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한 가지만 하라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생물은 갑작스레 닥치는 위험으로 목숨을 잃는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생물은 미래에 대한 가설을 세운다. 변화하는 주변환경에 맞추어, 계속해서 가설을 업데이트한다. 더 나은 가설이 나오면 옛 가설은 폐기된다. 그래서 중간가설이 틀리더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칼 포퍼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대신에 우리의 가설을 희생시키면 된다." 중간에 많은 가설이 살해당하더라도 결국 올바른 가설을 세운 즉 올바르게 예측한 생물은 살아남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생명체는 생존확률을 극대화시킨다. 따라서 지금 현재, 미래에 살지 못하는 개체는 사멸(死滅)할 확률이 커진다. 현재에만 사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 살아야 하며, 때로는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살아야 한다.
I. 선불교의 가르침 삼매의 효능과 부작용
선불교(禪佛敎) 가르침 중에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라’는 것이 있다.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고, 똥을 눌 때는 똥만 누라는 말이다. 똥 누면서 신문을 보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이다. 하하하. 따라서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어야지,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회사일이나 집안일을 생각하면 안 된다. 밥을 다 먹고 나서, 회사일이나 집안일 등을 생각하라는 얘기다. 이렇게 하면, 밥 먹고, 똥 누고, 신문 보고, 일을 하는 즐거움이 폭증한다고 한다. 소위 식삼매락, 배변삼매락, 독서삼매락, 사삼매락이다 (食三昧樂, 排便三昧樂, 讀書三昧樂, 事三昧樂).
그러나 이런 일은 재가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일체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출가자들에게는 가능할지 모르나, 자신과 가족의 의식주를 얻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타인과 경쟁해야 하는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경쟁이 치열하고 급변하는 상황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전 세계국가들이 뒤엉켜 이전투구를 벌이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의 오늘날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비가 의뭉스럽게 오는 날, 논을 돌보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농부의 마음은 온통 논으로 가있다. 경험을 불러와 일어날 수 있는 가상 상황을 마음에 그려보며, 어느 물길을 따라 적의 수군이 공격해 올 것인지, 그리고 어느 논둑이 버티지 못하고 터질까, 대책을 궁리한다. 만약 농부가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그 사이에 논이 망가질 확률은 커진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반드시’가 아니라 그리 될 ‘확률이 크다’는 얘기다. 하지만 수학법칙에 의하면, 확률이 작은 일도 횟수가 쌓이면 반드시 일어난다. 그러므로 범사에 조심하여야 한다.)
뉴기니 밀림에 사는 석기시대 원시인들은, 아침에 숲에 들어가 용변을 볼 때, 용변을 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없다고 증언한다. 방심하다가는 숲에 매복하고 있는 적대부족민이나 사이가 나쁜 마을사람에게 화살을 맞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을 끝내고 엉덩이를 드는 순간, ‘똥꼬’에 어스름하고 부스스한 숲에서 날아온 화살이 적중하는 것은 최악의 사태이다.
특히 오줌색깔이나 오줌발 세기와 굵기에 과도한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느라 넋을 잃으면 그사이에 공격을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용변을 보면서도 동서남북사유상하, 시방(十方向)을 경계해야 한다. 공격의 이유는 여자약탈, 복수, 명예획득, 성인식용 머리획득 등등 가지가지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저절로 혼자 힘으로 날아갈 리 없는 화살이 날아가는 데 이유가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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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바투타의 여행경로. 아프리카, 인도, 중국까지 여행했다. 그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배변한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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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바투타 (1304-1368) |
아랍세계 최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가 한번은 아프리카 말리의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변을 보고 있었는데, 한 원주민이 앞에서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다. 처음에는 무척 기분이 나빴는데, 알고 보니 혹시라도 악어의 공격을 받을까봐 경계를 서준 것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눈맞춤은 사랑의 표시이고 남자들의 눈맞춤은 적대감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쳐다봄을 당하는 것은, 누구 할 것 없이, 분명히 기분 나뿐 일이다. 특히 거시기가 나오는 중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악어에게 엉덩이를 물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다. 하하하.)
북아메리카의 우두머리 사슴은 발정기가 되면 무리의 암컷들과 짝짓기 하느라 그리고 다른 수컷들의 도전을 물리치느라, 수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심신을 혹사하다가 발정기가 끝날 무렵 기진맥진해 죽는다. 먹지도 않고 짝짓기에만 몰두한 결과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동물들은 교미를 하면서도 끝없이 경계한다. 교미를 할 때가 가장 공격에 취약하며, 따라서 교미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기동력도 급격히 감소한다! 이 사실은 운동회에서 2인3각 달리기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사랑에 빠져 한 몸이 된 메뚜기 쌍을 잡아본 사람도 안다.)
