너가 아무리 가섭이지만 아라한과를 증득했지만 그게 환히 보일 수 없다.’ 라고 한 것처럼

성품을 보고 견성을 했어도 그 사람이 모든 우주의 이치를 환히 보는 게 아니다.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그런데 제가 만난 신도님들 공부 열심히 하신 신도님들이

그야말로 한 소식을 하셨는데 당신이 어느 정도 공부를 하셨는지 모르니까

당신은 여전히 막막하니까

내가 보이는 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안 보이는 부분이 당연히 지금도 많이 있으니까

당신은 겸손하신 거에요.

아주 겸손하게

제가 공부가 안됐다고

계속해서 공부를 해 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스님의 공부가 이래야 되는데

제가 스님들이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어떤 스님들 중에

젊은 날 성품을 한번 보시고서는

당신이 상이 뭔가를 하나 보고 나면

수행하다가 수행하다가 뭔가 놀라운 경계를 탁 보고 나면요.

그게 엄청난 상이 돼 버립니다.

난 이걸 봤어

너희들은 못 봤지

난 이걸 봤어

이걸 어쩌면 견성이라고 할 수 있어

난 견성한 사람이야

견성이 말이 견성이지

성품을 본 거 아니겠어요

힐끗 보는 그런 정도가 뭐 대단한 거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엄청난 상이 생긴단 말이죠.

나는 엄청난 중생들과 다르다

너희들과 다르다

그래서 막 깨달은 것처럼 그냥 아는 소리 하고

이러기 시작한단 말이죠.

아는 소리 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해요.

아는 소리 하는 사람 만났다

아 이 어리석은 중생이구나

정말 어리석은 중생이구나

가장 기본적인

부처님 말씀하신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이구나

아는 소리 하는 사람이구나

점을 보고 이런 것도 마찬가지에요.

괜히 아는 척 하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외도를 만났구나 하고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법이라고 알려진 곳에서도 때때로 때때로

그런 것으로 장사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거 봐주고 이러는 게 불교가 아니다.

 

제가 시골 절에 있을 때 보면

마을 어르신들이 찾아와서

여기도 봐요? 봐줘요?’

잠깐 들어와 앉으세요.’

아니 답만 얘기하세요. 봐줘요? 안 봐줘요?’

보는게 불교가 아닙니다. 그거는 정법이 아닙니다.’

하고 얘기를 시작하면

안본단 얘기죠?’ 하고 가버린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불교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본다고 한들 백프로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하게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특히나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 맞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듣고 나면 내가 들은 그 생각 때문에

그쪽으로 내 생각이 그 쪽으로 몰아가 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내가 생각을 그렇게 믿기 때문에

안 좋은 사주를 듣고 난 사람은 그 사주대로 될 확률이 높아요.

내가 안 좋은 사주를 듣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생각이 그렇게 끌고 간 거에요.

결국은 그 사람 말이 옳은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꿈을 꿨다거나

요즘에 뭐가 있다 해서 막 물어보면

굳이 물어보면 볼게 없다

볼게 없다 라고 얘기 하는데

굳이 물어보시면 그냥 좋게 얘기해 주는 게 좋습니다.

꿈해몽을 해주더라도 좋게 얘기해 주는 게 좋다..

그리고 정말 마음이 허하고 힘들고 병이 있고 이러신 분들에게

정말 힘들어 하시는 분이 있다면 좋게 얘기해 주는 게 좋죠.

그런데 무작정 무조건 좋게 얘기해 준다 하는 것도

나쁘게 얘기해 주는 것도 안되지만

과도하게 좋게 얘기해 주는 것도 좋을 수가 없죠.

불교는 극단에 대해서

극단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착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착하기만 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착함을 넘어서는 공부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

여러분 스스로 이제는 사주를 보세요.

스스로 보는 사주는

내가 내 사주팔자를 보는 게 아니고

내 스스로 내 사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주에요.

수행자들의 사주는 스스로 만드는 사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자기 규정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사주는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그 사주도 제가 전생에 이 생에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 놓은 사주입니다.

이 생에 태어나기 전에

이 생에 내가 이러이러한 정도의 만들어 놓은 사주입니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 해서

스스로 동의해서 만든 업이란 말이죠.

그 당시의 내 의식으로 동의한 겁니다.

