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卒啄同時)

2016. 5. 21. 17: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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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卒啄同時)

안팎에서 쪼아대라
(부제: 줄탁동시(口+卒啄同時)




병아리의 탄생과정을 보면 생명의 존귀성, 상호 의존성, 신뢰성 등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알에서 병아리가 탄생되는 극적인 과정을 "줄탁동시(口+卒啄同時) 또는 


줄탁동기(口+卒啄同機)"라 한다. 
(이 '줄' 자는 입 구(口) 변에 '卒' 자를 쓰는데, 컴에는 글자가 없어서 '口+卒' 로 표기 하였음)

어미 닭이 품고있는 알이 부화할 때가 되면 알 속의 새끼는 먼저 안쪽에서 


껍질을 톡톡 쪼는데 이를 '줄(口+卒)' 이라한다,

알 속 병아리의 껍질 쪼는 소리를 들은 어미 닭은 바깥에서 같은 자리의 껍질


을 쪼아 병아리가 세상으로 나오도록 도와주는데 이를 '탁(啄)'이라고 한다.

줄탁의 행위가 동시에(=줄탁동시) 같은 곳을 향해 정확히 이루어져야 병아리


는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 스스로가 껍질을 수 없이 쪼아


대는 '줄'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미 닭의 탁(啄)은 이러한 병아리의 노력에 길을 터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어쩌면 알 속의 병아리는 어미 닭의 탁(啄)에 의존하여 새 생명을 얻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탁(啄)으로만 세상 밖으로 나온 병아리는 


병이 들어 죽거나, 건강한 닭으로 성장할 수 없다.

줄탁동시의 오묘함을 보면서, 생명 가진 모든 것은 혼자가 아닌 상호의존과 


상호 보완의 삶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저 혼자 잘나서 출세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 같지


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인연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모.형제.일가친척.


이웃.사회.국가.자연.무생물...등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나' 라는 알 속의 생명에서 바깥 


세상을 향한 "부리의 쪼임(=줄(口+卒))"을 계속해야 한다. 동시에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부리쪼임인 줄을 할 때 탁(啄)을 해주는 다른 생명의 연결 고리


가 되어 주어야 한다.

오르막 길 오르는 짐수레 뒤에서 조금만 힘을 얹어도 수레는 가볍게 오를 수 


있고, 굶주린 사람의 허기를 면해 주면 재기할 수 있듯이... 내가 남에게 유익함


을 주는 행위가 '탁(啄)'인 것이다. 즉 노력은 '줄'이요, 그 노력에 힘을 보태고 


용기를 주는 것이 '탁' 이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줄탁동시도 중요하지만, 사랑, 관용, 화해, 양보, 베품, 


예절 등, 정신적인 줄탁동시가 가득하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는 자기 계발을 위한 '줄' 의 삶을 살면서 남의 완성에 보탬이 되어주는 


'탁의 인생' 을 살아야 한다.

줄탁동시!~~ 여기에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가 들어있다.

<참고> 원래 중국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임제종(臨濟宗)의 공안집(公案集:


화두집)이자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불서(佛書)인 송(宋)나라 때의 《벽암록


(碧巖錄)에 공안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깨우침을 위한 물음의 요체이자 수수께끼로, 책으


로 말하면 제목과 같은 것이다. 선을 수행하는 승려들은 하나의 공안만 가지고


도 평생을 참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몇 자 안 되는 공안일지라도 그 속에는 


깨달음의 이치가 숨어 있어 그 뜻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앞 다투지 않고 흘러가는 낙동강 태극줄기 원기받아 양반-상민 공존의 장으로

 


 

성철스님 법어


1981년: 부처님 오신 날






생명의 참모습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여 일체가 숭고합니다. 




