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의 우리 古代史 말살수법

2016. 7. 16. 21:17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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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우리 古代史 말살수법


日帝우리 古代史 말살수법을 한번 되돌아 보면




우리 한국의 고대사는 학자마다 책마다 내용이 다르다. 우수한 역사학자들도 많은데 왜 그럴까?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마자,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조선역사말살이었다.


한일합병으로부터 3개월도 체 못 된 191011,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경찰을 동원하여 191112월 말까지 12개월 동안의 제1차 전국 古史料 색출작업에서, 조선 팔도강산방방곡곡의 서점, 향교, 서원 및 양반가의 서고를 죄다 뒤져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植民史觀(植民史觀)으로의 변조에 방해가 될 만한 자료 5120여만 권을 수거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1




조선총독부가 우리 역사의 古史料를 수집한 기간은 191011월부터 총독부 발간의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보면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950종이다. 191011월부터 1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 5120여만 권과, 4950종을 합치면 엄청난 수량이다. 이를 압수 또는 분서(焚書)한 것이다.




대마도 번주(藩主) 종백작(宗伯爵)의 자택에 있던 고문서 66469, 고기록류 3576, 고지도 34매 까지도 압수은폐 또는 불태웠다고 한다([歷史現代]1981).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까지도 폭넓게 수집하였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 데, 불가피하게 필요하다고 본삼국사기]삼국유사』 외 일부 사서만 남기고 모두 불태운 것이다.




삼국유사마저도 사료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한국역사 말살의 선봉에 섰던 조선총독부의 주구(走狗)교토대학 조교수였던 국수주의 국학자 이마니시 료(今西龍)는 자신의 글단군고(檀君考)(1929)서문에서,




조선에는 개국의 신인(神人)으로 단군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단군을 숭봉존신(崇奉尊信)하는 일이 근대에 급작스레 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조선 민족의 조신(祖神)으로 하여 단군교(檀君敎) 또는 대종교(大倧敎)로 칭하는 신도조차 생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단군 전설은 현재처럼 이루어짐이 결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단군의 칭호도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너스레를 늘어놓으면서 한갓 전설로 폄하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192566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천황칙령(天皇勅令) 218號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발족시키고, 18년에 걸쳐 무려 1백만 엔이라는 거금의 예산을 들여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했다. 멀쩡한 우리 歷史를 변조하여, 일본보다도 짧고 볼품없는 역사로 평가 절하시키는 작업이었다 




植民史觀의 목표는, 조선의 역사란, 주체의식이 없는 他律性, 답보적 停滯性의 역사라는 점을 조선 젊은이들에게 부각시키는 데 있었다.




삼일독립선언(三一獨立宣言)후 부임한 사이토-마코토(斎藤実) 조선총독은 1922년 서울에 부임하자 곧이어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면서, 소위 朝鮮에서의 교육시책(敎育施策)의 요결(要訣)이라는 것을 내놓았는데, 朝鮮人 靑少年으로 하여금 그들의 歷史, 전통문화(傳統文化)를 모르게 하라. 동시에 될 수 있는 데로 그들의 조상(祖上)과 선인(先人)들의 무위무능(無爲無能)한 행적을 들추어 가르쳐라. 이들에게 자국의 모든 것에 혐오감(嫌惡感)을 느끼게 하고 그 때에 日本歷史傳統文化, 人物, 사적(史蹟) 등을 가르치면 그들이 日本을 흠모(欽慕)하게 하고 同化의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 朝鮮人半 日本人으로 만드는 요결(要訣)이다라 강조했다. ※2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목표가 어디 있는가를 잘 나타난 언급이다.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펴낸 朝鮮史는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백제, 통일이전의 신라와 발해도 수록하지 않아서, 민족과 역사의 뿌리를 잘라낸 해괴망칙(駭怪罔測)한 것이었다.