지금은 바뀌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지금의 내 의식은, 지금의 내 의식은요,

더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놨던 스케줄도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바꿀 수가 있다.

원래는 내가 이 생에 나이 오십 육십 됐을 때 큰 아픔을 당해서 큰 괴로움을 당해서

그걸 통해서 내가 정신적인 성장을 이뤄보자.

하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내 업에는 원래 그런 게 있었는데

나는 뭔 업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보다 나는 기쁨을 통해서 성장하겠다.

이렇게 규정 짓는 겁니다.

새로운 시대라는 것은 뭐냐 하면요

이 과거 5주기 부처님 말씀하신 과거의 시대는요.

필수적인 것이 뭐였냐면

부처님께서도 고해라고 한 것이

필수적인 것이 고통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필수적인 방식이었어요. 깨달음의.

고통을 통해서 깨닫지 않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의식 수준이 다 그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어요.

옛날에는 방편이 많았죠

너희들 잘못 하면 지옥 가.

지옥 가기 싫으니까 착하게 사는 거에요.

이거는 아주 하근기 사람들한테 쓰는 방편이었단 말이죠.

옛날에는 이런 방편을 썼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방편을 쓰지 않는단 말입니다.

제가 목탁소리에서 몇번을 누누히 말씀 드리는 게

여러분들은 죄가 없다

지금에 와서 수 많은 사람들이 스승들이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해요.

옛날에는 그런 얘기가 없었던 건 아닌데

옛날에는 죄 지으면 안 된다.

착한 일 해야 한다

지옥 간다.

이렇게 해야지만 말을 알아듣던 시대였단 말이에요.

지금은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지금 우리는.

대전환의 시대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어떤 부정적인 방식

너희들 잘못하면 지옥 간다는 그 방식으로 깨닫는 시대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완전히 나 자신을 용서해 주고

과거의 잔재

5주기가 끝났다는 말을

과거의 이미 지나간 잔재는 털어버려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내 마음을 비우고 용서하고 참회하고

과거에 이제 얽매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의 지난 과거

제가 가장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가 수용과 용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자꾸 얘기하는 이유가

이미 지나간 과거나 나에게 지금 현재 주어진 삶에 대해서는 온전히 수용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완전히 내려 놔 준다.

과거에 내가 잘못한 게 있더라도

과거에 잘못했던 일은 그거 자체로 용서하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대로 수용하는 겁니다.

안 좋았던 그 채로.

그 대신 용서해 주는 거에요.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통해서

우린 어떤 게 가능해지냐 하면

지난 과거의 모든 힘들고 괴롭고 어둡고 탁했던 모든 것들을 털고 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통해서

이미 지난 과거의 모든 티끌 어두운 잔재들을 내려놓을 수가 있게 돼요.

그래서 마음을 비우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이제 더 이상

수용과 용서를 통해서

더 이상 내 안에 어두움이 없는 거에요.

괴로움은 없는 겁니다..

그렇게 털고 나면 마음이 비워지고 나면

이제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졌어요

업장이 놓여났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과거의 악업이 있을 때는 그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지만

과보를 받아야지만 업장을 소멸할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지금의 시대가 놓여지는 시대다

우주가 도와주는 거거든요.

업을 털고 가는 것은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이런 것들 자체가

업을 털고 가기 위해서 털기 위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나쁜 일로써가 아니라 좋은 일로써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수용과 용서를 통해서 자신을 완전히 정화하고

정화하고 난 다음에 뭐가 남겠습니까

맑고 텅 빈 가운데서

하루하루가 놀라운 완전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맙고 감사한 일 밖에 없어요.

그리고 사랑할 일 밖에 없습니다.

아집과 아상으로 나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시대는 이제는 끝난 시대란 말이죠.

이제는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서 살 수 밖에 없고

이 세상을 너도 나도 사랑해 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그래서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하고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해야 된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구요.

이 말은 곧 과거의 방식

괴로움을 통해 깨닫는 방식

이게 인간계의 사바세계의 전형적인 방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사바세계는 인토다 감인토다

참고 인내하는 세계다.

참고 인내함을 통해서 깨달아 갈 수 있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참고 인내해라.

예토다 인토다 이랬단 말이죠.

지금은 이 주기가 끝났어요.

