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법

2015. 10. 31. 20: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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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행법

■ 안거(安居)

 

불교의 수행자들이 머문 바 없이 유행하며 수행하는 데는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곤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인도라는 나라는 여름의 비가 많은 기간이 되면 돌아다니기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가령 다닌다고 해도 대지에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었다. 이 까닭에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의 석 달 동안은 유행을 중단하고 일정한 장소에 머물면서 연구와 정진 등의 수행에 힘쓰게 되었는데, 이것을 안거(安居)라 한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무더운 여름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안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여름철인 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석 달 동안의 하안거(夏安居)와 겨울철인 음력 10월 보름부터 다음해 1월 보름까지 석 달 동안의 동안거(冬安居)를 제도화하였으며 우리나라도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안거의 행사가 선원(禪院)을 중심으로 행해지는데,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結制)라 하고 안거를 마치는 것을 해제(解制)라 한다. 특히 안거 중에 외출하는 것을 파하(破夏)라 하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달이 차기 전에 어머니 배를 가르고 나온 것과 같다고 하여 엄히 다스리고 있다.

■ 포살(布薩)

 

불교 교단의 구성원들이 원만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청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일정한 규범이 필요한데, 이것을 계율이라 한다. 따라서 이 계율은 불교 교단을 유지해 나가는 기반이 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구성원 각자의 생활이 실제로 어떻게 바르게 행해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살(布薩)이란 이렇게 교단 구성원의 생활이 실제로 계율에 입각하여 바르게 행해져서 청정성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고백, 참회하는 행사이다.즉 이 포살의 행사는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보름마다 한 번씩 즉 매월의 15일과 30일(혹은 29일)에 행해지는 것이 관례이지만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체로 안거 기간에만 행해지고 있다.

■ 자자(自恣)

 

자자(自恣)라는 것은 3개월에 걸친 여름의 안거 생활이 끝나는 날인 7월 15일에 안거를 함께 한 스님들이 모여서 각자가 자기 스스로 지난 안거 기간 중에 자신에게 범계(犯戒) 등의 허물이 있었다면 무엇이든 지적해 달라고 동료인 스님들에게 청하는 의식이다. 차례가 된 사람이 대중 앞에 합장하고 나서 말한다.

“저는 스스로 나와서 청합니다. 저의 행위와 언어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이때 만약 지적할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고, 지적할 것이 없으면 대중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 서로간에 허물을 지적해 주고, 지적 받은 사람은 그것을 고백하고 참회함으로써 승가 본연의 청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 탁발(托鉢)

 

출가 수행자의 생활수단은 그 방법에 엄중한 규율이 정해져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2가지 두타행(頭陀行)인데, 번뇌의 티끌을 제거하고 의, 식, 주를 간편히 하여 수행 정진하게 하는 열 두 가지의 행법이다.

이 12가지 두타행 중에 상행걸식(常行乞食)과 차제걸식(次第乞食)이라는 조항이 있다. 즉 항상 밥을 걸식하여 생활할 것과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鉢)이라는 것은 보통 발우라 부르는 것으로 12가지 두타행의 하나인 걸식을 행할 때 얻어진 음식물을 담는 그릇이다. 따라서 탁발(托鉢)이란 목숨을 발우에 기탁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걸식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탁발을 생활수단으로 정한 데는 두 가지의 종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첫째는 수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독소인 아만과 아집을 없애는 것이고, 둘째는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탁발의 제도는 부처님 당시부터 비구들이 행하던 것이었고, 지금도 남방의 불교권에서는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북방 불교권에서는 생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수행의 한 방편으로 탁발이 가끔씩 행해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비승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종단적으로 탁발 행위를 금하고 있다.

■ 단식(斷食)

 

불교에서 단식(斷食)이란 어떤 기원의 성취를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단식을 수반하는 정진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보살에게 정성을 드리는 기도수행(祈禱修行)에서 자주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 단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단식기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단식은 불교의 독특한 수행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성도하기 전 6년의 고행 기간 중에도 당시 인도의 수행법에 따라서 몇 개월을 먹지 않는 단식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행이 깨달음을 얻는 진정한 길이 아님을 알고는 중도행(中道行)을 말씀하셨다.