통일신라 이후의 조선사도 멋대로 해석, 否定的인 사례와 수난사만을 확대하여 日帝가 한국사를 타율-정체의 식민사관으로 재구성 날조해 놓았다.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서 10여 년 동안 일한 이병도씨인들 일제가 남겨 놓은 제한된 사료만을 가지고 서 올바른 역사가 나올 택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의 마지막 저서랄 수 있는 崔泰永과의 共著한국상고사 입문(1989)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 한민족 본래의 역사는 일찍이 전화(戰禍)와 외적의 강압, 내부의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폭력으로 쟁취한 자들의 자기 비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책으로 인하여 위조, 피탈된 바가 적지 않다.


거기에다가 근대에 제국(침략)주의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민족말살정책으로 한국역사 위조의 강행이 주효하여 유구한 역사의 上半과 넓은 판도의 대부분의 절단이라는 유례없는 결과를 가져왔다....(중략) .....이제 빼앗긴 수천년의 年代史 와 반도의 일부로 국축(局縮)된 민족분포(활동한)지역을 실상대로 회복하여 역사의 왜곡을 바로 잡고, 선천적으로 미개하고 무능한 종족이라고 선전된 오욕을 면해야 할 시급한 책무가 韓民族에게 지워졌다...(중략) ...2세들에게 긍지와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시급한 역사회복의 책무가 있는 것이다3




 




참조1  홍윤기 석좌교수   식민사관주도자 이마니시 료(今西龍)의 횡포


일제는 1910829, 대한제국을 강제적이고 일방적으로 맺은 합방 조약을 내세워 조선 땅을 강탈했다. 이들은 1906년에 설치했던 이른바 조선통감부'조선총독부'로 이름을 바꾸고 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보내왔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11월부터 전국의 각 도, ,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12월 말까지 1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20여만 권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그 무렵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역사 말살의 선봉으로 움직인 것은 교토대학 조교수였던 젊은 국수주의 국학자 이마니시 료(今西龍<>로 읽어야 함)였다.




참조2 조선 총독 '조선인은 모르게하라"


http://semo1999.blog.me/220705228198




 조선일보 서희건(徐熙乾기자가 쓴 조선일보1986817일자 기사임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음.




총독 "조선인은 조선사() 모르게 하라"


 한국의 일반인들이 국사를 배운 것은 광복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3백여 년 전인 1670<동몽선습(童蒙先習)>이 간행되어 서당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학동들이 윤리와 함께 국조 단군과 고대사 삼국사를 배웠다


천자문을 뗀 다음에 배운 기초 교과서였다


조선말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되며 대한제국 학부가 펴낸 최초의 교과서도 역사, 지리를 포함한 <국민소학독본>이었고 두번째 나온 것이 <조선역사(1895)>였다.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가 서당에서의 <동몽선습>강의를 금지한 1915년까지 단군조선으로 시작되는 조선사를 배웠다.


일제가 학교 교육을 통해 일본 역사를 가르쳐 우리 국사 교육은 단절되었지만 광복후 많은 국사 교과서가 나와 국사 교육도 광복되었다


이 때 단군도 되살아났고 삼국의 시조도 국민들이 배운 것이다.


그런데 현행 교과서에서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한국 고사서의 초기 기록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며 빼버린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학문적으로 분석, 비과학적인 증거를 구체적으로 논증한 한국 사학자의 논문은 별로 없다


거의가 일본학자들이 일본고대사를 끌어 올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말살한 한국 고대사 왜곡 논문을 비판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 최근 학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고려대 김정배 교수(한국사)'우리의 선배들 중 일부가 일제 사학을 연구 사료로 수용하여 이런 혼란이 일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대학 최재석 교수(사회학)'일인 학자들의 왜곡된 주장이 광복 40여년을 넘도록 우리 국사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는 것은 식민사관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비판 연구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본의 식민사관은 한국을 침탈하기 이전에 준비됐다


그 정체를 밝혀주는 자료가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편찬하여, 그들끼리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 편수사업개요>에서 드러난다.




