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4. 12:2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중심이 없는 삶 / 제프포스터
**** 제프 포스터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첫번째 책 <중심이 없는 삶(Life without a center)>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 몽지 심성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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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 26년 전쯤, 부끄러움 많고 내성적인 아이 역할을 맡아 인생이란 무대 위에 등장했다.
몇 년 후, 나는 극도로 자의식이 강한 십대 역할을 연기했다.
더 나중에는 지독히 우울하면서 자의식이 강한 스무 살 풋내기를 연기하며
맥이 빠진 채 무대를 어슬렁거렸다. 그런 뒤 23살 때, 끔찍한 질병에 뒤이은
비교적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나서, 나는 영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는 영적인 깨달음, 해탈, 내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인간 조건으로부터의 탈출을 원했다!
나는 ‘에고’를 초월하고 싶었고, ‘나와 내 문제들’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으며,
내 ‘자아’를 잃고 싶었고, 신과 하나가 되어 내 불행한 인생을 뒤로 하고 싶었다!
나는 수십 명의 현자들, 구루들, 스승들과 수염이 텁수룩한 철학자들이 쓴
수백 권의 종교/영성 서적들을 힘겹게 읽어 나갔다. 나는 읽고 또 읽었고,
명상을 하고 채식을 하며 형편없는 음질의 mp3에서 행복한 인도 사람들이
내게 ‘고요한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지만,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은 여느 때보다 더욱 치열하게 타올랐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른바 저 ‘깨달은’ 사람들이 분명히 발견한 것 같은
완전히 고요한 상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에게도 분명 평화롭고, 고요하며
명료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그것들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항상 천국에 머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평범한’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과 이른바
나의 모든 ‘심리적 짐 가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깨달음에 중독되었다.
※
세월이 어느덧 흘러 오늘에 이르러, 탐구는 끝났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것이 통찰되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그것은 지금, 바로 지금, 통찰되고 있다.
깨달음 같은 것은 없다. ‘궁극적인’ 상태는 없다. 명상을 하여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은 없다. 에고를 ‘없애는’ 방법은 없다.
그것들은 에고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느낌, 분리된 자아감을 유지하려는 방법에 불과하다.
탐구는 현재 사실인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가 삶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오직 이것만 있기 때문에, 탐구는 헛수고다.
오직 이것! 책을 붙잡고 있는 손들 사이의 느낌. 심장의 박동. 바깥의 아침에
오가는 차량들 소음. 먹을 것을 바라는 고양이.
그것이 언제나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해탈을 구하는가?
※
수년간 탐구하였으나 결코 찾지 못한 다음에야, 그 모든 것의 쓸모없음이
통찰되었다(되고 있다). 이 평범한 삶이 이미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영적 행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이것을 알기가 너무나 어려워 보인다.
사실, 자유를 향한 어떤 길도, 바로 그것의 존재 자체가,
자유는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것이 해탈은 아니란 것을,
이 순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내포한다.
우리는 현재의 행복보다 더 나은 어떤 행복이 있는 미래를 원하고 필요로 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이 순간이 삶의 유일한 의미이고,
이 순간이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늘 가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미래의 구원이라는 관념에 갇혀있는 마음에게는 매우 도발적인 것이다.
“이것이라고? 이것이 그것일리 없어!” 우리는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해탈이고, 깨달음이고,
신(마음 내키는 대로 불러라!)이다.
만약 이 순간에도 찾는 것이 있다면,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그것 역시 해탈이고, 깨달음이고, 신이다. 해탈은 무엇이든 다 포함한다.
이것은 지적인 수준이나, 그 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수준에서도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는’ 욕구는 단지 더 많은 추구를 낳을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추구는 사라지고
깨닫게 될 거야.”라고 우리는 자신에게 말한다.
지금의 이해 부족은 또 다른 현재의 모습이고, 그것 역시 해탈이고, 깨달음이고, 신이다.
현재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 통찰될 때, 커다란 편안함,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커다란 ‘받아들임’이 찾아온다.
이것은 성취될 수 있는 뭔가가 아니라, 이미 있는 무엇이다.
이미, 이 편안함이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끊임없이 다른 뭔가를 추구하는 것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실제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언제나 이것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이다.
※
요즘은, 존재의 어떤 높은 차원에 도달하려 하거나, 나의 ‘참나’를 찾으려 하거나,
신과 하나가 되려는 욕망 없이, 그저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일만 있다.
이제 내게는 분명하다. 이 평범한 삶이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모든 것이다.
우선 먼저 찾아야 할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바보 같아 보이지 않는가?
중심이 없는 삶 2 / 제프 포스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탐구의 끝이다.