■ 용맹정진(勇猛精進)

 

불교의 정진이란 성불을 향해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육바라밀의 한 항목으로 정진바라밀이 있고 팔정도의 한 덕목으로 정정진(正精進)이 있는 것처럼, 정진이야말로 불교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수행법에는 염불정진, 참선정진, 기도정진 등의 정진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말하고 있는 용맹정진이란 일정한 기간 동안 자리에 눕지 않고 잠자지 않으면서 참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졸음을 막기 위하여 서로 마주보면서 좌선을 하는가 하면, 책임자가 장군 죽비를 가지고 다니며 졸고 있는 사람을 경책하기도 한다.

이렇게 용맹정진을 하는 이유를 보통 땅에 말뚝을 박는데 비유하고 있다. 즉 말뚝을 땅에 박을 때 계속해서 크게 해머질을 할 수는 없다. 몇 번은 살살 두드리고 다시 힘을 모아서 크게 내려칠 때 말뚝은 땅속으로 깊이 박히게 된다. 참선도 이와 같아서 평상의 정진에 의해서 얻어진 힘의 바탕 위에 용맹정진을 통하여 선정의 힘이 크게 증장되는 것이다

■ 좌선(坐禪)

 

인간들은 하루 종일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활동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인 나 자신의 근원을 묻게 되면 말이 막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온갖 일을 하되 온갖 일을 하는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고서 한낱 욕망이나 관습이나 환경 조건에 적응해 가면서 굴러가다가 마침내는 알 길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 이러한 자기 상실의 인간에게 참된 자기를 회복시키고,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따라서 참선이란 원래 서고 앉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고 앉는 데에 걸림이 없이 공부를 지어가자면 불가불 조용하게 앉는 데서 힘을 얻어야 한다. 즉 참선하는 데 있어서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는 것이고, 이렇게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좌선(坐禪)이라 말하는가 하면 참선 그 자체를 좌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좌선 방법은 선종(禪宗)의 종파에 따라서 자세히 규정하고 있지만, 종색(宗穡)선사가 저술한 <좌선의(坐禪儀)>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좌선을 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 두꺼운 방석을 깔고, 허리띠를 너그럽게 매고, 위의를 단정히 한 후에 결가부좌를 한다.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놓는다. 혹 반가부좌하는 것도 좋으나, 다만 왼쪽 발로 오른쪽 발을 누른다. 다음은 오른쪽 손을 왼쪽 발 위에 놓고, 왼쪽 손바닥을 오른쪽 손바닥 위에 놓아, 두 엄지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고, 서서히 몸을 일으켜 전후좌우로 여러 번 움직여서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는다. 현재 우리나라의 선원에서 행하고 있는 좌선의 자세는 대체로 이<좌선의>의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보편적으로 결가부좌보다는 반가부좌를 취하고 있다.

■ 간화선(看話禪)

 

인간과 천지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며,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곧바로 열어서 인간과 진리의 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공부를 참선이라 했는데 이것은 마음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깨달을 때 얻어지는 경계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다고 해도 그 마음가짐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간화선(看話禪)이란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말하자면 우주 인생의 근원을 철저히 규명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라고 하는 정형화되어 있는 어떤 사항을 참구하면서 수행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간(看)은 본다는 것이고 화(話)는 공안(公案)이라는 것으로서, 즉 공안을 보고 그것을 참구하여 마침내 크게 그리고 철저하게 깨닫는 다는 선(禪)이다.

■ 묵조선(默照禪)

 

묵조란 말은 마음자리의 본래 그대로의 체(體)를 반조해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묵조선이란 어떠한 문제의식인 화두와 같은 것을 갖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보는선, 즉 고요히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참선하는 선법이다.

■ 위파사나(vipasyna)

 

불교는 인간을 온갖 욕망 등의 번뇌에 얽힌 존재라고 하며 이 번뇌는 성불의 길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방해한다고 설한다. 다라서 불교의 수행이란 한없는 번뇌의 응시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환경에 맞추어서 가르침을 설하셨으며, 번뇌를 극복하고 퇴치하는 방법도 또한 각자의 번뇌에 알맞게 설하셨다. 불교 수행법이 여러가지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위파사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명상법으로서, 한역(漢譯)에서는 관(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이란 지혜로써 객관의 경계를 관찰하여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가령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면 인간의 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생각으로 관하여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대중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가능하면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서 자신의 마음을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데 집중하여 이것을 세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렇게 위파사나는 마음을 하나로 전심(專心)하여 지혜로써 불(佛)과 법(法)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생각으로 염하여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 화두(話頭)

 

화두(話頭)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공안이라 하는 것은 본래 관청에서 사용되는 문서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공정하여 범치 못할 법령이라는 뜻이 있다.

