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과 악마성

2016. 5. 21. 17: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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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과 악마성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옛날 서양에서는 인간이 가진 성욕(性慾) 살욕(殺慾) 등을 악마의 성품으로 보았다. 악마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동물적 본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물을 영혼이 없는 존재로 간주했다. 인간 안에 있는, 사랑 연민 배려 관용 지력 등의 신(천사)적인 성품과 성욕 파괴 분노 미움 살해 등의 악마적인 성품의 공존은 풀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모든 생물은 동일한 단일 조상을 두었다
광합성을 하는 동물도 존재한다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가 섞이기도 한다

진화론은 이런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제공했다. 인간이 동물의 단계를 거친 것을 증명했다. 유전자의 발견은 모든 생물이 같은 조상을 가진 것을 증명했다.
(식물도 동물과 같은 조상을 둔 형제지간이다. 에덴동산의 식물들은, 특히 지혜의 나무는, 아담과 이브와 형제자매지간이다.

광합성은 식물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광합성을 하는 동물이 존재한다.

푸른갯민숭달팽이는 해조류를 먹고사는데, 통째로 흡수된 해조류의 엽록체가 달팽이의 투명한 피부 밑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푸른색이다. 엽록체는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서 달팽이에게 포도당을 제공한다. 그 결과 9달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 포도당제조공장인 엽록체가 낡으면, 다시 싱싱한 해조류로부터 새 엽록체를 제공받는다. 놀랍게도, 이 달팽이들은 해조류로부터 광합성유전자를 복사해 자기 유전자에 편입함으로써 스스로 광합성을 할 수도 있으며, 이 광합성유전자는 당연히 자기 새끼들에게 전해진다. 식물의 유전자가 동물유전자의 일부가 된다는 말이다! 짝짓기를 통하지 않고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가 섞이는 기상천외한 방법이다.

점박이도롱뇽의 경우에는, 해조류의 엽록체가 도롱뇽의 세포 안으로 들어가 미토콘드리아 옆에 자리 잡고 광합성을 통해서 미토콘드리아에 산소와 탄수화물을 제공한다.
광합성을 하는 곤충의 예도 있다. 일부 진딧물은, 날씨가 추워지면, 식물에서 훔쳐 온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로 광합성장치를 만든다.)

유전자의 변이를 역추적(逆追跡)한 바에 의하면, 인간이 지금의 침팬지보다도 더 미개한 상태였던 게 불과 600만 년 전이다. 인간은 장장 35억년 동안이나 동물로 살아온 것이다. (정확하게는, 지구생명의 역사를 35억년이라 하면, 35억년에서 600만년을 뺀 34억9천400만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동물의 성품을 가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인간이 신적 성품을 가진 것이 기적이다. 하지만 동물에게도 어느정도 신적인 성품이 공존한다. 동물도 자기희생 연민 사랑 등을 지녔다. 사자 물소 미어캣 침팬지 등은 새끼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건다. 침팬지는 우리에 갇힌 낯선 침팬지를 풀어주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보노보는 성을 생식의 수단이 아닌 친교와 쾌락의 수단으로 삼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이성동성을 가리지 않고 하루 중에도 수시로 서로 성교의 기쁨을 나눈다. 입을 벌리고 환희의 비명을 지른다. 성의 '생식 이외의 파생효용'을 발견한 두 번째 생물이다: 보노보는 뒤늦게 200만 년 전에 침팬지와 갈라졌지만 성에 있어서는 인간과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동물에게는 신성과 악마성이 공존한다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했으므로
인간이 지닌 신성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만약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형제지간인 식물에게도 신성이 있어야 한다