그러므로 천하게 보이는 파리, 개미나 
악하게 날뛰는 이리, 호랑이를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같은 무리인 사람들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살인․강도 등 극악 죄인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때 
비로소 생명의 참모습을 알고 
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광대한 우주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 존재 아님이 없으며, 
부처님 나라 아님이 없어서, 
모든 불행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서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흐르는 강물도 반짝이는 모래밭도 보이지 않았다. 
갈수기여서 마을을 보듬고 흐르는 낙동강은 갈대 숲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부용대도, 옥연정사도, 소나무 숲 만송정도 강의 침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곳이어서 멀리 영국 여왕이 구경을 오기도 하고(1999년),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보존한 가치가 널리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2010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이곳을 30년 전 들른 적이 있었다.
당당한 기와집, 옹기종기 둘러앉은 다정한 초가집, 넓고 호젓한 골목길…. 마을 정경은 옛 모습 그대로이었지만 ‘봉제사 접빈객’이 삶의 좌표라던 양진당 종부는 가고 없었고, 고봉밥을 담아주던 초가집 안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일렁이는 강둑을 거닐며 풍산류씨 세거 600년 역사를 간직한 채 흐르는 침묵의 강, 강의 침묵에 귀 기울여 본다. 

누가 침묵을 소리의 뼈라했던가. 침묵은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마을을 안고 도는 강의 물돌이 형세가 하회(河回)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주었듯 낙동강은 이 마을 형성의 근거이자 하회마을이 생성해낸 문화유산의 원천이었다.


◆물과 땅이 어우러진 태극형상의 하회 

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삶의 젖줄이자 문명의 토대이다.
강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촌락을 이루게 하고, 강은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원력을 한데 모아 인재를 낳고 철학을 낳고 예술을 낳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갠지스강이 그랬고, 나일강이 그랬고, 세느강이 그랬고, 낙동강이 그랬다.
강이 없는 역사, 강이 없는 문명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둑 위에는 세 그루 버드나무/울타리 밑엔 십리나 되는 모래밭/그 안에 자리 잡은 정자 좋기도 해라/돌아보니 여기가 내 집이로구나”와 같이 강가에 집을 짓고 싶어 했고, 김소월은 엄마와 누나와 함께 반짝이는 은모래 강변에서 가을 노래 들으며 살기를 꿈꾸었다.
조선조 실학자 이중환이 그의 택리지에서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모래밭 강변을 첫째로 꼽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하회마을 입향조 공조전서 류종혜공은 물과 땅이 얼싸안고 누워 있는 태극형상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삶의 터를 이곳으로 옮긴다. 
고려의 국운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일이었다. 
민심은 흉흉하고 백성들은 저마다 급급하게 살 길을 궁리하던 때였다.
공은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오른다.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감싸고돌고 있었다.
태극의 모양을 이룬 신비한 지세였다. 

강변 모래사장은 가뭄을 막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태극의 형상은 홍수의 범람을 피하기에 넉넉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을 이룬 산 아래 정경이 마치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형상이었다. 

픙수지리적으로 태극지형과 연화부수형의 형세는 길지(吉地) 중의 길지가 아니던가. 공은 이곳이야말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만한 곳이라 여겨 풍산 상리에 세거(世居)하던 식솔들을 거느리고 삶의 터를 옮긴다. 