이 가르침을 법을 설했던 의식의 파장은 이제 끝나는 시대란 말이죠.

지금은 그것을 통해 깨닫는 시대가 아니다.

요즘의 심리학을 보세요

마인드풀리스(mindfulness )가 등장하면서 동시에 또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긍정심리학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인드풀리스(mindfulness )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요.

이게 뭐겠어요?

이게 불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주법계 전체가 모든 분야에서

동시간 동시대적으로 공명하면서

이 모든 비슷한 에너지가 함께 일어나고 있어요.

최근의 오년 십년 사이 심리학의 흐름 보세요.

긍정심리학이 엄청 많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런 심리학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몸에 문제가 있어요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정신병이 있거나

이걸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걸 어떻게 풀어줄까?

얘가 뭐 때문에 이런 문제가 나왔지.

과거의 잘못 된 것을 깨 줌으로써 이걸 풀어주는

이런 심리학이 있었었는데

최근에는 긍정심리학 나오고 하면서

제가 그 용어를 잃어버렸는데 그 심리학에서는 그럽니다.

이걸 치유하는데 있어서 단점들이 한 70프로가 있어서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나를 이상하게 지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심리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람을 치유하냐 하면

이 사람의 단점 70프로는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에너지를 주지 않는 거에요. 거기다.

너에게 있는 단점을 아예 볼 생각을 하지 마라

지금부터 너에게 있는 장점만을 봐라

그리고 단점밖에 없으면 그 단점이 때때로 장점이 되는 순간은 언제냐.

장점을 계속해서 적게 해서 자꾸 그 장점을 칭찬해 주고

자꾸 더 만들어 줘서 장점이 확장되게 되면

그 장점이 확장됨으로써 단점이 덮힌다는 거에요.

이런 심리학이 또 한때 유행을 했어요.

긍정심리학

긍정부정도 뛰어넘는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이것이 전세계적인 심리학의 흐름으로 바뀌었단 말이죠.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이와 같은 방향으로 이 세계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스스로 업을 바꿀 수 있어요.

어떻게 바꾸느냐?

나에게 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리나 내가 마음 속에서 원을 세우는 거에요.

원력을 세우는 거에요.

어떤 원을 세우느냐면?

고통을 통해서 반드시 내가 성장하는 것만이 필수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나는

기쁨을 통해서 행복을 통해서 열정을 통해서 즐거움을 통해서 삶의 에너지를 통해서

성장하겠습니다.

라고 스스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제 책에 보면 많은 제 책들을 읽어보면

많은 분들이 헷갈리는 게 많을 거에요.

첫째는 고통을 인내하고 받아들이고 함으로써 우리가 깨어날 수 있다.’

라는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 놓고 아상을 내려놔라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아상을 내려 놓으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반대로

내가 축소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작아지는 즐거움을

그런데 또 반대로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을

즉 아상은 내려 놓되

아상은 내려 놓되

아상을 내려 놓은 상태에서

우리가 금강경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 이라 해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맘을 내라.

지금까지는 머무는 바 없이 집착하지 말아라가 불교의 핵심인 거 같이 느꼈단 말이죠.

아상에 집착하지 마라는 얘기가

그런데 이 얘기만 불교의 전부가 아니라

이생기심(而生其心) 그 마음을 내라.

적극적으로 일으켜라가 불교의 목적입니다.

그 마음을 내다 보니까 사람들이 집착하면서 마음을 내니까

하지 말라는 거죠.

 

예를 들어 어제 어떤 보살님이

학교에서 엄마들이 소임을 맡아야 하는데

뭔 임원을 하라고 하는데

전부 다 안하려고 해 가지고

모였던 엄마들이 전부 다 안한다고 안한다고 해 가지고.

오분 십분을 안 뽑을 수는 없고

침묵 속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길래

이 보살님이 어쩔 수 없이

정 못하시겠으면 제가 어쩔 수 없이 하겠습니다.’ 했다는 거에요.

괜히 한 거 같다고 막 그러시기에 잘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잘하셨다고 했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똑같이 옛날 방식대로 진부하게

그냥 그냥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서 놀라운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왔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이겁니다.

내가 반대표 엄마가 돼야지

우리 애 학교 임원이 돼야지 한다면 안하는 게 좋아요.

집착한다면 그 사람 안하는 게 좋아요.

