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싹틔운 그는 누구인가

2015. 11. 7. 20: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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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싹틔운 그는 누구인가


그 무엇이 싹을 틔워서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나를 싹틔운 그는 누구인가?

곧 참 나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씨앗을 잊고서 ‘지금의 나’에게만 매달리기 때문에 온갖 고에 휘말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씨’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최초의 씨앗은 이제 지금의 나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열매가 영글었다면 그 열매는 곧 처음의 씨앗과

다르지 않으니 지금의 나 속에서 참 나를 찾아야 한다.

 


자기로부터 우주의 근본이 나오므로 자기를 알아야 한다.

우주의 어떠한 작용이 위대하다 할지라도, 지구를 집어삼킬 힘이 있다 할지라도

자그마한 자기의 내놓을 수 없는 마음의 근본보다 더할 것이 없다.

광대하고 적적하면서도 신령함이 내 안에 남김 없이 깃들어 있으니 내 안의 불씨

하나가 온 우주를 다 감싸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사람의 뿌리는 모습이 없어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

러나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누구도 그 뿌리가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근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자기의

뿌리가 없다고 단정할 것인가. 목수는 자기 마음대로 집을 설계하여 짓지만 인간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마음먹은 대로 자식을 낳지는 못한다.

어떤 부모라도 목수가 집을 설계하듯 그렇게 자식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가 설계한 것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제기하는 삶의 비밀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집을 짓고 들어가서 사는 이치를 보라.

집을 지어 놓고 우리가 그 속에서 주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지 집이 있어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다.

그와 같이 이 육신을 지어 놓고 들어가 사는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라.

 


나의 육신은 마치 내가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영원치 않아 무상하다는 것을

지켜 보라. 나의 의식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지켜 보라.

지켜 보면서 과연 자기라고 하는 존재는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나왔다가 어느 구석에서

사라지고마는 허망한 존재이면서, 그나마 고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고통받다가 멸망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지를 밝게 알아야 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주재자, 참 자기가 있다.

 

 

육신이 나인가, 의식이 나의 주처인가, 의지가 나의 주처인가.

육신도 내가 아니고 의식도 내가 아니고 의지도 내가 아니다. 그러한 나는 비록

애지중지 해왔다 해도 다 비실재요 가화합이요 인연 소산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망하다 함도 당연하다. 중생은 여태껏 그러한 나를 위해 살았고, 그러한

나가 나인 줄로 아는 그릇된 소견을 갖고 있었기에 말이다.

 

 

열매는 씨앗에서 생겨났고 그 씨앗은 이전의 열매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전 열매는

또다시 그 이전의 씨앗에서 생겨난 것이니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열매는 미래로 또 그렇게 이어져 갈 것이니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어느 때의 열매를 ‘이것이 열매다.’하겠는가.

고로 끝간데 없이 이어지는 열매의 참 성품을 찾으라는 것이다.

 

 

나무를 살리려면 뿌리에 영양분을 주어야 하듯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면 먼저 본래

성품 자리를 밝혀야 한다.

본래 성품 자리인 주인공이야말로 곧 사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나를 있게 한 이도

주인공이요, 나를 데려갈 이도 주인공이다.

 


가을에 잎 떨어진다고 나무가 뿌리째 죽는 것은 아니다.

뿌리는 그대로 살아서 봄이 오면 다시 잎이 돋고 꽃이 핀다. 나무가 그러한 자기 뿌리를

보지 못하듯 인간도 제 뿌리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체가 없는 뿌리이지만 말하고 움직이게 하는 근본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니

먼저 참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과거로부터 수없이 탈바꿈을 해 가지고 자기 형상을 형성시켰건만 그것을 모른 채 지금

현실의 나만이 내 실상인 줄 알고 애를 쓰고 있으니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면서

갖가지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말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소소영영하게 보는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내가 있으니까 상대도 있듯이 바로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일체가

있고 또 우주 천지와도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 빛보다 더 빠르게

우주 천지 어디든지 연결되어 비춰볼 수 있는 신통 묘용의 한마음 주인공이야말로

바로 나의 진면목인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움직였다. 말하고 움직인 것을 내가 한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가? 내놓아 보라면 내놓을 수 있는가? 말하고 움직인 그것을 누가 했는가?

바깥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감지할 수가 없다. 그 근본을 주인공이라고 한다.

한마음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참 자기라고도 한다.

 


자동차는 운전자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주인이라 하고 운전자를 그 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일이겠는가. 주인공을 모른다면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숨을 들이고 내쉬는 것을 보라. 들이쉬고 내쉬지 못한다면 죽을 것인데 그것을 누가

하고 있는가. 그와 같이 생활 속에서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지 않는가?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끌고 왔고 지금도 끌고 가고 있는 근본, 이런 근본이 주인이

아니라면 주인이 있다는 것은 증명도 못할 것이다.

 

 

더러움에도 아예 물들 줄 모르고, 괴로움이란 것으로부터도 홀연히 초월하여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의 지고지락한 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그 영원한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워지는 계절 가을입니다

 

 

 

가을 하늘빛이

내 마음까지 푸르게 만들고

 

 

불어오는 바람이

느낌마저 달라지고 있습니다

 

 

어느새 고독이

마음의 의자에 앉아 심심한 듯

덫을 놓고 나를 꼬드기고 있습니다

 

 

길가에

가냘프게 피어오른 코스모스들이

그리움 얼마나 가득한지

 

 

몸을

간드러지게 흔들어대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가을이

내 마음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고독이 가슴에 안겨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코스모스가

나에게 살짝

사랑하라 고 말합니다

 

 

가을엔 왠지

사랑에 깊이

빠져들고 싶어집니다.....글 / 용혜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