그러나 하회마을로의 이주와 정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향조 류공의 기적비(紀蹟碑)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3년 동안의 적선과 공덕 끝에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인 즉 이렇다. 
집을 지으면 무너지고 다시 지어도 또 무너지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의 꿈에 한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이 터에 집을 짓고자 하면 3년 동안 1만명을 살리는 적선을 하라”고 일러준다. 
활만인(活萬人)의 계시였다. 
공은 마을 입구 큰고개에 원두막을 짓고 지나다니는 나그네들에게 3년 동안 적선을 실천한다.
음식을 대접하고 노자를 쥐어주고 짚신을 선물하는가 하면 참외를 심어 인근 마을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가난한 이웃을 먹이고 입히는 3년 동안의 적선 후에 집을 짓자 비로소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양진당 사랑채를 세울 때의 일이었다. 
조선조 대 유학자 겸암 류운룡과 징비록(국보 132호)을 집필한 서애 류성룡 형제로 대표되는 걸출한 인물들의 배출, 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 등 소중한 전통문화의 출현을 예비하는 역사적 터 닦기가 공것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활만인(活萬人) 계시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탁발승이었을까? 아니면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도사였을까? 역사적 사실의 진위보다 그것이 궁금하다.
나는 계시의 주인공이 저기 저 갈대숲, 천만년을 흐르는 낙동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마음과 근엄한 아버지의 자세로 마을을 감싸고도는 태극 형상의 낙동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신령의 계시는 흐르는 강물소리이었으리라. 강은 삶의 젖줄이어서 비옥한 땅을 만들어 일용할 양식을 주고,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듯이 흐르는 물은 지고(至高)의 선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나눔의 지혜와 연민의 미덕을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따지고 보면, 집이 무너진 것은 양진당 옛 터가 늪지대이기 때문일 터이고, 터 잡기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느 연구자의 지적처럼, 하회마을을 선점해서 살고 있던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들의 저항 때문일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집짓기와 터 잡기의 어려움을 현실의 눈이 아닌 신령한 계시를 통해 해결하려는 순박한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던가. 자연의 이치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비켜설 수 없는 스승이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유비무환 정신 담은 징비록 
징비록의 구상과 집필의 물리적 공간이 옥연정사이었음 또한 우연이 아니다.
1601년 낙향한 서애 류성룡 선생은 옥연정사에서 그 유명한 징비록(懲毖錄)을 쓴다.
옥연(玉淵)은 서당 앞을 흐르는 깊은 물의 색조가 옥과 같아서 선생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1969년 국보 132호로 지정된 이 책은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한 선생이 몸소 겪은 임진왜란을 회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책의 이름에 그 뜻이 들어 있듯이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역사적 소임의 산물이었다.

옥연정사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이 없었다면 선생이 피로 기록한 16권 7책의 국보, 징비록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옥연에 맑게 씻은 붓을 들어 유비무환의 소중함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소리에서 활만인(活萬人)의 계시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징비록의 간접 저자는 부용대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바람 일렁이는 강가에 서서 아득한 옛날 조선시대 하늘을 떠올려본다. 
그날은 부용대 밑 낙동강이 도도하게 한여름 밤을 흘렀으리라. 강물 위에 배 띄우고 강물 가득 달걀 불을 밝혔으리라. 그날 만송정 모래강변엔 정월 대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으리라. 청홍색 띠를 두른 초랭이가 겨울밤이 깊도록 어깨춤을 추었으리라.

하회선유줄불놀이는 양반들의 축제였고,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상민들의 놀이였다.
양반들의 축제와 상민들의 놀이가 어떻게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었을까? 유례를 찾기 힘든 하회마을의 반상문화 공존현상은 품앗이 덕분이었다고 한다.

하회별신 탈놀이에 양반들은 경비를 대고 상민들은 양반들의 선유줄불놀이에 노동을 대었던 것이다. 
양반들이 누리던 음주가무 흥취가 최고조에 오르도록 상민들은 절벽 아래로 불붙인 솔가지를 던지며 낙화야!를 외쳤고, 양반들은 자신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탈놀이에 필요한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상의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때이고 보면 문화적 품앗이를 통해 갈등과 저항을 줄이고 조화로운 삶을 양위할 수 있었던 하회마을 사람들의 지혜는 놀라운 것이었다.

언제 이 마을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차창에 기대어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노자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흐르는 강물은 앞을 다투지 않고 비상사태에도 무리하지 않는다.
산이 막아서면 돌아가고,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지나간다.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우고 뒷물을 기다려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앞물과 뒷물이 평화롭게 손잡고 흐른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태극형상의 낙동강으로부터 신분의 다름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삶의 자세를 배웠을 것이다. 
음과 양이 힘을 합쳐 더 큰 차원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이룬다는 태극사상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깨달음의 문화적 실천이 줄불놀이와 별신굿놀이의 공존, 아름다운 반상문화의 어울림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고 강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갑의 을에 대한 횡포가 도처에서 자행되고, 금수저와 은수저가 딴살림을 차린 지 오래인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볼 때 특히 그렇다. 