응무소주 (應無所住)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마음 속에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는 게 좋아요.

저질러서 실천함으로써 내가 안해본 걸 자꾸 해보는 게 좋아요

안해본 걸 해 봄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어요.

이생기심(而生其心) 그 마음을 내는 시대에요.

자꾸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러나 집착하면서 도전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거에요.

날 가슴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것에 매진하고

내 열정을 불사르고

이런 것이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생기심(而生其心)으로

그 마음을 정말 나를 가슴 뛰게 하고 설레이게 하고 열정을 움직이게 하는

이런 것으로써 나아가게 된다면

옛날의 방식대로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성장하는 이 방식을 말고

이제는 내가 즐거운 것을 함으로써 더 성장 할 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지금은

이 둘 중에 어떤 방식을 택할지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에요.

그러려면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세상을 보는 필터를 바꿔야 되겠죠?

내면의 시선을

뭘 보더라도 허허허 하고 웃어야 됩니다.

아까 강의를 듣다가 핸드폰 소리가 들릴 때

제가 핸드폰 소리가 들렸을 때 제가 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핸드폰 소리가 들렸을 때 띠리리 울렸을 때

어떤 분은 웃고 있었는데

어떤 분은 눈빛이 벌써 싹 바뀌면서

아주 안 좋은 표정을 지으시면서 그런 분도 계신단 말이죠.

그런 분을 제가 뭐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그걸 배우기 위해서 온 겁니다

이 작은 것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반응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실 거에요.

공공장소에서는 이런 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켜주면 좋지 않느냐

지금 이 법문의 소스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그분은 그렇게 하셨던 겁니다.

별거 아닌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느끼기도 있고

가볍게 웃어 넘길 수도 있어요.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일입니다.

별거 아닌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여길 수도 있고

가볍게 웃어 넘길 것이냐

아이들 행동하나하나를 대개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분들 계시잖아요.

아이가 야동을 보고 있다 들켰다

이걸 가지고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정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난리가 나는 분이 있는데

그냥 웃어 넘기면서

야 엄마도 같이 보자, 재미 있냐? 얼마나 재미 있냐? 기분 좋으냐? ‘

그러면서 물어 보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죠

그럴 수 있으니까

전혀 문제 상황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런 상황이니까

가볍게 심각해 지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나는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방식을 아직도 고수하는지

아니면 기쁨과 즐거움을 통해 열정을 통해

즐거움을 통해 성장하는 방식을 새롭게 선택하는지를 보려면

내 안에 있는 필터를 보면 됩니다.

모든 것을 볼 때 내가 어떻게 보느냐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 자주 심각해 지는 사람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심각해진다.

전자를 의미합니다.

후자인 사람은요.

이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심각한 게 없어요.

이렇게 돼도 괜찮고 저렇게 돼도 괜찮아

 

아이가 특목고를 가도 괜찮고 그냥 고등학교를 가도 괜찮아

여러분 특목고 가서 2년만에 졸업을 하대요.

2년만에 졸업을 해서 대학교를 1년 먼저 가요

이제 좋은 일입니까?

뭐 나쁜 일은 아니겠죠?

가신 분도 많을 테니까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본인이 엄마 저는 정말 특목고 보내 주세요.

제가 공부 한번 열심히 해서 2년만에 대학교 가봐야겠습니다.’

그러면 박수 치며 보내주면 돼죠.

그런데 내 욕심 때문에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특목고 가는 게 좋습니까?

그냥 고등학교 가는 게 훨씬 좋을 수 있죠.

그런 거는 내 생각의 차이니까 그걸 가지고 심각해 질 수도 있고 심각해 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건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심지어 남편이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한다 하더라도

심각해 질 수도 있고 심각해 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건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그걸로 심각해 진다면 전자를 선택하는 거에요. 고통을 통해 깨닫는 방식을.

그런데 우리는 가볍게 생각 할 수 있어요, 실제로.

그리고 그것이 가능합니다.

제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

불교 수행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게 가능하다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엄청난 수행을 해야지만 가능한 게 아니라

마음공부 열심히 하는 분들은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가능하구나.

 

어떤 보살님을 봤는데

이 보살님은 기도수행을 열심히 하고

정말 순수한 수행을 하고

믿음이 확실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 보살님이 연세도 좀 있으신 분이신데

이 보살님이 병원을 갔는데

병원에서 갑자기 난리가 났더라는 거에요.

