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7. 11:5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꿈 이야기 셋'師拳, 스승의
주먹'
세존께서 안거에 들었을 때입니다. 심한 질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설 정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존께서는 질병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병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
처소에서 나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때 존자 아난다가 세존께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아내셨으니 더없이 기쁩니다. 세존께서 병이 드셨기 때문에
실로 저의 몸은 마비되고 제 앞은 캄캄하고 가르침도 제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의 승단을 위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전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안심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나는 안팎 없이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師拳)은 없다.
아난다여, 여래는 '내가 수행승의 승단을 이끌어간다'라든가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수행승의 승단에 관하여 더 이상 무엇을 언급할
것인가?"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아난다여, 나는 지금 늙고 노쇠하고 만년에
이르렀으며 내 나이 팔십이 되었다.
아난다여, 예를 들어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의지하여 가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끈에 의지하여 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의지할 곳으로 해야지
남을 의지하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고 법을 의지할 것으로 해야지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만약 이와 같다면
그들은 누구라도 배우고자 열망하는 나의 수행승들, 최상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
-쌍윳따 니까야 제47쌍윳따
'질병'
사권(師拳)이란 스승의 주먹이란 뜻입니다. 스승은 죽을
때 그의 깨달음이나
최후의 비밀을 손바닥에 적습니다. 그리고 상수 제자를 불러 주먹을 펴서
손바닥에 적은 것을 보여줍니다.
상수 제자는 스승의 주먹에서 최후의 비결이나 깨달음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사권 즉 스승의 주먹을 보았다는 것은 곧 교단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대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권은 부처님 당시 여러 수행 교단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의 정통성을 전하는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아난존자도 부처님이 연로하여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처님께 사권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한 '나에게 사권은 없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비밀한 뜻이나 비범한 능력을 믿고
의지하여 공부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자신만 특별하게 가진 그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스승은 나와 다른 특별한 안목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나와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몸짓이나 행동이나
가리켜 보이는 데서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어우러져 스승은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스승의 아우라를 느끼며 스승을 삶의 지표로 삼습니다. 법을 가리키는 몸짓이나
손짓에 자기가 보지 못하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여겨 그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참된 스승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스승의 주먹은 제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스승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 누구나가 갖추고 있는
그대로의 능력을 가리켜 보이려고 주먹을 쥐어 보이기도 하고 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은 스승의 손이 쥐었다 폈다를 할 때 손바닥 안에 제대로 보지 못한
무엇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 보일락 말락한 것들을 가지고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고 도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스승의 주먹은 비었습니다. 만약 거기에 특별한 물건이나
적혀진 무엇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승이나 상수 제자만이 갖는 것이라면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입니다. 스승뿐 아니라, 제자 그리고 스승과 제자라는
특별한 관계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이미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스승에게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이 아무런 뜻 없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쥐었다 폈다
할 뿐입니다. 스승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어떠한 뜻도 없기에 모든 일이 인연 따라 장애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사람이 상상하는 그러저러한 실체가 따로 있다면 그 내용물에 막혀서
온갖 일이 자연스럽게 생성소멸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저 들판에 핀
꽃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온 세상은 이 하나의 자연스러움뿐입니다. 분별하여 헤아리고 따져보면 세상은
복잡하고 불합리하고 갈등 투성이고 고난의 결정체이지만 실제 그러한 것이 없기에
자유이고 단순하며 지극한 자연스러움이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자기 마음 안의 일임이 분명할 때 이 자각은
찾아옵니다.
지금 당장 안팎의 모든 것이 이렇게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 하나로 나와 네가 드러납니다. 이 마음 하나로 온 세상이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생각과 감정과 사물이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이 하나의 텅 빈 작용입니다.
이 실체 없는 것 하나가 살아서 온갖 춤을 추고 있습니다.
- 릴라 임순희님
오늘 하루도 감사함을
나에게 주어진하루가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밥과 몇 가지 반찬풍성한 식탁은 아니어도
오늘 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누군가 나에게 경우에 맞지 않게 행동 할지라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태양의 따스한 손길을 감사하고,
바람의 싱그러운 속삭임을 감사하고,
나의 마음을 풀어한 편의 시를 읽을 수 있음을
또한 감사하렵니다.
오늘 하루도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 났음을
커다란 축복으로 여기고,
가느다란 별빛 하나 소소한 빛방울 하나에서도
눈물겨운 감동과 환희를 느낄 수 있는
맑은 영혼의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 좋은 글에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럴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ㅡ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두 번의 똑 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이제. 누군가 내곁에서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으면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습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때문에 너는
쓸데 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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