교미의 열락에 빠져들면서도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된다. 그래서 통상 동물들의 교미시간은 무척 짧다. 심지어 사자조차도 일회 교미 시간은 수초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자주 해서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발정기간에 수백 번을 한다. 그러므로 교미 중에 교미에만 집중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교미는 생(生)과 사(死)의 교차점이다! 삶과 죽음의 예술이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 순간 마음이 사라지니 마음의 죽음이요,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니 몸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새 생명의 탄생과 교차한다. 이런 일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순결한 수도승들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용서를 빈다.
암살범의 입장에서는, 암살대상자가 마약이나 잠에 취해있을 때, 살해하기가 가장 쉬울 것이다. 자다가 동침한 여인에게 살해당한 훈족의 왕 아틸라는, 잠잘 때 너무 잠만 열심히 잤기 때문에 목숨을 빼앗긴 경우이다. 깨어서는 전 로마제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아틸라도 잠에 들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가끔씩 깨는 습관이 있었으면 살해당할 확률이 급격히 감소했을 것이다.
(고대 동양 장수들이 ‘눈을 뜬 채로 잤다’는 신화는 역설적으로 영웅조차도 잠 앞에서는 범부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한다. 삼국지의 장비는 눈을 뜨고 잤지만 자는 중에 자기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온혈동물인 포유동물과 조류에게 나타나는 렘수면(REM 수면, 수면 중 안구가 급속히 움직이는 현상. 렘수면 중에는 거의 항상 꿈을 꾼다)은,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유력한 설이 있다. 그러므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잠을 잘 때는 잠만 자야 하는가? 꿈을 꿀 때는 꿈만 꾸어야 하는가? 종종 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수가 있다. 유명한 과학자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인에게 “음, 문제를 해결했어, 아침에 알려줄게” 하고는 즉시 다시 잠에 들었다고 한다(아마 그가 잠에서 깬 것은 아니고, 일시적인 몽유병증세였을 것이다).
그는 꿈에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역사상 꿈에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잠을 잘 때는 잠만 자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꿈을 꿀 때는 꿈만 꾸어라’라고 말을 바꾸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만약 상당히 등급이 높은 악몽을 꾸고 있다면 큰일이다.
(특히, 꿈속에서, 사이가 나쁜 상사나 경쟁자가 자기 몸통위에 올라앉아 길고 억센 손가락으로 목을 조르면 긴급사태이다. 특히 심장이 약한 사람은 이런 일로 죽을 수 있지만, 막상 죽으면 아무도 진짜 사망이유를 알 수 없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의 예상처럼 과학의 발전에 따라 타인의 꿈에 침투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꿈을 통한 심장마비 살인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인도 중국 한국의 선도(仙道)에서는 타인의 꿈에 들어가는 기술이 이미 수천 년부터 전해 내려온다고 주장한다. 또, 암 투병 중에 간병해주던 부인이 도망가거나 자신을 살해하려 음모를 꾸미는 꿈을 지나치게 오래 꾸면 ‘정신적인 암’까지 걸릴 수 있다.)
꿈을 꿀 때 꿈만 꾸어야 한다면, 악몽에서 깨어나기가 몹시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도 우리 의식의 일부분은 깨어있어, 꿈이 너무 심하다 싶으면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
우리가 살면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은 기억창고에 미해결문제로 분류·저장되어, 틈만 나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다. 우리 ‘무의식’은 끝없이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 문제들은 지하의 마그마처럼 움직이다가, 기회를 보아, 현재의식의 틈을 비집고 ‘의식의 스크린’으로 솟아올라온다. 중대한 문제는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찾아와야 한다. 밥 먹을 때 똥 눌 때 가리지 않고 찾아와, 해결책을 궁리해달라고 졸라대야 한다. 때때로 불현듯 떠오르는 해결책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의 축복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미해결문제는 시절인연에 맞기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야 한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선불교의 ‘의심이 커야 깨달음이 크다’는 말은 ‘씨를 뿌리지 않으면 수확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큰’ 종자를 뿌리지 않으면 ‘큰’ 걸 수확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씨를 뿌리고 돌봐야 농작물 수확이 가능한 것처럼, 뇌에 의심이라는 씨앗을 뿌려야 뇌는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농작물이 비와 햇볕과 양분을 먹고 스스로 크는 것처럼, 무의식은 물질적 감각기관(眼耳鼻舌身 눈·귀·코·혀·피부)과 비물질적 감각기관(意 마음)을 통해서 정보를 먹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의식적인 사유는 김을 매주고, 솎아주고, 가지를 쳐주고, 지지대를 세워주는 것에 해당한다. 이걸 불교용어로 문사수(聞思修)라고 한다. 여기서 문(聞)은 무의식 작용을, 사(思)는 의식작용을, 그리고 수(修)는 작게는 의지를 나타내며 크게는 의식·무의식 활동의 전 과정을 말한다.)