월 28일 무심재클럽 세계문화탐방


    끝없는 초원의 길을 따라 천상의 꽃밭에서 별을 보다



    초원으로 가리라. 밀원을 스치고 불어오는 부드러운 저녁바람을 찾아서 가없는 방랑자가 되리라. 가서 이 몸 뼈도 주고, 이 몸 살도 주고 자줏빛 붉은 노을이 되어 하늘 끝까지 걸어가리라. 넓고 넓어서 텅 비어버린 세상 초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는 나그네가 되리라. 제국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았지만 오직 계절따라 피는 풀꽃과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만이 영원한 땅 그곳에서 아득해진 세월의 길을 따라 걸어가리라. 하루는 귀머거리가 되어서 초원의 노랫소리를 듣고 하루는 벙어리가 되어서 초원의 꽃들에게 말을 건내고 하루는 눈 먼 장님이 되어서 노을 속에 앉아 있으리라. 언덕 너머 양떼들을 몰고 오는 목부들의 그림자에 날이 저물면 훈훈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쉰내나는 마유주 한 잔을 마시며 초원에 찾아온 어둠의 빛깔을 헤아려 보리라. 초원은 떠도는 유목민들의 고향 파란 불꽃으로 타오르는 고독이 흐르고 삶은 햇볕에 말라가는 조랑말의 배설물처럼 건조해져 아무런 가식도 없이 선한 짐승의 눈망울을 닮아 있고 들꽃 피는 길을 따라 그리움은 그리움을 낳고 아침햇살에 빛나는 이슬처럼 초원은 슬픔을 소진 하기 좋은 곳. 그곳에서는 잠시 문명의 시간을 벗어놓아도 좋으리. 부질 없었던 세상의 모든 날들을 호명하여 눈물겹게 화해하여도 좋으리. 그리하여 나는 초원으로 가리라. 초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는 나그네가 되리라. 초원의 노래 / 이형권


    여행안내 일시: 2016년 6월 28일(화)-7월 3일(일) 6일 여행지: 몽골 울란바타르, 테를지, 후후노르, 바얀골, 뭉근머리트 등 인원: 18명(5월 20일까지 선착순 모집) 회비: 200만원(일체경비 포함) 신청방법 꼬리말로 신청하고 주민번호, 핸드폰 번호 보내주시고 문자나 카톡으로 여권앞면 찍어서 보내야 합니다. 여권잔여기간 6개월 확인해 주십시오. 비자신청 서류는 신청자에 한에 별도 안내합니다. 문의전화 010-5398-0409 신청자는 예약금 100만원 송금해주십시오 입금계좌 신한은행 100-029-833696 무심재투어 ●몽골 오지여행 상품 설명● 1, 대한항공 노선은 새벽시간이거나 항공숙박이므로 몽골항공이용 2. 스타렉스 차량을 이용하여 오프로드의 초원길을 따라가는 오지여행 3. 울란바타르 관광은 생략하고 초원의 오지로 가는 무심재만의 특별한 일정 4. 유네스코 세계의 자연유산 테를지의 별헤는 밤과 허르헉 양고기와 초원음악회 5. 칭기스칸 유적지 푸른 호수라 불리는 후흐노르 통나무집에서 하룻밤 6. 끝없는 벌판의 길을 따라 초원의 호수 바얀골 지역의 야생화와 유목인의 삶 7. 케롤렌 강변 뭉근머리트 초원의 고대 흉노족의 돌무덤과 암각화 풍경, 승마체험 8. 유목민의 게르에서 숙박하며 밤이면 쏟아지는 별과 은하수를 감상 9. 야생화, 목축풍경, 유목인, 월음기 별 촬영 등 사진여행 코스로 좋은 일정 10. 유류할증료, TAX, 가이드팁, 비자비, 공동경비 물값 등 일체포함 11. 호텔은 2인실 게르는 4인실 통나무집은 6인실 기준, 2인실은 추가요금