자유와 행복 그리고 깨달음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발견된다.
컴퓨터의 팬이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 왼쪽 발에서 따끔거리는 느낌,
가지에서 가지로 왔다 갔다 하며 짹짹거리는 정원의 새들...
왜 우리는 결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이 순간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삶의 어느 순간 우리가 이것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골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참된 본성이 그 모든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종류의 상태,
모든 생각이 그 안에서 녹아버리고, 에고가 불타서 영원히 사라지고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어떤 상태. 다시 말해, 그것은 현재의 이 상태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어떤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지금, 오직 저쪽 나무에서 뛰어노는 작은 참새의 소리, 심장의 박동,
방금 우려낸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부드럽게 내 뺨을 어루만지는 아침의 미풍뿐...
그런데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 거기에 있지 않지만, 머잖아 언젠가는, 어쩌면, 어쩌면 몇 분 안에라도
책에서 그렇게 많이 읽었던 그 상태에 도달할 거야!
그 상태가 아닌 상태, 그 자유로움, 그 평안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에서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은 지금 일어난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생각들처럼, 바로 지금 일어나는 생각이다.
모든 생각들은 현존하는 생각들이다. 모든 소리들은 바로 지금 들리는 소리이며,
모든 장면들은 바로 지금 보이는 장면들이다. 현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생각은 단지 과거와 미래의 환상일 뿐이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이 깨달음의 상태, 해탈의 상태는,
당신이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반드시 바로 지금 성취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취는 시간을 암시하고, 자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성취할 누군가와 그것이 성취될 시간 말이다.
절망적이고, 절망적이고, 절망적이다!
오직 지금만 있다. 오직 이것만 있다.
이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것의 이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의 현존을 부정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찾는 것은 이미 항상 존재하는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임(oneness)을 찾는 것은 하나의 부정이다... 오, 당신은 이해하게 되었다.
역설은 더욱 깊이 나아간다.
왜냐하면 하나임을 찾고, 해탈을 찾고, 평안을 찾고, 자유를 찾는 것...
그 찾는 것조차 단지 하나임, 해탈, 평안, 자유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찾을 수 없고, 그것은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은 회피할 수 없다.
※
그렇게 평생을 찾아 헤맨 끝에야, 완전히 명백한 것이 그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완전히 명백한 것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임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다!
이것은 잃어버릴 수 없고, 이것은 찾을 수 없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으며, 이것은 못 본 척할 수 없다.
그것을 회피하면, 그것은 그저 하나임이 하나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을 못 본 척하면, 그것은 하나임이 하나임을 못 본 척하는 것이다.
그것을 찾으려고 애쓰면, 그것은 하나임이 하나임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여전히 찾는 것이 있는가?
괜찮다.
여전히 고통이 있는가?
그것 역시 괜찮다.
고통이, 희망이, 절망이 있는가?
그것 모두 괜찮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다.
탐구의 종말은 급진적인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급진적인 수용이다.
그리고 이 수용, 이 통찰은 당신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성취가 아니다. 얻으려 애쓸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
통찰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탐구에 몰두할 수도 있고,
편안함, 해방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두 괜찮고, 그것은 모두 멋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놀이의 일부이다.
작은 참새가 가지에서 가지로 깡충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직 참새만이 있는 것이, 오직 깡충깡충 뛰는 것만이 있는 것이,
오직 ‘짹짹’거림만 있는 것이 보일지도(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하나임이다. 시작도 끝도 없다. 목적이나 목표, 의도도 없다.
작은 참새는 그 자신을 찾거나, 해탈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
콧방귀(짹소리?)도 뀌지 않는다. 그것에게는, 단지 깡충 뛰는 것만으로도,
단지 다음 벌레를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자연에 끌리는 이유일 것이다.
동물들은 개체성이라는 부담감, 자기중심의 부담감, 이미 사실인 것보다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부담감에서 매우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위대한 해탈은 이미 여기,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것-바로 이 순간 이미 명백히 주어진 것-은 존재하는 모든 의미이다.
이것-화장실에 앉아 있거나, 점심을 먹거나,
가까운 가게에서 방과 우유를 사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목적이다.
목적 없음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그 목적에 대한 추구이고,
무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그 의미에 대한 추구 자체이다.
※
이것 이상의 것은 없다. 그것과 사랑에 빠지거나... 말거나.
알다시피, 양쪽 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봄으로써 얻는 것은 없다.
이것은 성취가 아니며, 오랜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지능이나 기술,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와도 상관없으며, 노력이나 인내 또는 다른 어떤 것과도 상관없다.
자유와 깨달음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결코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 몽지릴라 밴드에서 몽지님 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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