 "·한 합방이 된 이 마당에 조선인에게 그들의 역사를 읽게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옛날을 생각하게 하여 독립국 시대의 구몽(舊夢)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하나


조선에는 자고로 사적이 많으며 조선인은 예로부터 독서와 작문력이 있어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민족을 무지몽매의 영역에까지 억압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문명 세태에서 불가능하다


그런데 고래(古來)의 사서(史書)는 현대(일제강점기)와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시대의 옛꿈에 빠지게 할 폐단이 있고


신작들은 ·(청나라), ·(러시아)간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등 그 사서들이 심히 고혹케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못 읽도록 절멸하는 것은 오히려 비밀리에 이를 전파하는 역효과가 날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러한 사서들을 대신하여 공명·적확(?)한 새 사서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읽게 하는 것이 동화의 효과를 가져오는 첩경이며 여기에 바로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새로이 하는 주된 이유와 취지가 있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 편수 취지다. 여기서 조선 사료 인멸의 증거가 드러난다


또한 조선사편찬을 놓고 그들 내부에 이견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보다 교활한 방법이 채택되어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쓰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일제는 한국 침탈 전부터 조선사 왜곡 편찬 계획을 가졌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침탈한 일제는 2개월도 못 된 11월 조선 전국에서 사료 강탈에 나섰다


가장 악질적인 기구였던 조선총독부 취조국 지휘로 경찰을 앞세워 전국의 서점과 향교·서원·양반가의 서고를 뒤진다


이들은 강탈한 한국 사료를 분류,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일제가 인멸한 서적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광복후 출간된 <제헌국회사>20여만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 장지연의 <대한新地誌>, 이채병 <애국정신> 등과 엄청난 고서(古書)들이 이 때 수난을 당했다


일제의 한국 사료 압수 작업은 3·1독립선언까지 계속되었다.


3·1독립선언으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부진한 <조선사>편찬을 독려하여 1922"조선에서의 교육 시책의 요결"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참조※3自由200112월호 여운건(呂運虔)우리 古代史原案이 없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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ペンキ뼁끼」「ノカタ노카타」「ハンバ한바」「ワイロ와이로」「オヤ오야」 「オヤジ오야지」「オヤブン오야분」「ブンパイ分配キマエ키마에」「コンチョ콘죠


생활용어에, ペンキ뼁끼,paint, ペラ페라 (ベラ구두주걱), モンペ몬뻬, ピラ(삐라), チラシ(찌라시, 전단지)등도 그렇다.


 


그다지 좋지 않는 것도 있다.ウラミ우라미, 앙심,ヤミ야미, 암거래, ヤバイ위험, ワイロ와이로, 뇌물같은 말을 한국 사람의 입으로부터 듣게 되면, 그만 한숨이 나온다.


 


賄賂(와이로, 회뢰, 뇌물)라 하면, 지난날 서민들과 접하는 한국의 공무원이 공공연하게 賄賂를 받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機関(おおやけのきかん,공공기관)取材(しゅざい,취재)할 때는, 무언가의 手土産(てみやげ,테미야게, 간단한 선물)가 필요했다. 대개 스카치위스키, 그것도 어째서인지 시버스리갈을 좋아했다. 交通警官(こうつうけいかん)3년 하면 집을 세운다든가, 시청(市役所しやくしょ) 窓口(まどぐち,창구)에 빨리 접수시키기는 데에는 5천원을 내면 된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곧잘 들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 모 한국인에게 질문을 했더니, 바쁜 사람이 돈을 내고 빨리 해가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 바쁜데 테미아게(手土産)도 안 주고, 마냥 기다린다는 것이 이상한거지라는 말을 들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부분에서의 감각이 일본과 한국이 절대적으로 다른 부분일 것이다.