적군과 대치하며 전투중인 장군은,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똥을 눌 때도, 끝없이 급변하는 전장의 상황에 맞추어 작전을 세우고 변경해야 한다. (나폴레옹이 말했듯이, 전투 전에 세운 작전계획은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무용지물이다.)
밥 먹을 때 밥만 먹고, 물 마실 때 물만 마시며, 똥 눌 때 똥만 누다가는, 전쟁에 패할 확률이 증가한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전투 전날 설사가 나서 고생하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공격타이밍을 놓쳐서 졌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은 이처럼 위험하다.)
오해하지 마시라. ‘반드시 패한다’고는 안 했다. 패할 확률이 증가할 뿐이다. 하지만 ‘ 큰 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이라는 수학법칙에 의하면, 아무리 확률이 작은 사건일지라도 되풀이 되면 언젠가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목숨을 건 전쟁이라면, 단 한 번이라도 지면 죽음뿐이다.
그러므로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1. ‘쓸데없는’ 생각을 동시에 하지 마라. 일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동시에 다른 일을 하지 마라. 2. ‘쓸모 있는’ 생각은 동시에 해도 무방하다. 일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동시에 다른 일을 해도 좋다; 사실은 반드시 동시에 해야 한다.
3. 자기 두뇌 용량을 초과하는 일을 하지 마라. 자기 능력에 따라 시간과 생각의 양과 횟수를 조절하라. 듀얼 프로세스가 불가능하다면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것이며, 트리플 프로세스가 불가능하다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넘기지 말라. 지나치면 뇌가 멈추거나 폭발한다. 가끔 신문에 보도되는 ‘배터리 폭발사건’을 상기하라.
4.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놓치지 말고, 한 번에 한 가지만 함으로써, 즉 하고 있는 일에 전적으로 몰두함으로써 삼매락(三昧樂 집중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삼매락은 인간에게 허용된 전혀 부작용이 없는 희귀한 양질(良質)의 기쁨 중 하나이다. 삼매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명승지를 찾은 관광객이 딴 생각을 하다가 절경을 놓치는 것과 같다. 사랑, 대화, 독서, 자전거 타기, 등산, 탐구, 사색, 기도, 명상, 설거지, 요리, 빨래, 청소, 생업 등에 완전히 몰두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정신적 고통은 대부분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온다. 삼매는, 삼매에 든 이로 하여금 자아를 잊게 하여 일시적일지라도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없앰으로써, 자아가 없을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옴을 깨닫게 한다.
물론 위의 개정안은 재가자를 위한 것이다. 출가자는, 원안대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일이다. 만약 출가자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는 도박을 하는 ‘중’이든지, 술을 마시는 ‘중’이든지, 거짓말을 하는 ‘중’이든지, 은처를 하는 ‘중’이든지, 삼보정재를 훔치는 ‘중’이든지, 남을 때리는 ‘중’이든지, 뭔가 옳지 못한 짓을 하는 ‘중’이 분명하다. 이런 중은 오계를 범하는 중이다. 여기서 ‘중’은 ‘시간(duration)’을 뜻한다.
생각이 복잡한 중은 나쁜 중이다. 한 생각도 일어나면 안 된다는데(一念不生), 복수의 생각은 불길하다. 그것도 한 번에 두, 세, 네, 다섯 생각이라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런 중은, 변장하고 침투한 외도(外道 heathen)가 아닌지 의심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II. 번뇌없는 건강한 사유는 행복과 수명을 연장한다
때때로 과거와 미래를 놓아버리고 현재에 머무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리하면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지고 더 행복해 진다. 그러나 항상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나름대로 과거를 복기하고 미래를 구상하여 계획을 세우고, 그다음 순간은 그 계획실현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소위 자신의 '존재농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즉, 유한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 유한한 수명에 효율적이고 충만하게 존재하는 수단이다.