    여행일정 제1일 11:30 인천공항 3층 집결 탑승수속과 출국준비 14:30 출발(OM302) 3시간 30분 소요, 16:50 몽골 칭기스 국제공항 도착 현지 가이드 미팅, 테를지 이동(1시간 30분) 몽골 성황당 오보, 톨강, 거북바위 감상, 몽골 정통식 허르헉 석식, 전통문화공연, 바나사우나, 별자리 감상과 촬영 제2일 기상, 아침 산책, 조식 후 후흐노르로 이동, 이동중 점심 광할한 대초원을 자동차로 질주하며 유목인 삶과 게르 풍경 감상 후흐노르 도착 (약5시간 소요) 푸른 호숫가에 동지들과 맹세한 칭기스칸 유적지 탐방 계절에 따라 피는 다양한 야생화 감상 석식 후 통나무집 숙박 (6인실) 야간 별자리 감상과 촬영 제3일 기상, 아침산책, 조식 후 바얀골로 이동(약2시간 소요) 야생화 유목인 풍경 감상하며 바얀골 캠프 도착 후 중식 바얀골 주변의 야생화와 호수 풍경 감상, 유목인 게르 탐방 석식 후 초원의 모닥불, 밤하늘 별자리 감상과 촬영 제4일 기상, 아침산책, 조식 후 뭉근머리트로 이동(약 4시간 소요) 끝없는 초원의 야생화길을 달려 뭉근머리트 도착 후 중식 헨티산맥에서 발원한 몽골의 젖줄 케룰렌강 풍경 감상 은빛 야생마라 불리는 몽골 최대의 말 유목인 풍경 감상 캠프장 뒷산에 올라 케룰렌강과 초원의 일몰 감상 초원의 마지막 밤 캠프파이어와 별자리 감상과 촬영 제5일 기상, 아침산책, 조식 유목인 게르 탐방 수태차 시음 승마체험, 고대 흉노족의 돌무덤과 암각화 감상 중식 후 울란바타르로 이동(약 3시간 30분) 징키스칸 광장 산책, 석식 후 호텔 숙박(선진 그랜드호텔) 제6일 06;00 기상 후 조식 공항 이동 09:45 칭기스 국제공항 출발(OM301) 12:50 인천공항 도착 해산 * 이 일정은 항공 및 현지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 몽골 2차 흡스굴 여행은 7월 말 출발예정입니다.



 




 


길 없는 길, 그 너머에 두고 온 마음...[3]  글 사진 풀꽃사랑


 



   2008. 7. 5. (맑음, 오후 늦게 흐림)




   뭉근머리트 초원의 아침은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청명하다. 마치 한국의 가을하늘 같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만 보이는 광활한 초원에서 보는 푸른 하늘이라니...


 







   아침 식사의 주 메뉴는 소고기 볶음이었던가...? 거의 매 끼마다 고기가 나오다 보니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이곳의 고기는 모두 기름기가 없으면서도 퍽퍽하지도 질기지도 않고 고기 냄새도 많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원에서 방목해서 키우고 인공 사료를 먹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소나 말의 크기도 현저하게 작은데 그 또한 인공적으로 종자개량을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무엇이든 자연 그대로가 좋은데 우리들은 더 많은 고기를 더 빠른 시간에 얻기 위해서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골분을 먹여서 광우병을 퍼뜨리고, 인공수정으로 번식을 시키고, 종자개량에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좁은 공간에 가두어 키우기까지 하니... 가축으로 태어나려면 몽골에서 태어나는 것이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전에는 헬렌강과 야생화 군락지를 돌아보면서 유목민의 게르를 방문해서 몽골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출발했다.


   막연히 몽골 여행을 꿈꾸면서도 광활한 초원과 사막만 생각했지 강과 산, 숲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찾아보지도 않은 채 떠났는데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과 건너편의 나무들을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그 곳에서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혼자서 또는 함께 온 가족, 친구와 함께 기념사진들을 찍고 첫 번째 유목민 게르를 방문했다.