이 화두는 진리를 깨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이기도 하고 몸짓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이나 몸짓으로 보이되 실로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거기에는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써는 어림댈 수 없는 불조(佛祖)의 깨달은 법, 진리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참선공부의 문제지라고 할 수 있는 이 화두는 참선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제공하고, 이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할 수 가 있는 것이다.

■ 삼매(三昧)

 

삼매(三昧)란 산스크리트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쉬어 안정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이 삼마디는 등지(等持)라고도 번역되는데, 등(等)은 마음이 들뜨고 가라앉음을 여읨으로 평등하여 편안한 것이며, 지(持)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머무르게 한다는 뜻이다. 곧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산란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삼매는 감각적 자극의 영향이나 그 자극에 대한 일상적 반응을 초월하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따라서 삼매의 경지를 얻기 위해서는 규정된 방식에 따라 자신의 의지력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정신을 집중 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정신집중의 결과 바람이 자는 곳에서 파도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게 되고, 마음을 집중하는 동안 그것을 산란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대문에 감정은 고요한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흔히 간경삼매(看經三昧)라든가 염불삼매(念佛三昧)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것은 간경 즉 경전을 독송한다거나 염불을 할 때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환경을 놓아버리고 오직 독송이나 염불 그 자체에만 정신을 통일시킴에 의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아 고요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법담(法談)

 

어떤 사람이 견성을 했다고 했을 때 그가 과연 견성을 했는지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그 당사자를 시험해 볼 수밖에 없다. 이때 그 방법으로 언어가 사용될 수도 있고 어떤 행동으로 표현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외에 견성한 사람끼리의 진리에 입각한 법문의 문답을 하는 때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이 생겼을 때 서로간에 주고 받는 대화를 선가에서는 법담(法談)이라 하고, 특히 행동을 수반하는 법담을 법거량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법담에서 대두되는 언어나 행동은 범부의 사유나 관념을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괴이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피차가 견성한 선사(禪師)들이라면 바로 이곳에서 깨달은 곳이 확인되고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 인가(印可)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을 말씀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교(敎)라는 것이고, 이 말씀 외에 달리 깨달음의 마음을 전했는데 이것이 선(禪)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깨달은 마음이라는 것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밖에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한다.

선가(禪家)에서 최초의 이심전심은 부처님과 제자인 가섭존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대중 앞에서 법문은 하시지 않고, 단지 연꽃을 들어서 보이기만 했다. 다른 많은 대중들은 그의미를 몰라서 잠자코 있었지만 가섭존자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가섭존자의 깨달은 마음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법을 전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스승이 제자의 깨친 마음을 증명하고 인정하여 법을 전하는 것을 인가라고 한다.

■ 울력

 

사원에서 대중들이 함께 모여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을 울력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육체적 노동이 삶의 한 방편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행의 한 일과(日課)로서 다른 대중과 더불어 행해지는 노동이다. 이러한 수행의 하나로 행해지는 울력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중국 당나라 때의 스님인 백장(百丈)선사가 남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러한 울력의 전통은 많은 대중이 모여 있는 총림(叢林)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사원에서 행해지고 있다. 스님들이 밭에 나가 김매고 거름을 주며, 길을 보수하고 건물을 수리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울력이다. 그러나 울력은 육체적 노동이 지나쳐서 그 자체가 수행을 방해할 정도로 되어서는 안된다.

■ 칭명염불(稱名念佛)

 

염불이란 부처님을 염하는 수행으로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불교 일반에 통용되고있는 염불인데,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예배 찬탄하며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마침내 열반의 도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깊은 삼매에 들어 아미타불을 염하면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해 죄가 소멸되고 부처님을 보며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정토종의 염불방법이다.

염주등을 이용하여 칭명염불의 횟수를 세는 염부법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그 시간 동안 하는 염불법이 있다.

■ 관상염불(觀想念佛)

 

관상염불이란 고요한 곳에서 정신을 통일하여 부처님의 단정하고 장엄한 상호의 모양 등을 연상하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공덕에 생각을 응집시키는 염불법이다. 이렇게 염불하여 삼매에 들면 분명히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고, 한 부처님을 보게 되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일체의 업장(業障)이 소멸되어 극락왕생한다는 것이다.

