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거울’ 신영복 교수의 삶과 글

2016. 2. 6. 18:36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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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거울’ 신영복 교수의 삶과 글


 


시대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지난 1월 15일 오후

향년 7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 교수는

2014년 중반 피부암 선고를 받고 2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마지막까지 참스승이고자 했던 그의 삶과 글이 주는 울림이 어느 때보다 크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저서 「담론」엔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라는 글이 있다.

그는 갔지만 그의 마지막은 충만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시대를 넘고, 세대를 넘어

그를 그리워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끊임없이 탄생할 것이니 말이다.

후학을 가르치는 스승이자, 책을 쓰는 저자 그리고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던

고 쇠귀(牛耳) 신영복 교수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구속돼 무기수로 감형된 뒤 기나긴 수감

생활을 했다. 그가 감옥을 나온 것은 20년이나 지난 뒤였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분함이나 화남, 원망이 없다. 신 교수는 감옥 생활이야말로 사회학과 역사학, 인간학을

제대로 배우게 해준 진짜 대학이 됐다고 말하곤 했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사색이 얼마나 깊었는지 잘 드러난다.

신영복 교수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이후 그의 저서를 다시 읽는 독자들이 늘고 있다. 실제 서점에서도 판매량이 대폭 늘어났다.

 

일본 총독이 꿈이었던 아이

 

신 교수는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조선 학생 차별 문제로 일본인 교장에게 항의하다 파면된

이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복직해 의령에서 근무할 때, 신 교수는 관사에서 태어난 것.

고등학교를 진학해 부산으로 떠날 때까지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신 교수에겐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의 아버지 관사에는 당대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중 한 분이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한 답이 ‘일본 총독’이었다.

조선이 독립하고 일본을 식민지 삼게 된다면 자신이 일본 총독이 돼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이 그리고 학자였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모이던 관사 사랑방 분위기가 어땠는지 옆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면 과장일까.

지성의 새싹이 그렇게 움터 성장했구나, 짐작이 간다.

어린 신영복이 다섯 살이 됐을 때 독립을 맞았다. 신 교수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었다. 어린 그에게 일본인 교장이 살던 관사를 지키게 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그 또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인 교장이 황급히 어디론가 사라졌고,

집 안의 책상이며 서랍들이 다 열려 있었다. 그 모습은 오래된 기억임에도 그의 머릿속에

광복이란 단어와 함께 또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됐다.

그의 나이 열 살에 6·25 전쟁이 터졌다. 그가 살던 밀양은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지 않아서

북한군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 교수가 기억하는 전쟁의 기억은 아주 끔찍한

것이었다. 동네에서 조석으로 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르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 교수는 굴곡의 현대사 정중앙을 관통하며 자라났다.

1월 18일 성공회대 영결식 현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사형선고부터 무기징역까지, 기구했던 삶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청년이 된 신영복이 살아가던 때는 여전히 요동치는 현대사 한복판이었다. 대학 입학 1년

만에 4·19혁명이 일어났고, 또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다. 그가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

때는 5·16이 일어난 대학 3학년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학생

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던

1968년 스물일곱 살 나이에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부풀려진 소문들, 억지 자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그리고 한

개인에게 가혹하게 자행된 국가적 폭력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이자 훗날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 명예교수의 목숨을 건 구명 활동 덕분에 다행히 사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고

알려졌다. 무기형으로 감형된 후 1988년 8·15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20년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무기징역이 확정된 날은 1970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신 교수의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고 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수만 돼도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무기수가 된다는 것은 짐작도 안 되는 암흑으로 다가왔다고. 그래서일까. 신 교수는 그날

남산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기억이 여전히 혀끝에 남아 있다고 말하곤 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 「담론」 중

2일도, 2개월도, 2년도 아닌 자그마치 20년이란 시간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그것도 끓고 끓던 젊음의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신 교수는 2015년 펴낸 「담론」을 통해

사형수가 됐을 때도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으로 그는 충분히 죽지 않을 이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감옥이었지만

그가 찾아야 할 것은 오로지 살아가는 이유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깨달음과 공부였다고 그는 고백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모두를 사색하게 하다

특별 사면돼 출소한 19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의 옥중서한이다.