 






   상상했던 바와는 달리 태양열 집열판도 있고, 위성 안테나도 있는 전통과 현대가 뒤섞인 게르였는데 멋진 중절모를 쓰고 색안경을 낀 할아버지와 순박하게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바깥에서 건조시키고 있던 치즈를 권하신다. 우리들은 한국에서 준비해 간 담배며 사탕, 과자 같은 것들을 선물로 드리고 멋쟁이 할아버지와 다정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한 옆에 손자처럼 보이는 대여섯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너살 정도 되는 여동생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뻤는데, 아마도 넓은 땅덩어리에 인구가 280만 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그 중에서도 100만 명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살고 나머지는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다 보니 가족들 간의 친밀감과 유대감이 더 깊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뒷 편에 있는 빨래줄에는 아이들의 옷가지와 함께 전통식품인 보르츠(양념 안한 육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 고기를 주렁주렁 널어서 말리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에 강 쪽으로부터 4명의 아이들이 바람처럼 말을 달려 언덕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할아버지의 손자를 포함한 이웃 아이들로 매년 7월 11일부터 3일동안 열리는 나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연습 중이란다.


   몽골인은 그 어떤 민족보다 말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왜냐하면 시골에 사는 몽골인은 세 살이 되면 남 녀 구별 없이 말에 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에게 말은 그들의 발이고 벗이며 자랑이다. 따라서 말을 타는 순간 아이는 사람으로서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몽골 경마에 참가하는 것은 이렇듯 어려서부터 말 타기를 배워 온 6세에서 12세의 소년, 소녀들이다. 가까이서 보니 말 등에 앉은 소년, 소녀들의 기상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여느 장수 못지않게 느껴진다. 


 




 


 


    잠깐의 만남에 이은 기약 없는 이별(그들에겐 일상이 되었을...)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야생화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났는데 잠시 후에 드디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야생화들이 보인다. 하양, 노랑, 자주색등 여러 종류의 풀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들판 끝까지 온통 꽃천지다. 사진 찍느라고 풀밭에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려 있는 사람, 한 쪽에서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 어린 소녀들처럼 꽃반지를 만들어 끼고 즐거워하는 사람 등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도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토끼풀처럼 생긴 풀꽃이 있어서 나도 꽃반지를 만들어 끼어 보려고 했는데 줄기가 너무 약하고 만드는 방법도 잊어버려 잘 안된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만들어 끼고 보니 바람의 향기님과 무심재님께서 사진을 찍어주신다. 손이 너무 작아서 가죽장갑 한 번 못 끼어 보고, 고무장갑도 맞는 게 없어서 맨 손으로 락스를 만지기도 해서 출퇴근기록기에 지문인식이 안되어 혼자서만 비밀번호를 사용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기에 예쁘게 나온 사진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도 어쨌든 손이 예쁘다니 기분이 좋긴 하다...*^^*


 





 


 



 



 


 



 






 


   야생화 가득 핀 초원을 배경으로 길동무님들과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길을 나서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가롭게 풀을 뜯는 가축들과 말을 타고 가축들을 돌보는 목부(牧夫)를 만난다.


   양들과 소, 말들이 뒤섞여 울음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게 풀을 뜯고 있고 저 멀리 보이는 산과 푸른 하늘, 흰구름...이보다 평화로운 풍경이 또 어디 있으랴...


 




 


   몽골에서는 오축(五畜)이라고 하여 소(야크 포함), 말, 양, 염소, 낙타의 다섯 가지 가축을 귀중하게 여기며 또 많이 키우는 가축이기도 하다. 그리고 토지는 국유이기 때문에 이동 중 어느 곳에나 게르를 설치하면 집이 되고 삶의 터전이 되고 고향이 되며, 떠나면 그 뿐이기 때문에 사육하는 가축의 수가 부의 척도가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환한 이후 몽골의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부와 성공을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부모들 역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도시의 학교로 보내면서 몽골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한다.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환경이 오염되고 사막지대가 늘어나면서 유목민의 수도 줄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몽골에서도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풍경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 한켠이 먹먹해져 온다.