그래 가지고 그 자리에서 대형 병원 소견서 써 주면서

하루가 시급하다고 하면서 날짜까지 잡아 주더라는 거에요.

바로 그 다음날로 세브란스 병원에 잡아 주더라는 겁니다.

보통 그렇게까지 안 하자나요.

야 이거 내가 큰일 났구나

그래서 뭐냐 했더니 자세히 얘기도 안해주더래요.

일단 가 보라고 하더래요

큰 병원에 갔는데 거기서 좀 심각하더래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돌이 담석이 큰 게 하나가 있는데 폐의 중요한 부분에 들어가 있었나 봐요.

이것 때문에 배가 너무 아파 가지고 병원에 갔더니 그게 발견이 된 거에요.

배가 너무 아파서 너무너무 힘들어 가지고

하루 하루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힘이 들더랍니다.

병원에 갔다 와 가지고 병원에서도 큰일 났다고 하고 하니까

너무 겁이 나고

큰 병원에 갔다 와서 너무 겁이 나고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드는데

순간 탁 한 생각 떠오르는 게 그거더랍니다.

제가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얘기를 늘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 분들이 있는 그대로 보라는 얘기가 아무런 영험이 안되는데

있는 그대로 보라는 얘기가 뭐 대단한 얘기인지 모르고 살았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있는 그대로 보라는 얘기가 탁 떠오라더랍니다.

그래서 이 분이

지금 내가 몸에 아픈 거 가지고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내 자식은 어떻하지

손자 손녀들은 내가 봐줘야 하는데

온갖 생각을 해 가면서 괴로워 하고 있더라는 거에요.

있는 그대로만 보자

지금 이순간 내 몸의 상태만 지금 있는 그대로만 보자

해석하지 말고 보기만 하자.

지금 있는 그대로만

아픈 부분만 관찰하고 있었더니

순간 그냥 갑자기 누워 있다 말고 우울하다가 누워 있다 말고

갑자기 관찰하다가 벌떡 일어나게 되더라는 거에요.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는

혼자서 합장을 하고 앉아서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기 시작 했대요.

그런데 이게 계속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염하면서

꽤 오랫동안 관세음보살을 막 부르면서

자기는 관하려고 앉아 있었는데

저절로 관세음보살이 튀어나오더라는 거에요.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고속염불을 막 해서

주변에 가족들이 옆집 들린다고 조용히 했으면 좋겠는데

자기 딴에는 아까처럼 좌절해서 쓰러셔저 죽을 것 같이 있는 거 보다

차라리 이게 나겠다 싶어서 내버려 둔 거에요.

이 보살님이 관세음보살 염불을 계속 엄청 큰소리로 막 하는데

그런데 눈을 감고 계속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데

뭔가 툭 튀어나오더래요, 입으로.

입으로, 뭔가 툭 튀어나오더래요.

그래서 깜짝 놀라가지고 찾았대요.

찾았더니 돌이 나온 거에요.

입으로 나온 거에요, 입으로.

그래서 너무 신기해 가지고 이 돌을 가지고 병원에 찾아 가서

의사도 깜짝 놀라는데

의사한테 그랬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보통 화장실에서 하다가 나오거나 쉬를 하다가 나오거나 이럴 수는 있을 텐데

입으로도 나올 수 있나요?

특히 폐 부분에 있었던 건데

어떻게 입으로 나올 수 있는지 이해 할 수 없다고 그랬다는 거에요.

이 보살님도 본인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보면 관음경에 보면

우리가 풍파에 떠내려 가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 갑자기 마른 땅으로 도달하게 되고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염하게 되면 그 칼이 다 산산조각 난다.

큰 병이 있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염하게 되면 그 병에서 놓여날 수 있다.

이게 이런 도리입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를 하면

정법을 얘기하셔야지

그런 어떤 요상한 좋은 일 하나 있었다고

그게 불교겠습니까?

하고 여길 수 있는데요.

이것이 정법입니다.

뭐냐 하면요.

우리들은 내 생각 속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내 기본 상식 내 생각 속에서 벌어진 일만을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우주법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주법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

놀라운 이치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요

상상할 수 없는 이치가

제가 차마 이런 얘기까지 하면

여러분들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의 얘기들도 많이 알고 있지만 얘기는 안 하지만

정말 놀라운 어떤

정말 놀라운 어떤 일들이요.