아이들이 小学校(しょうがっこう,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級長(きゅうちょう, 한국은 班長)이 되기 위하여 担任先生(たんにんのせんせい,담임교사) 에게 현금을 건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데, 이러한 賄賂(わいろ,와이로, 뇌물)가 사회의 潤滑油(じゅんかつゆ,윤활유)로 되어 있는 듯했다.




한국을 위해 弁護(べんご,변호)한다면, 시청(市役所しやくしょ)職員(しょくいん)들이나 教師(きょうし)들은 받은 賄賂(わいろ)를 자기의 ふところ(, 호주머니)에 넣는 것은 아니다. 賄賂를 적립(=つみたて,積立)해서, 職員慰労会(しょくいんいろうかい,직원위로회)慰労旅行(いろうりょこう,위로여행)에 사용하는 것이다. 뇌물추방운동도 강력히 시행하고 있지만, 오랜 동안의 습관이 여간해서는 바뀔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기야 아시아에서, 아니, 아시아以外까지 포함해서, 서민들과 접하는 공무원이 賄賂(わいろ)를 받지 않는 나라는, 日本을 위시해 손곱을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그러한 점에서는 일본이 자랑해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上級公務員(じょうきゅうこうむいん,고위공무원)이나 国会議員(こっかいぎいん,국회의원)汚職(おしょく,오직)에는 진절미가 나지만(うんざりですが)




ノカタ노카타1(土方転訛,てんか2) , ハンバ한바(飯場)3 등의 土木作業用語(どぼくさぎょうようご)가 남아 있는 것을 들으면, 어쩐지 안타까워진다.




テンジョウ텐죠-(天井)4, マグリ마구리(まぐれ転訛)5, テスリ테수리6, ウワギ우와기(上着)7, アタマ아타마8, カンナ칸나9 , アンマ안마참조 10, オヤ오야()11, オヤジ오야지12, オヤブン오야분13, スミ수미()14, カベ카베15, ぶんぱい분빠이(分配)18, キマエ키마에(気前)16, ジョス죠수 (助手의 전와), コンチョ콘쵸(根性의 전와)17, 등은, 지금도, 年配(ねんぱい,지긋한 나이,年輩) 의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가 있다.




  <일본 모 일간지 연재 日本語韓國語에서 발췌>


 


참조 밭일 등 작업할 때 입는 일종의 여성용바지. 태평양전쟁시기 모든 여성들의 국민복이었다.




참조 1 ノカタ노카타--土方(どかた, 도가타)転訛(てんか, 전와), 공사판의 막벌이꾼




참조 2 転訛(てんか텐카)--우리말로 전와’, 말의 본래의 음이 발음편의상 다른 음으로 바뀌는 것.


 


참조 3 ハンバ한바(飯場)--飯場(はんば), 토목 공사나 광산 등의 현장에 있는 노무자 합숙소




참조4 テンジョウ,텐죠-(天井)--천정 또는 천장, 지붕 안쪽


 


참조5 (まぐれ마구레)--헷갈림, 우연, 요행


 


참조6 てすり(すり,테수리) 手摺-- 난간


 


참조7 ウワギ,우와기(上着)--·上衣 즉 윗도리, 저고리, 그냥 우와기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참조 8 アタマ아타마--머리(),


 


참조 9 カンナ칸나-- 칸나 꽃.


 


참조 10 アンマ안마--あんま, 按摩, 안마, 안마사


 


참조 11 オヤ오야()--おや[] 어버이; 부모. () 선조; 원조. 사물의 근본. 요즘도 계모임, 화투놀이에서는 오야라는 말을 씀


 


참조12 オヤジ오야지---おやじ[親父] (성인 남자가 무간한 자리에서) 자기 아버지를 일컫는 말(넓은 의미로는 남의 아버지도 가리킴)


직장의 책임자·가게 주인·노인 등을 (친근하게 또는 얕보아) 일컫는 말.




