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4. 19:3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최초의 비구니 마하빠자빠띠
율장 쫄라왁가10편
어느 때 부처님은 까삘라왓투의 사꺄족들이 사는 곳의 니그로다 승원에 계셨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부처님을 방문하여 예를 갖춘 후 이렇게 말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계율과 가르침에 여성도 출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오! 고따미여, 계율과 가르침에 여성도 출가하는 것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다시 요청하였지만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녀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나왔다.
부처님은 까삘라왓투를 떠나 웨살리의 큰 숲의 중각강당으로 가셨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삭발을 하고 노란 가사를 입고 많은 무리의 사꺄족의 여성들과 함께 웨살리로 출발하여 중각강당에 도착하였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발을 붓고 사지는 먼지로 뒤덮여서 문밖에 서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고따미여, 왜 그렇게 발은 붓고 사지는 먼지로 뒤덮여서 문 밖에 서서 울고 있습니까?”
“아난다 존자여, 부처님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계율과 가르침에 여성도 출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고따미여,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주십사고 말씀드릴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니,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발은 붓고 사지는 먼지로 뒤덮여서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여성도 부처님의 계율과 가르침에 출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다른식으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만일 여성이 부처님의 계율과 가르침 아래 출가를 하면, 그들도 예류과. 불환과. 아라한과를 성취 할 수 있을까요?”
“그들도 성취할 수 있지, 아난다.”
“부처님, 만일 그들이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를 성취 할 수 있다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부처님의 이모로서, 양모로서, 양육자로서, 부처님의 친모가 돌아가셨을 때 부처님께 젖을 먹여 길렀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여성도 부처님 계율과 가르침 아래 출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셨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을 29년간 길러주신 왕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위대한 열반
부처님 최후의 해
쌍윳따 니까야:47 사따빳타나 쌍윳따 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웨살리 근처의 벨루와 마을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웨살리 근처 어디든지 친구나 아는 이들이나 친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 우기 안거를 보내도록 하여라. 나도 바로 여기 벨루와 마을에서 안거를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우기 안거를 시작하였을 때에 부처님은 심한 병이 드셨다. 극심한 고통으로 사경을 헤맬 정도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 마음챙김과 선명한 알아차림으로 이겨내셨다.
부처님은 병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승원 뒤편의 그늘에 앉아 계셨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부처님이 무엇을 참아 내야만 했는지, 어떻게 견디어냈는지를 보았습니다. 저의 몸은 마치 약에 취한 것 같았고 방향감각을 잃어 버렸고 부처님이 아프셨기 때문에 가르침도 더 이상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비구 승가를 위하여 무언가 말씀하시지 않고는 마지막 열반에 들지 않을 거라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난다야, 비구 승단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이냐? 나는 안팎의 구별 없이 가르침을 그대들에게 다 주었다.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것은 없다. 만일 누구든지 생각하기를 ‘내가 비구 승단을 맡고 있다든지 또는 비구 승단이 내 지시 아래 있다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무언가 비구 승단을 위해서 말을 해야만 한다는 사람이다. ‘내가 비구 승단을 맞고 있다든지’라는 생각은 여래에게 결코 없다. 그러므로 여래가 비구 승단을 위해 무엇을 말해야 한단 말이냐!
아난다야, 나느 s이제 늙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내 나이 지금 80이 되었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의 힘으로 가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 끈의 힘으로 가는 것 같구나. 아난다야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모든 느낌들을 소멸하여 여래는 형상을 떠난 집중에 머문다. 오직 이때 여래의 마음은 더욱 더 안온하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자신을 귀의처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아난다야,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열반에 든 후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삼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수행자는 열심히 정진하는 최상의 수행자가 될 것이다.”
생과 사 / 김소월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 역시 글럴 듯도 한 일을,
하필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깨어 있음이란
진정한 깨어있음은, 어떤 분별도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분별없는 삶을 살고,
현재의 모습을 버리고 바람직해 보이는 모습을 취하려 하지 않고 현재를 고쳐서
미래의 어떤 상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그러한 삶이 바로 깨어있는 삶이다.
분별없이 사느 것, 그것만이 진정한 깨어있음이요, 진정으로 깨어있는 자는
어떤 모습에도 자유로운 자이다.
어떤 모습에 매이지 마라. 깨달음의 자리는 어느 특정한 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이 처하고 있는 이 순간 이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분별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삶부터 분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늘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삶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예전부터 그렇게 살았듯이, 자신의 삶에 깨어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 있는 자는 나와 남이 분별이 없고 좋고 나쁨의 분별이 없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남을 해치지 않는다.
물론 행동에 있어서 보기 좋고 나쁨은 있겠지만, 그것은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에 분별이 있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대들이 분별함을 멈춘다면 이미 그대들은 다 깨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삶이다.
천국과 지옥이 바로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느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즉, 한 생각에 있다는 것이다. 즉 삶에 문제가 있음이 아니라, 분별하는 그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한 생각을 놓아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래로 !!
- 윤기붕님의 <구하지 않는 삶, 그 완전한 자유>343 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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