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강병균 교수

2016. 1. 9. 19: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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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어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고 마는 것
그리고 지나가버린 것은 훗날 소중한 것이 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쉬킨>



I. 조계종 총무원의 기상천외한 발언

최근 출가승단을 불교자본가라 선언한, 속세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글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2015.5.13일자 법보신문 기고문). 출가승단이 불교자본가라는 선언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선언이 아닌가 한다. 서쪽에서 무소유로 출발한 불교승단이 동쪽 끝에서 마침내 자본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하여 무소유의 종교가, 2,500년 만에,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승려들로서는 대승경전의 보디사트바의 길을 흠모하더라도 행하기 어려우며, 화엄경 십지품의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을 펼치며 자비행을 하는 것은 염불이나 설법으로 할 수밖에 없으며, 10바라밀의 보살행은 재가신도들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불교역사에서 대승은 재가불자들이 시작했으니 대승 바라밀행은 재가신도들이나 하라고 주문했다. 정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승려들이 최소한 동료 승려들과 주변의 신도들에게 특히 보살들에게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을 펼치며 자비행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모 아니면 도란 말인가?

스님의 주장에 의하면 승려들은 불교재산이나 관리하면서 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 정말 수구보수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수십 년 동안 그리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리 살겠다는 주장이다. 정규직 스님의 주장이다. 비정규직 스님들의 의견은 어떨까? 즉 안정된 수입이 없는, 그리고 집도 절도 없는, 무산자(無産者) 민초 스님들의 의견은 어떠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이 불란서 대혁명보다 무려 2,300년 전에 자유·평등·박애를 주장한, 원조 진보주의자, 부처님의 제자가 맞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신의 억압과 심적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인 해탈, 사람 차별하는 계급제도가 없는 절대적인 평등, 그리고 동체대비의 박애정신인 자비심을 보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스님은 2009년 12월에 출간된 ‘깨달음과 역사’라는 저서를 통해서 바라밀행을 통한 현실참여를 강조한 분이므로, 이번에 나온 주장이 그냥 나온 주장은 아닐 것이다.

스님은 저서출간 직후인 2010년 2월 18일 불교평론의 열린논단 강연에서 ‘깨달음과 역사’를 주제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진정한 대승경전의 면목은 무상, 무아 또는 공이나 진여라는 연기적 세계에 살면서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바라밀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바라밀행을 강조하던 스님이 어떻게 해서 5년 만에 ‘출가승단은 불교자본가로서 불교재산이나 관리하면서 살면 된다. 10바라밀행은, 출가승려들로서는 역부족이니, 재가신도들이나 하라’는 사상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2013년에 조계사에서 호법부 공권력에 의한 적광스님에 대한 폭행은, 조계종 승려들이 교육원장 스님의 지도 아래,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행을 포기한 결과인가?

(필자는 이미 몇 년 전에 바라밀행을 강조하는 스님의 책을 읽었기에 그동안 조계종의 혼란에 대한 스님의 침묵이 의아했으나, 며칠 전 스님의 기고문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사이에 사상이 바뀐 것이었다.)

이런 사상의 전향은 5년 전인 2009년 11월 5일에 조계종 교육원장에 취임한 이래로 지금까지 조계종 고위직에 머물며 냉엄한 현실을 목도(目睹)한 것이 원일일까? 이상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크레바스에 빠진 것일까? 지금 삶이 현상유지만 해도 너무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형이상학적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재가신도들이 모르는 모종의 깨달음이 승가에 숨어있는 것일까?

왜 깨달음은 좌선을 통해서만 올까? 세간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일까? 유마경의 사상이 그런 것 아닌가? 유마거사가 좌선을 했다는 언급이 있는가? 선불교의 창시자나 다름없는 육조스님은 좌선을 하였는가? 본시, 선불교를 지부로 둔, 대승불교는 세간에서의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가? 초기경전을 봐도 언하에 깨닫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왜 24시간 좌선을 해야만 하고, 또 왜 수십 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야만 하는가? 동중선(動中禪)이란 무엇인가? 요중공부(搖中工夫)란 무엇인가? 방거사도 부설거사도 깨달음을 얻었다는데, 사판승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건 불가능하단 말인가? 고위직 사판승일수록 더 어렵단 말인가? 그냥 바라밀행을 하면 안 되는가? 바라밀행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아는 대승의 핵심사상은 이렇다. 최후의 깨달음까지 미루고, 즉 영원히 포기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계로 되풀이해서 무한히 윤회를 하면서 바라밀행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원력수생(願力受生)이라고 한다. (이교도들까지도 대승이란 이런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이게 너무 높은 목표라서 하기 힘들다면 현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일부 승려들만이라도, 특히 타에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승려들만이라도, 안온한 열반을 버리듯이 안락한 삶을 버리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하듯이, 세간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바라밀행을 하면 된다. 하지만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주장은, 그리는 할 수 없고 그냥 (불교)재산관리인으로 안락한 삶을 누리겠다는 소리다.