■ 주력(呪力)

 

한역(漢譯) 경전에서 주(呪)라고 번역되어 있는 산스크리트어는 만트라(mantra). 다라니(dharani). 비드야(vidya)의 세 종류이다. 물론 주 외에도 만트라는 진언(眞言), 다라니는 총지(總持), 능지(能持), 비드야는 명주(明呪)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세 종류의 말이 함께 주(呪)라고 번역되는 것은 이 말에 비밀어(秘密語)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재난을 없애고 복을 부르며, 어떤 재해로부터 몸을 지킨다는 진언 혹은 다라니를 마치 참선을 할 때 화두를 참구하듯이 항상 외우고, 이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주력(呪力)이라 부르고 있다.

■ 기도(祈禱)

 

기도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 행으로 닦아 가는 데서 본래 완전한 진리의 공덕이 자신과 주변에 나타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바로 진리를 알면 생명력을 속박하여 나타났던 병도 사라지며, 자기 능력을 속박해서 가난했던 빈궁도 사라진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며 깨닫는다는 것은 그대로 스스로가 바뀌고 주변을 진리공덕으로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보살에게 구하여 얻겠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원만구족한 불보살님의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이렇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의 생명을 회복함에 의해서 일체를 성취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불교의 기도는 염불을 하여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 삭발(削髮)

 

흔히 절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 한다. 수행을 방해하는 근원인 아만과 교만 그리고 온갖 유혹의 감정은 무명(無名)에서 기인한다. 삭발을 함에 의해서 외형적으로나마 우선 원초적인 무명을 없애는 것이다.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것을 삭발염의(削髮染衣)라 하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는 것을 삭발위승(削髮爲僧)이라 한다. 이처럼 승려와 삭발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승려들은 반드시 삭발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본행집경>제18권에서는 부처님이 삭발하고 승복으로 고쳐입은 후 “나는 이제 비로소 참 출가인이 되었다”고 표현하고있다. 또한<사분율> 제51권에는 부처님이 머리가 긴 어떤 비구를 보고, ”깎으라 스스로 깎든지 남을 시켜 깎든지 하라”고 하신 계율이 있다.

■ 연비(然譬)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몸뚱이다. 그러나 불법의 진리를 구하고자 함에 있어서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믿음은 때로 도(道)를 위하여 왼쪽 팔을 끊어 달마대사에게 바친 혜가처럼 자기 육신의 일부를 바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중생들로서는 이와 같은 일은 쉽지 않다. 이 까닭에 불법에 대한 믿음과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의 표징으로 팔뚝의 일부나 혹은 손가락을 불에 태우는데, 이것을 연비라고 한다.

팔뚝의 일부분을 태우는 연비는 출가자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행해지는데, 득도식을 할 때 참회와 서원을 하면서 초심지에 불을 붙여 살갗을 태우는 것이다. 재가자의 경우에도 오계를 수지할 때 연비를 하지만, 요즈음에는 향불로 따끔하게 지지는 것으로 간략히 행하고 있다.

■ 경책(警策)

 

좌선을 할 때는 무엇보다 앉는 자세가 중요하고 특히 졸음은 절대 금물이다. 그래서 졸음을 수마(睡魔)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실제로 좌선을 하다보면 자세가 흩어지고 눈이 저절로 감겨지기 마련이다. 그때는 부득이 누군가가 이것을 지적하여 올바른 자세로 좌선하게끔 해 주어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기구가 경책(警策)이다. 경책의 생김새는 납작하고 평평한 긴 판자 모양의 막대기로 길이가 약 4자 정도, 위폭이 아래보다 약간 넓은 2치 정도인데,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책은 주로 재질이 부드러운 버드나무로 만들고 있다.

경책을 사용하는 데는 정해진 법이 있다. 경책을 쥔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흐트러진 자세를 보고는 소리나지 않게 지적하고, 그런 연후에 어깻죽지 부분을 이것으로 두세 번 때려서 자세를 바르게 하거나 졸음을 쫓게 한다. 이러한 것을 경책한다고 말한다.

■ 포행(步行)

 

좌선 중에 피로도 풀고 졸음을 쫓기 위하여 일정한 주위를 왕복하여 걷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것을 포행(步行) 혹은 경행(經行)이라 부른다. <사분율>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계율로써 경행할 것을 정하고 있다.