이 세상에서는 사실은 많이 벌어집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잘 안 벌어져요

제가 말씀 드린 이 보살님 같은 경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공부해요.

이 분의 맹목적인 믿음이 그 힘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에요.

그러면 오장육부 전체가 부처님이 돼서 나를 돕기 시작해요.

도저히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앉아 가지고 관하고 있다가

갑자기 염불이 왜 나왔고

그게 옆 사람 민망하게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염불하게 됐는지?

그게 내가 시킨 게 아닌 겁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에요.

우주법계가 도와주려고 하니까

그게 하나 같이 연결이 되어서

어떤 직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냥 그 일을 하게 되는 거에요.

그것이 사실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더 깊은 차원에서 벌어지는

우리가 때때로 우리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차원의 힘을 일상적으로 쓰면서 살고자 명상을 공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명상을 공부하는 겁니다.

 

내 삶을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고

스스로 더 긍정적이고 것을 보고 밝은 면을 보고 함으로써

아름답게 삶을 가꿔갈 수 있어요.

 

꼭 괴로움을 통해서만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운 일이 생긴다.

그러면 야 이거 조그만한 업이 소멸될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업이 딴 사람 같으면 몇생을 괴로워 해야 될 걸

이 생에 한방에 끝낼라고 부처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엄청난 괴로움을 주셨구나.

내가 세번 생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교통사고 나서 다리 절뚝거리며 살아야 될텐데

한방에 없애려고 이렇게 아픔을 줬구나 하고 마음을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방편으로

어떻게 돌이키든지

이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서 받아 들이게 되면은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 (), () 삼문(三門) - 98



불교의 모든 종파는

(=깨달음), (=바름), (=청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역시

(). (), () 이 삼문(三門)

벗어나지 않습니다.


선종(禪宗)과 성종(性宗)이 걸어가는 길은

깨달음의 문인 각문(覺門)입니다.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유식종), 율종은 모두

정문(正門)을 통해 들어가는데,

모두 정지(正知)와 정견(正見)에 속합니다.

중도의 마음을 얻는 데 있습니다.


정토종과 밀종은 정문(淨門)을 통해 들어가

청정심(淸淨心)을 닦습니다.

청정심으로 지혜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만 정종과 밀종의 다른 점은

정종은 십육관경(十六觀經)에 의거하여

서방의 의정장엄과 부처의 자행타화(自行化他)

무량공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종은 관상(觀想)은 불보살의 신통한 도력을

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지도할 훌륭한 스승이 없을 경우

마의 경계에 빠지기 쉽습니다.


경계가 높으면 높을수록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부처와 마구니는 단지 한 생각의 사이에 있으므로,

범부는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마장에 대해서는

능엄경에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능엄경은 마구니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 마장은 모두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아상이 지어낸

합작품입니다.

신통을 구하고 탐하는 마음이 있으면 영락없이 그러한 마장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능엄경 공부를 반드시 해두어야 합니다.


최근세 중국에서 대세지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인광대사는 검소하고 청정한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그의 작은 도량에는 단지 3개의 방이 있을 뿐이다.


그 중하나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곳이며,

그 안에는 한 분의 부처님과

한잔 의 청수가 놓여 있을 뿐이며,

불상 뒤에는 크게 사()라는 글자가 하나 있는데,

무엇이든 간단하면 쉽게 놓아집니다

 

고통을 스승으로 삼으면

세간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 없게 됩니다.


장래 부처님이 오셔서 극락으로 인도할 때

가는 길 또한 시원시원하며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고 떠날 수 있습니다.


불자님들

불교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종교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

무소유의 길

무아의 길

중도의 길

열반의 길이

함께 사는 길이

모두 하나의 길입니다.

불법승이 하나의 문으로 돌아갑니다.


(=깨달음), (=바름), (=청정)

하나의 문으로 돌아갑니다.


그 문은 지혜와 자비의 문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한 문입니다.


염불을 지심으로 하여

내 마음이 부처가 되고

너와 내가 차별 없는

지혜의 마음

대자비한 마음을

일으켜봅시다.


그 마음이 한마음

일심(一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