(고위공직자들 재산공개법을 벤치마크해서 고위승려들 재산공개법을 만들어야 한다. 안락한 삶을 누리려면 분명 충분한 재산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고 그러면 재산을 지키느라 보살행을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윗물이 이러면 아랫물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현재진행형인 조계종 총무원이 개입한 고위승려들의 어지러운 행위들에 비추어보면, 그리고 문제승려들의 그 당당한 모습에 비추어보면, 현재까지 6년 동안 조계종 교육원장으로 봉임하고 있는 현응 스님의 선언은 일종의 커밍아웃(coming out)으로 볼 수 있다. 고색창연한 대승 저택의 벽장에 숨어있던 소승의 커밍아웃! 저간(這間)의, 아니 지난 수십 년간의, 자신들의 행위를 뒷받침하는 반석과 같은 철학을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우리 출가승단은 불교자본가이므로 불교재산이나 관리하며 살겠다. 우리더러 보살행을 하라고 강요하지 마라. 역사적으로 대승불교는 재가자들이 주도한 것이다. 그러니 보살행은 재가신도나 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간의 모든 문제를 한방에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놀라운 위업을 이루어냈다.

 

지대추구행위(rent seeking)인 문화재관람료 강제징수 등 반(反)바라밀행적이고 독점자본주의적인 행태에 대한, (고위승려들에 의한) 룸살롱 딸린 모텔 소유 및 경영에 대한, 삼보정재 절땅 팔아먹기에 대한, 국보급 문화재 절도에 대한, 금권선거에 대한, 국내 도박 및 해외원정 도박에 대한, 그리고 호법부 공권력을 동원한 폭력행위에 대한, “어떻게 대승이 저럴 수 있나?” 하는 문제제기를 원천적으로 무효화시킨 것이다. (조계종단은 대한민국의 명승지를 독점하고 있다. 문화재관람료 징수는 성(聖)과 속(俗) 사이에 돈으로 금을 그어 성속을 분리시키는 악덕 토지자본주의적인 행위이다. 동시에,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는 위대한 화엄사상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 권승들이 대승이 아니고 소승이라는 것이 만천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부동산 및 금융 자본가들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실로 체로흑풍(體露黑風)이 아닐 수 없다. 장장 2,000년 동안 소승불교를 비하하고 멸시하던 대승불교가 마침내 소승불교로 대전환을 한 것이다. 그것도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대승불교국가 대한민국에서.

 

도대체 이들은 세간의 비난에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不動心)을 제공하는, 재가신도들이 모르는, 어떤 모종의 깨달음을 이룬 것일까? 아니면 화엄의 ‘빽빽한 숲’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

 

II. 화엄경을 오해한 환망공상적 깨달음

 

환망공상의 세계를 건립하는 법이 있다. 화엄 만신(萬神) 가상세계 진입법이다. 

설사 화엄경에 나오는 숱한 신들 보살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런 존재들이라는 이미지를 마음에 건립함으로써 그런 세상으로 들어간다.

휘황찬란한 보살의 신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실재세계는 6종 12종으로 다양하게 흔들리지 않지만, 큰 지진이 나지 않고 거대한 유성이 충돌하지 않고 핵폭탄이 터지지 않는 한 흔들리지 않지만, 마음에 건립한 그 세계는 흔들린다. 앉은 자리가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린다. 시시때때로 흔들린다. 크게 흔들린다.

실재세계에서 석가모니부처는 아직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하루 한 끼 탁발하고, 숲에 정좌하고, 기바의 치료를 받고, 문답을 주고받고, 선정을 닦고, 오른쪽으로 누워 잤건만, 그리고 소박한 삶으로 몸과 마음이 질박하였건만, 그 분을 직접 본 적도 없는 후대 제자들은 더없이 화려한 깨달음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곳에선 잠자리 날개 같은 채색 비단 옷과 치렁치렁한 보석장신구와 복잡한 디자인의 황금보관은 기본이다.

(서울은 안 가본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다. 가본 적이 없으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가본 사람을 제약하는 경험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생전에 예수를 본 적이 없는 바울은 신약에서 누구보다도 화려한 언변으로 미증유의 예수학을 펼친다.)

설사 깊은 산속에서, 굴속에서 홀로 수행하다 깨달음을 얻어도 알아주는 이 없어 외로운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그 사람을 천신, 산신, 수신, 화신(火神 Agni), 목신, 임신(林神), 풍신, 뇌신(雷神), 운신, 용신(龍神 naga), 야차, 제석(帝釋 Indra) 등 잡다한 신들이 몰려와 둘러싸고, 찬탄하며 떠받든다. 세계가 자기 모공(毛孔)으로 들어오고, 자기는 티끌 속으로 들어간다. (깨달은 사람 곁에 갈 때는 조심하라. 아차하면 그 사람 모공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갑자기 의식이 확장되어 삼천대천세계를 품고, 급기야 안팎이 뒤집어지며 삼천대천세계로 변한다.

이런 세계는 현실과 관계가 없다. 전쟁, 기아, 살육, 가뭄,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화엄세계는 전혀 변함없이 찬란한 빛을 발한다.