참조13 オヤブン오야분おやぶん, 親分--부모처럼 의지하고 있는 사람. 두목·우두머리; 특히, 협객 등의 우두머리.(=親方·ボス)


 


참조14 スミ수미(すみ)--모퉁이; 귀퉁이. 2.구석.


 


참조15 カベ카베--, 장애물


 


참조16 キマエ키마에(気前) ,きまえ, 気前 --통 크게 선심을 쓰는 것. 우리말로는 적확한 말이 없기에, 지금도 그대로 흔히 쓰고 있는 말이다. ‘기마이 좋다는 등으로


 


참조17 コンチョ콘죠근성(根性) 이란 말이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우리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고 있다. 누가 억지를 부리면 곤죠 부리자 마한다.


 


참조 18 ぶんぱい분빠이(分配)--요즘도 이 말을 써야 맛이 날 때가 있다. 도둑놈들도 분빠이를 잘해야 뒷 탈이 없는 거야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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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춘몽(花柳春夢) & 片割(조각달)


화류춘몽(花柳春夢)은 1940년 김해송(金海松) 작곡, 이화자의 노래

생일도 집안도 가족도 밝히지 못하는, 부평초 같은 신세의 한 소녀가 13살의 어린 나이에 술집 작부(酌婦)로 떠돌다가, 운이 닿아 가수로까지 발탁되었건만, 아편중독으로 폐인에 가까운 삶을 유랑극단에 얹혀살아간 가수 이화자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는 가여운 여인(195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이 대표작으로 남긴 화류춘몽은 한 많은 기생의 삶을 영탄(永歎)

조로 불러 히트 한 곡


 1946년엔 일본가수 菅原都(수가와라쓰즈코)가 이 곡을 번안(飜案)하여 조각달(片割)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 젊은이들이 아주 실감나게 잘 불러, 이 분들이 우리의 흘러간 가요의 맥을 이어갈 분들이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뿌듯하다


KBS후계자 화류춘몽 김소희/나유진 데뷔

https://youtu.be/O9DyAYKIoPQ


나유진 - 화류춘몽 [가요무대 14422015. 11. 09.]

https://youtu.be/NHLUst_6be0


花柳春夢 (화류춘몽) 이화자(원창) 

https://youtu.be/Ki71O52kPEg



片割(かたわれづき조각달)

菅原都(수가와라쓰즈코,1927~

https://youtu.be/-0VR6a7zziM


https://youtu.be/meey2bQR2wg

 

 

 

‘어머니 보고 싶어’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일본 규슈 도요스 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한글로 씌어진 낙서.


수배된 의병들
경무분견대 앞. 의병들을 현상 수배하는 공고가 붙어 있다.
검진소에 끌려가는 위안부들
검진소에 끌려가는 일본군 위안부들.
여순 법정에서 공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1910년 2월. 뤼순법정에서 공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옆에는 안 의사의 동지 우덕순, 조도순, 유동하.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
만주 땅 뤼순에서 맞이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아침. 안 의사가 마차에 실려 형장으로 이송되고 있다.
처형되는 간도의 조선인
처형되는 간도의 조선인들.
좁은 갱도에서 탄을 캐고 있는 조선인 광부
좁은 갱도에 누워 곡괭이로 탄을 캐고 있는 한국인 광부. 갱 속이 워낙 좁아 탄을 캐려면 누워서 작업할 수밖에 없다.
관동대지진을 묘사한 북한의 기록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인들. 북한 기록화다.
일본 전역에 방치된 한국인들의 유해
일본 전역에 방치된 한국인들의 유해. 현재도 우리 동포 30만여 명의 유해가 일본에 있다.
일제의 날조극에 희생된 조선인들
1911년 9월 신민회 주동인물을 포함해 서북지방 민족주의자 700명가량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검거됐다. 그 뒤 1차 공판에서 이 중 105인에게 실형이 언도됐다.
의병
조선 의병들의 모습.
근로봉사에 동원된 소년들

근로봉사에 동원된 조선 소년들이 노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