 

이 책을 통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그의 20대 사색의 편린들과 어려웠던 징역 초반의 면모까지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또 책에는 그가 감옥에서 그렸던 그림,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휴지와 작은 봉함엽서 등에 철필로 깨알같이 박아 쓴 편지 일부도 볼 수 있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온 나라 국민들을 사색으로 물들게 했다.

출간 당시 경향신문은 “새벽이슬처럼 맑으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특별한 책”이라 평했고,

인터뷰에서 신 교수는 이 옥중 편지를 읽은 사람들이 이제는 감옥 밖에서 사는 그에게

도통한 모습을 기대할 때가 많아 곤혹스럽다는 유머 섞인 답을 내놓기도 했다.

강산이 몇 번 변했지만 많은 이들이 인생의 책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 이 책은 이제

고전의 대열에 당당히 올랐다. 누군가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몽테뉴의 수상록」에 비견되는 옥중 문학의 백미라 평가하기도 한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깊은 사색이 허락된 현실의 공간은 작은 엽서 한 장뿐이었다. 그러나 종이는 작을지언정

담긴 뜻은 크고 넓었다. 그의 사색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전했다.

신 교수는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까지 대학원에서

강의하며 10여 권의 저서와 명강의로 세상을 풍성하게 채웠다. 무엇보다 서예가로서의

그의 명망은 저자로서의 명성을 넘을 정도였다. 따뜻함이 배어 있는 ‘쇠귀체’를 창안했다.

특히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이 소주 ‘처음처럼’이다. ‘처음처럼’은 신 교수가 즐겨 쓰던

문구와 글씨다. 당시 신제품 개발을 마치고 제품명을 고민하던, 주류 업체의 광고를

담당하고 있던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대표가 신 교수의 문구 ‘처음처럼’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손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홍보위원장을 맡으며 새 당명 ‘더불어’까지

이어진다. 더불어 민주당의 ‘더불어’도 신 교수의 저서「더불어 숲」에서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구와 글씨체가 소주 이름으로 쓰이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존경받는 학자가 과연 술 이름에 자신의 시그너처와 다름없는 글씨체를 사용하도록

허용할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대중적 술

소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 교수가 끝까지 저작권료를 받지 않아 업체는 그가 몸담고 있던 성공회대에 장학금

형식으로 기부를 했다는 후문.

2006년 경향신문 창간 60주년을 맞아 신영복 교수가 보내온 기념 휘호. 독자들에게

한 약속이 강물처럼 영원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결실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

 

애도의 물결 속, 그는 영원하리

신 교수의 글씨와 인연을 가진 사람은 많다.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공이산’을,

 

노무현재단에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글씨를 선물했다. 연예계 또한 그와 인연이 깊은

이들이 많다. 가수 윤도현은 YB(윤도현밴드) 공식 인스타그램에

“이 시대의 참지식인, 행동으로 말하던 진정 용감한 아티스트.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분. 함께 사는 즐거움을 알려주신 분. 서예 글씨를 많이 써주신 분”이란

글을 올렸다. 신 교수는 윤도현의 앨범 두 장의 타이틀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방송인 김제동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럿이 함께. 처음처럼.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란 분별이 없어져야 함을 따뜻한 눈빛으로 늘 알려주셨던,

맞담배를 늘 권하시며 아래에서 위를 알려주셨던 고마운 우리 선생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고 가신 분”이라고 적었다.

이 두 사람은 2002년과 2009년 차례로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고인과 사제

관계를 맺었고, 지난해 7월 고인의 ‘담론 북 콘서트’에도 참여하는 등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우리는 아직도 ‘잘 자란다’라는 의미에 마음을 쏟을 여력이 없습니다. 경쟁과 효율성 등

사람을 해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일의 엄청난 잘못을 미처 돌이켜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일찍부터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나 후회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숲」 중

 

2014년 중반 피부암의 일종인 악성흑색종을 진단받은 신 교수는 2년여 동안의 투병 생활

끝에 지난 1월 15일 오후 10시 별세했다. 장례는 성공회대 학교장으로 치러졌으며,

영결식장에는 1,000여 명의 추모객이 자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68) 여사와

아들 지용씨(26)가 있다.