「그때에 비구들이 한데서 경행하다가 바람과 비를 맞고 볕에 쪼여 병이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경행당(經行堂)을 지으라’ 하셨다. 어떻게 지을지 모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길게 지으라’ 하셨다. 그리고 집 지을 재료를 주라고 하셨다. 이때에 상좌가 늙고 병들고 약해서 경행하다가 넘어지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새끼줄을 양쪽에 매고 그것을 잡고 경행하라’ 하셨다.」

또한 일종의 운동법으로서 경행의 이점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행에 다셧 가지 이익이 있다. 원행(遠行)에 견딜 수 있고 능히 사유할 수 있으며, 병이 적어지고 음식이 소화되며 선정에 오래 머물 수 있다. 」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는 보통 50분 좌선 후에 10분씩 선방 안을 줄을 서서 동글게 도는 것을 행하고 있다.

■ 간경(看經)

 

선의 사상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해여 선가(禪家)에서 경전을 보는 것을 간경(看經)이라 한다. 여기서 경전을 본다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경은 많은 경전에서 권하고 있는 경전의 독송(讀誦)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뜻을 달리하고 있다. 그리고 불법의 교리를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경전 저 경전을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을 수행삼아 오랫동안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 사경(寫經)

 

사경(寫經)이란 경문(經文) 즉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필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경전의 서사란 단순히 경을 옮기는 일이 아니고 그 이면(異面) 정신에는 깊은 신앙과 정진력이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경전의 서사 그 자체가 바로 신앙의 행위요 생활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인쇄문명의 발달로 인해 경전을 서사한다는 의의가 다소 상실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전법의 공덕 부분이고 그 자신의 신앙과 수행 또는 인격 형성을 위해서는 여전히 절대로 필요한 의식으로 계승되었다. 이것을 사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까닭에 사경은 다만 경을 쓰며 이해하는 것을 초월한 하나의 신행으로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신행은 그 경의 뜻을 이해하는 데서 구현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기의 원력과 신앙을 이 사경 속에 집어 넣어 힘을 키워가는 데 더 목적이 있다. 사경을 하다보면 자연 한자 한자에 마음을 쏟아 산란심이 없어지고 정신이 집중되는데, 이러한 경우 사경은 그대로 염불이요 기도요 참선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사경은 글자 한자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또한 법답게 진해오는 사경의식에서는 반드시 사경에 앞서 염불. 축원 등의 의식이 따르기도 하는 것이다.

■ 참회(懺悔)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짓는 죄과(罪過)를 여러 사람들 앞에 숨김없이 공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참(懺)이라 하고, 그 죄과를 뉘우치고 부처님이나 스승 혹은 대중앞에서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을 회(悔)라 하며, 이 두가지를 합해서 참회라고 한다.

의정(義淨)이 지은 《유부비나야》주석서에도 참은 용서를 비는 것이며, 회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죄과를 고백하고 죄를 제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참회는 수행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조건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부처님은 항상 제자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그때마다 참회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참회의 기회를 마련하였는데 보름마다 행해지는 것을 포살(布薩)이라 했고, 1년마다 행해지는 것을 자자(自恣)라 하였다. 참회는 출가의 수행자 뿐만 아니라 재가의 신도에게도 필수적으로 따르는 수행문이다. 《관보현경(觀普賢經)》에서는 재가자의 참회법으로 ①불.법.승 삼보를 비방하지 않고 육념(六念)을 수행하며 ②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며 ③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사람들을 바르게 하며 ④육재일에 살생을 하지 않고 ⑤인과를 믿고 일실도(一實道)를 믿어서 부처님의 정법을 신봉하는 것의 다섯가지를 들고있다. 참회할 때 외우는 것을 참회문이라 하며, 지금 현재 우리나아레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화엄경》<보현행원품>의 ‘지난동안 지은바 모든 악업은 무시 이래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두를 참회합니다’ 라는 참회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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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이병기 (1891∼1968)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게요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심령성장 心靈成長 / 성음법사

 

 

 번뇌가 일어나면, 대항하지 말고, 부끄러운 마음,

참회의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번뇌를 사라지게 하라.

    當煩惱現前不要對抗要用慚愧心

懺悔心感恩心來消融

 

성실하게 삶을 체험하는 것이 곧 선[]을 닦는 것이다.

    踏實的體驗生命就是禪修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몸이야말로,

일생의 가장 큰 재산이다.

    擁有身心的健康才是生命中最大的財富

 

 

별 / 이병기작사 이수인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