한 서양인이 간질병 치료차 뇌수술을 받다가 집도의사의 실수로 그만, ‘해마’가 제거되는 불상사를 당했다. 이 일로 그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지 못해 기억이 몇 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는 몇 분 전에 만난 사람에게, 마치 처음 만나는 것처럼,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하고 똑같은 인사를 되풀이 했다. 즉, 수술받기 전의 장기기억은 그대로였지만, 수술받은 후에는 새로운 장기기억을 전혀 생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매 시간, 거의 매순간, 세상은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술을 받기 전의 모습만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은, 과거와 미래가 없는, 문자 그대로 현재에 사는 사람들이다. 과연 이런 삶이 종교인들이 꿈꾸는 '현재에 사는 삶'일까? 답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끝없이 활동한다. 과거의 정보를 불러 그를 기반으로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운다. 하찮아 보이는 '걷는 동작'도 그러하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걸을 때에도, 마음은 눈을 통한 시각정보를 이용해 전방의 상황을 끝없이 파악해서 발길을 어떻게 놓을지 계산한다. 그래서 내림 계단이나 낮은 지대로 가면, 저절로 지형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발을 놓는다. 무의식적으로, 없는 오름 계단을 있는 것으로, 또는 있는 웅덩이를 없는 것으로 착각하면 발을 올리거나 내리며 헛발질을 하다 깜짝 놀라며 의식이 돌아온다.
이 점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이다. 놀랍게도, 현대 뇌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적 활동의 대부분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나(我)’라는 생각, 즉 정체성은 의식의 영역이지만 그 내용은 무의식이다. 즉 ‘나(我)’라는 정체성의 껍질은 의식이고 앙꼬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이란 외부로부터 유입된 정보와 내부에서 개발된 알고리듬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보·알고리듬 복합체이다. 이 복합체의 활동으로부터 새로운 이차 정보가 생성된다. 이걸 지식·지혜라고 부른다. 이것은 무의식에 저장이 되어 새로운 정보와 알고리듬을 형성하고 개선한다. 그래서 인간은 아(我)가 상변하기에 무아(無我)이다. 의식은 무의식을 자기(我)로 간주하지만, 양자가 상변(常變 ever changing)함을 깨닫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무의식이 망가지거나 무의식을 의식으로 불러오지 못하면, 정체성의 상실·파괴가 일어난다. 중증치매환자가 그 예이다. 이들은 영원한 현재에 산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현재에 사는 삶'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번뇌가 없는 삶'이다. 번뇌는 과거와 미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번뇌가 없을 때 우리는 마치 '현재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과거와 미래가 ‘정말’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중에, 끝없이 과거와 미래를 분석하고 설계하기 때문이다. 단지 의식이 흐트러짐이 없이 현재에 강하게 집중하여, 마치 현재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의식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 수억 년 동안, '영원한 현재'에 갇혀 살았다. 다른 동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들의 단순한 언어에는 과거·미래 시제가 없다. 인간이 영원한 현재인 '지금 여기(now here=nowhere)'에서 탈출을 시도한 것은 (35억년의 장구한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볼 때 방금 전인) 겨우 200~300만 년 전이다. 어렵게 얻은 의식과 그 기능을, 지금 여기서, 버릴 수는 없다.
세계적인 뇌과학자 디크 스왑에 의하면, “신체는 많이 쓸수록 수명이 짧아지고, 뇌는 많이 쓸수록 수명이 길어진다.” 그래서 일류 운동선수들은 빨리 죽고, 저명한 과학자들은 오래 산다. 이 원칙에 따르면, 좌선을 오래하는 것은 수명을 연장시키고, 무념무상은 수명을 단축시킨다. 각각 신체와 머리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망상을 부지런히 하는 선수행자가 같은 시간만큼 무념무상에 빠진 선수행자보다 더 오래 살 가능성이 있다. 물론, 수명에 더해서, 삶의 질을 고려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망상이, 번뇌없는 질서정연하고 명쾌한 사유작용보다 더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망상은 혼란이고, 혼란은 에너지 낭비이기 때문이다. 뇌는 쓰더라도, 즉 사유를 하다라도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에너지가 절약되어 뇌가 더 넓게, 더 많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그리하려면 아름다운 과학법칙들을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아름다움은 사는 기쁨만이 아니라 그 기간도 연장시킨다. 그중에 제일이 번뇌없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살고, 부지런히 사유하고, 끊임없이 지혜를 길러, 번뇌가 없는 청량한 삶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삶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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