   차는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아있는 그 너머까지 길 없는 초원위에 두 줄기 바퀴자국으로 길을 만들어 가며  달린다.


   길 없는 길...지평선 저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만 같은 몽환적인 상상에 빠져든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 같다...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순간에 불꽃으로 타올라 사라진 한 미국인이 몇 년 후에 먼 이방의 나라에서 살고 있더라는 이야기처럼, 나도 여행길 어느 순간 사라져 세월이 지난 후 낯선 땅에서 낯선 이름으로 살고 있더라고 풍문으로 전해져 올 뿐 돌아오지 않는 그런 여행...’ (나는 역시 전생에 집시 아니면 유목민? 혹은 정신세계가 4차원...? ^^;; )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감행하진 못했지만 길 없는 길, 그 너머에 내 마음을, 내 영혼의 일부를 남겨두고 돌아선다. 언젠가는 지평선 너머 저 끝까지 가보리라......


 



 


 


   오후에는 승마를 하기로 했는데, 끈 달린 승마용 모자들을 준비해 가지 않은 탓에 모두들 모자를 스카프로 동여매고 등산용 스패츠와 비슷한 형태인데 가죽으로 만든 각반만 찬 차림으로 무심재님과 열린마음님 부부, 카멜레온님과 가이드 송선생님, 얌 만이 혼자서 승마를 하고 나머지는 몽골인 기수 한 명에 두 사람씩 이끌려서 말을 탔다.


   그런데 쏭쏭님과 가장 씩씩할 것 같았던 홍기님이 무서워서 말을 못 탄단다...새로운 발견이다. *^^*


   나는 2년 전에 허리와 목에 인공디스크와 인공뼈를 넣는 대수술을 받은 터라 혹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수술한 부위가 잘못될 것 같아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주치의 선생님께 여쭤보았더니 일반인이 말에서 떨어져서 다치는 거나 내가 떨어져서 다치는 거나 그 손상정도는 매일반이라고 하셔서 눈 딱 감고 타기로 했다.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도 되었지만 '까짓거 잘못되면 수술 한 번 더 하지 뭐...'하는 무모한 생각까지 가지고서...


   태어나서 처음 말을 타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긴장해서 자꾸 중심을 잃을 것 같더니 나중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니 자연스럽게 말과 내가 하나가 된다.  


   내가 탄 말은  어미말이라서 말 타는 내내 망아지가 졸졸 따라 다녔는데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열린마음님이 탄 말은 열린마음님의 체격에 비해 너무 작아 보여서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는데(죄송!) 그래서 그런지 “츄! 츄!(우리말로 이랴! 이랴! 쯤?)”하면서 독촉을 해도 잘 달리지 못한다. 그래도 저 멀리 홀로 떨어져서 말등 위에 위풍당당한 기세로 앉아있는 그 모습이라니...!


   그래서 우리가 붙여준 별명이 ‘당나귀 탄 징기스칸’이다. 다음날인 7월 6일날 탄 말도 역시 비슷해서 그 별명이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신 열린마음님 감사합니다.*^^*


   반환점을 돌아 돌아오는 길에 열린마음님이 옆에서 달리셨는데 옆에서 “츄! 츄!”하면 내 말이 먼저 알아듣고 열심히 내달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선두로 들어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 우리 일행을 이끌어주었던 기수 중 가장 나이 어린 소년, 아마 6살 정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후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유목민 게르만 방문하기로 했는데 우리들이 원해서 결국은 유목민 게르도 방문하고 래프팅도 하게 되었다. 오후에 들른 유목민 게르는 가축의 수가 2백마리가 넘는 부유한 유목민으로 우리가 방문하자 새로 수테차이(물에 찻잎과 우유를 넣고 끓이다가 버터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데 예상외로 맛있었다)를 끓여서 담백한 밀가루 빵과 함께 대접해 주었는데 그것이 손님에 대한 유목민들의 예의란다.