비록 20년을 감옥에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바쁘게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1·2」,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처음처럼」, 「변방을 찾아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무수한 현장에 나섰다. 감옥에서조차 재소자들에게 신망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교도소에 있던 이른바 조폭이나 깡패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이제는

고인이 된 신 교수를 존경하고 따랐다는 일화는 숱하다.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을 당시 그가 머물던 전주교도소 재소자들이 전부 울었을 정도였다고.

재소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곤 했다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빈소가 마련된 구로구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노회찬 전 국회의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찾아 고인과의 추억을

더듬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발걸음을 했다.

시대의 스승으로 현실의 버팀목이 돼주었던 그의 빈자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진다.

 모두가 슬픔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영원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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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신영복 교수 별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 통일혁명당사건 20년간의 옥살이..


정말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20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하시다가 이제 조금 편하게 여생을 보내셔야 하는데 그 20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안타깝네요.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교수 별세 소식.. 15일 신영복 교수님이 피부암으로 별세했다고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담론 등을 쓰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 교수는 1998년 성공회대 교수로 임용됐으며 2006년 퇴임 후에 석좌교수로 강의를 했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1986년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고 해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후 20년 2개월간 옥고를 치른뒤 1988년 가석방됐으며 20년 2개월간 독방에서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아래는 1989년 실제 신영복 교수님이 한 인터뷰의 내용 일부입니다. (가석방 1년 후)


통일혁명당사건이란 도대체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무엇을 했길래 20년 이상이나 감옥살이를 했나요?

통일혁명당사건을 나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감옥을 살았던 것은 내가 했던 일보다도 남북의 정치적 상황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나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연구 모임을 하면서 학생서클들을 조직해 지도했고 나아가 일부 학생시위를 조직했는데, 요즘의 학생운동 수준이지요.



1998년 가석방 후 신영복 교수님이 수감 생활을 하면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신영복 교수님이 수감생활을 하면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책으로 묶은 것입니다. 이후에 신영복 교수님은 '강의' '담론' 등의 책을 발표했고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또한 신영복 교수님은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등으로 불리우는 글씨체로도 아주 잘 알려졌으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주 브랜드인 '처음처럼'도 신영복 교수님의 필체입니다. 처음처럼은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에서 지은 시 제목과 서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신영복 교수님의 글씨체는 관공서나 기업의 건물 현판에도 많이 사용됐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님과 아들 지용씨가 있으며 현재 서울 목동 이대병원에 안치돼 있습니다. 16일 성공회대회로 운구될 예정이며, 장례는 이 대학에서 학교장으로 치러진다고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빈소는 16일 학내 성당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신영복 교수는 2014년에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으며 피부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끝내 숨졌습니다. 실제로 돌아가시기전 10일간 자진해서 음식을 끊었다고 합니다. 암으로 인한 고통이 모르핀을 맞아도 그 고통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6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하다가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1989년 사면복권됐으며 사면복권이된 날 나온 책이 바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석방되기까지 20년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느낀 고뇌를 230여장의 편지와 글로 풀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입니다.

 故 신영복 교수님의 永眠을 기원합니다

 

 

처음처럼 / 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은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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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敵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의 장단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간사한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할 때 이용하는 사람이다. 
가장 나쁜 친구는 잘못한 일에도 꾸짖지 않는 사람이고.

가장 해로운 사람은 무조건 칭찬만 해주는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이다.

가장 거만한 사람은 스스로 잘났다고 도취된 사람이고.
가장 가치없는 사람은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며.

가장 큰 도둑은 무사안일하며
시간을 도둑질하는 사람이다.

가장 나약한 사람은 약자위에 군림 하는 사람이고.
가장 불쌍한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욕심만 부리는 사람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사람이다. 

 

가장 불안한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은 많이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가장 크게 후회할 사람은 부모께 불효하는 사람이다. 
가장 어리석은 정치가는 물러날 때를 모르는 사람이고.

가장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파렴치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사기치는 사람이다.

손자의 말씀을 되새기며
내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요소를 멀리하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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