위대한 가상세계이다. 오랜 수행을 하다보면, 처음에 벼락 맞은 듯 느꼈던 크고 작은 인식의 전환도 어느덧 시들해진다.

(아직 어둠에 묻혀 사는 사람들을 지도하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인식의 전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건만 홀로 칩거를 하니, 힘든 일인一人 노역이다. 그래서 뇌가 자연스럽게 비물질적인 진통제로 고안한 것이 이런 가상세계이다. ‘화엄 엔도르핀’이다. 인간은 거울세포를 지닌 군집생명체인지라 타인의 심적 변화를 같이 경험할 수 있다. 특히 고수는 하수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마음이 젊은 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같이 느끼고 그래서 즐거워진다.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어떤 경험이든 경험은 과거가 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뇌는 더 강렬한 경험을 원한다.

세상에, 사회에, 군집에 살면 세파(世波)가 뇌에 전기·화학적 자극을 가한다. 그런 일이 없는 수도승들은 무슨 일로 뇌에 자극을 가해야 할까?

판타지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세계를, 하나도 특이할 게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자극적이고 현란하고 특별한 세계로 리모델링하느라, 즉 그런 세계를 상상으로 뇌 안에 건립하느라, 뇌를 정신없이 바쁘게 만든다.

홀로 굴 안에 있어도, 사회와 유리되어 살아도, 화엄신중과 신격보살들은 찾아와 말을 걸고 같이 산다. 식사 때면 천녀가 하늘나라 음식(天供)을 한 상 가득 날라 오기도 한다. 배는 비어도 마음은 배불러 기쁘기 한량없다. 남들은 혼자서 뭐가 그리 즐겁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 다양한 귀신들의 세계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시시를 취하고 ‘환망공상’ 마약을 섭취하면, 시공간이 뒤틀리고 견고한 세상이 연기처럼 흐물흐물해진다. 몸과 마음을 이루는 물질세계와 비물질적 법칙들이 눈녹듯 사라진다. 이런 물질적 제약과 사회규약의 증발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삶을 만든다. 홀로 승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그 누구도 일부러 찾아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자기만의 화장묘장엄(華莊妙莊嚴)세계로 들어간다. 가상세계이다. 마음에 넘칠 정도로 많이 만들어낸 아바타들을 치장하고 꾸미기에도 시간이 태부족한 가상공간이다.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세계는 내가 건립하기 때문이다. 물질적(眼耳鼻舌身)·비물질적(意)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재료를 이용해 내 안에 창조하기 때문이다.
본래 상징하고 찾던 깨달음의 세계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휘황찬란한 환망공상의 세계만 남았다. 그 고치 속에 무형의 천만 겹 채색비단실로 질기고 두텁게 집을 짓고 보랏빛 애벌레는 탈출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환망공상(幻妄空想)이 건립한 가상세계에 산다. 철저히 현실과 유리되어 산다. 그 세계의 ‘지혜와 자비’는 그 세계에만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이지, 현실세계와 무수히 상호관계를 맺는 궂은 연기적 존재가 아니다. 화엄경을 독경할수록 환희와 기쁨은 넘치지만, 소외된 현실세계는 멀어져만 간다.

화엄경이 주는 만신전(萬神殿)의 깨달음은 현실과 유리된 환망공상의 깨달음이다. 

III. 무상이 주는 위안

푸쉬킨 말 맞다나,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가버린 것은 훗날 소중한 것이 된다. 불교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계종이 타락했다고 한탄을 하고 열불을 내지만, 진짜 말세가 오면 아마 지금을 소중한 시절로 되돌아보고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쉬움에 한숨을 내쉴 것이다. 차라리 그때가 나았구나! 진실로 무상(無常 ever changing 덧없음)이로구나!  늙어가는 이에게, 그리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중생에게, 과거는 촌음(寸陰)일지라도 모두 소중하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저랑같이 한잔 하실래요

안녕 하세요~~

그리움님들 !!

오늘은 커피 대신 이렇게 준비를 해봅니다~~

막걸리 한잔에 안주는 뭘로 먹을까?

 

벌떡주

시원한 생맥주

시원한 맥주와 치킨으로

소주에





짠~~!!
주고받는 술잔속에 싹트는 사랑~~?? ㅋㅋ


부담갓지 말고 맘것 드세요

 

하늘이 술을 내리니... 천주(天酒)요

땅이 술을 권하니... 지주(地酒)라

내가 술을 좋아하고

술 또한 나를 졸졸 따르니

내 어찌 이 한잔 술을 마다하리오.

그러하니 오늘밤 이 한 잔 술은

지천명주 (地天命酒)로 알고 마시노라 ...

        

가실려고요 ..?? 동동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

막 잔인데.....

 


얼큰한 찌개도 드시고~~


다 드셨으면 가시기 전에

미소마음과 정성을 담은 차한잔 씩 ..

잊지 마시구요~~ㅎㅎ



 





 


ㅎㅎㅎㅎㅎㅎ

너무 드신건 아니겠죠?

지나친 음주는 패가망신 한데요 ㅎㅎ

적당히 드시고

2016년 붉은 원숭이 해인

병신년 알찬 설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