   안주인은 머리에 그루프까지 말고 있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손님에 대해서 우리처럼 호들갑스럽게 예를 갖추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을 듬뿍 전해 주는 순박한 사람들이 몽골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중에 치즈며 직접 발효시킨 요구르트까지 싸주시는 넉넉한 인심에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 수테차이를 끓이는 모습



 


♣ 일종의 세면장인데 물이 귀한 탓에 나무에 매달린 작은 양철통에 물을 부어놓고 아래에 달린 꼭지를 위로 누르면


   물이 조금씩 나오도록 되어 있다. 간단하면서도 생활의 지혜가 엿보이는 장치다.




 


♣ 집 안이 좁아서 일부는 밖에서 수테차이를 마시는데 원샷하고 있는 저 여인은 누구...? *^^*






   드디어 고대하던 래프팅을 하러 차 위에 고무보트 두 대를 싣고 캐롤렌강으로 출발, 혹 물에 빠질지도 몰라서(은근히 기대했는지도...) 안경까지 벗고 출발했는데 처음엔 물살이 그다지 세지 않아 여유롭게 강 주변의 풍경을 보니 마치 사진에서 본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풍경처럼 나무들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워서 모두가 감탄하고 있었는데 조금 가다보니 갑자기 물살이 세져서 보트를 뒤집는 장난을 치기는 커녕 착륙지점을 놓쳐서 보트가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모두는 국제 미아가 될까 봐서 긴장했는데 조금 아래에 강물을 가로질러 쇠줄 한 가닥이 쳐져 있었고 그것을 붙잡고 강기슭으로 나가야 한단다. 그런데 정작 쇠줄을 붙잡으려 하니 물살이 너무 세서 붙잡지 못하고 모두 머리를 숙이고 지나치고 말았는데 물을 가장 무서워하는 얌만이 사명감을 발휘해서 쇠줄을 붙잡았다가 보트에서 튕겨나가 달랑 쇠줄에 매달려 있게 되었다. 우리를 뒤돌아 보는 얌의 그 애절한 모습이라니...ㅠ.ㅠ


   우여곡절 끝에 얌도 우리도 무사히 돌아왔지만 우리의 얌, 아마도 십년감수 했으리라.


 







 


♣ 몽골에도 이런 아름드리 나무가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한여름 오후에 돗자리 펴고 누워 한가로이


   책이라도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변이다.





 


   오늘 밤엔 이번 여행의 길동무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캠프파이어를 하는 날, 각자가 준비해온 별을 보며 마실 음료(?)와 안주가 차려지고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가운데 두고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바람의 향기님의 하모니카와 청초님의 노래, 그리고 듣기 힘들다는 무심재님의 귀한 노래까지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홍기님의 사랑가 열창에는 모두가 감탄...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우리가 태운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각자의 몫......


이번에도 약 먹을 시간 때문에 조금 먼저 자리를 떴는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게르 저 편에선 따뜻한 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 달은 같은 달이건만...






                                                        


                                                                         







 

친구를 보내며

 


 

 

달이 떴소
팔월 보름 둥근 달이 차갑게 떴소

너무 밝아 보기 거북하다던

저 달이 아직도 차갑게 떠 우릴 보고 있는데

어찌 그리 서둘러 떠났소

그리도 세상 짐이 버거웠던 거요

이 풍진 세상에서
마음 한 번 편안히 눕히지 못하고

삭아 내린 삭신을 이끌며 살더니

인연 모두 던져 버릴 때

애린 가슴은 없던 가요

목이 쉬도록 불렀던

거기서 기다리고 계시던가요

돌아올 수 없는 먼-길을 떠날 줄 알았으면

자네가 좋아하는

막걸리라도 대접하는 걸

깊은 주름에

때가 절은 소매 너풀거리며

뒤돌아서는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구려


한 번만
꼭 한 번만 더

찾아 주시구려
어느 여류시인의 울음소리가
희미한 달빛 속에 출렁거리고 있소

그녀의 가슴이 다 타고나면
세상의 시간도 기울어 달도 지고
흐느낌만 남아
재(災)만큼이나 캄캄해지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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