동물들에게는 '인간이 가진 신성'과 동물성이 공존한다. 이 성품이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발달한 것이다. (사실, 모든 동물은 다른 동물과 달리 발달한다. 그게 진화이고 그래서 생물종의 다양성이 펼쳐진다.)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에서, 인간만이 동물들과 떨어져 유리된 존재일 리는 만무하다. 인간은,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것처럼, 동물을 잡아먹고 살았으며 생긴 것도 영락없는 동물이다. 머리 하나, 항문 하나, 눈 두 개, 귀 두개, 콧구멍 두개, 코 하나, 목구멍 하나, 심장 하나, 폐 두 개, 콩팥 두 개, 간 하나, 오줌보 하나, 팔다리 네 개에, 심지어 발가락까지 닮았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동물에게 하는 짓은, 성공한 사람이 비루한 친척을 동물처럼 멸시하고 심지어는 잡아먹는 꼴이다.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했으므로, '인간이 가진 신적인 성품'은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35억년 동안 점진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아메바 지렁이 쥐 등에, '인간이 가진 신적인 성품'이 없는 것은 분명하므로, 이런 신적인 성품은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다. 조금씩 생겨 점진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이를 부정하고 인간에게 본래부터 신적인 성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메바나 지렁이에게도, 인간과 동일하게, 신적인 성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만약 아메바 같은 단세포 동물에게 신적인 성품이 있다면, 식물과 동물은 같은 조상(단세포생물)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므로, 식물에게도 신적인 성품이 있어야 한다. (식물 유전자는, 동물유전자처럼 네 종류 염기인 A, G, C, T로 이루어진 이중나선 구조이며, 동물유전자와 반 이상 일치한다.) 그러나, 동물의 불성(佛性)과 아트만(참나)을 인정하는, 불교와 힌두교 모두 이를 부정한다. (기독교 회교 유대교는 한 발 더 나아가, 식물과 동물에는 영혼이 없고, 오직 인간에만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연계의 히틀러이다!) 대단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동물이 본래부터 신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이런 생각을 버리면, '식물도 본래부터 신적인 성품을 가진 것이 아니냐'는 치명적인 반론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 결과, 상기(上記)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왜 몸은 35억 년 전 옛 몸이 아닌데 마음만은 35억 년 전 옛 마음일까
자연계는 특히 동물계는 부처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몸은 35억 년 전에 처음부터 지금의 몸을 가진 게 아닌데, 어째서 마음만은 35억 년 전에 처음부터 완전한 마음을 지녔다고 주장할까?

동물은 (남을 죽이고 잡아먹는) 악마적인 성품도 동시에 가졌으므로, 처음부터 신성을 가졌다면, 같은 이유로 처음부터 완벽한 악마의 성품을 지녀야 할 것이다. 사자는 물소를 산 채로 뜯어먹지만, 곤충도 마찬가지이다. 말벌은 살아있는 숙주의 몸에 알을 낳는다. 알은 부화한 다음 숙주를 파먹으며 자라지만, 말벌유충이 다 자랄 때까지 숙주의 몸은 살아있어 썩지 않는다. 어미 말벌이 미리 숙주에 마취제를 투입하여 신경계를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숙주인 애벌레는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것이다.

당신이 목 아래를 마취당하여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데 누군가 배속에서 당신을 파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이 죽을 때까지. ‘사각사각’ 파먹으며 목까지 올라온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걸 목격한다고 상상해 보라.

자연계는 이처럼 무시무시하다. 부처님 당시보다 더 무시무시해진 것일까? 아니다. 단지 생물학이 발달하여 기존의 사실을 알아낸 것뿐이다. 이런 일은 자연계에 비일비재하다. 모든 곤충의 10%는 살아있는 숙주의 몸에 알을 낳는 포식기생자(parasitoid)이다. 자연계는 부처님이 생각하시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피바다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주제에,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주제에, '본래 선한 완벽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과대망상을 한다. 또 온갖 흉측(凶測)한 무기로 서로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완벽한 신의 성품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칼 창 활 도끼 철퇴, 총 대포 기관총, 화학무기 세균무기, 폭탄 원자탄 수소폭탄 중성자탄, 지뢰 부비트랩 크레모아(claymore), 소이탄(燒夷彈) 네이팜탄 화염방사기 등 온갖 무기를 발명해 잔인하게 서로 죽이면서 말이다. 찔러 죽이고, 참수해 죽이고, 불로 태워죽이고, 박살내 죽이고, 갈가리 찢어 죽인다. 탐욕과 증오와 무지의 충돌은 이처럼 무섭다.

식물이 오히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가 신의 성품을 지녔다고 해야 옳을 지경이다: 누구를 해치는 일도 없고, 날이 덥건 춥건 불평하지 않고 감내한다. 뭇 생명의 집이 되고 양식이 된다.

"부처가 뭐냐?"는 질문에, 조주 고불(古佛)은 “정전백수자”라고 대답했다. 복잡한 생각이 없이, 또 마음을 불가마처럼 태우는 초열(焦熱)번뇌가 없이, 묵묵히 뭇 생명에 이로운 행을 하는 것이 어찌 부처가 아니랴. 자기를 얽어매는 번뇌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고정관념이다. 무여열반에 든 부처에게 감정이 없다면, 식물은 이미 무여열반에 든 부처다. 무여열반에 든 부처가 누리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른 중생들이 나누어 즐길 수 없다면, 식물은 이미 상락아정의 무여열반에 든 부처다. 의식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큰 집착이기 때문이며, 의식에 대한 집착을 여윈 ‘말없는 행복’(大寂樂)이 최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증오를 보려면 사자와 물소를 보라

신적인 본능이건 악마적 본능이건, 35억년 진화과정을 통해서 종(種)의 보전에 기여한 것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사라졌다. 새끼와 가족과 동족은 사랑해야 종이 살아남고, 적과 먹이는 죽여야 종이 살아남는다. 나를 잡아먹으려는 자나 죽이려는 자는 미워하고, 나에게 먹이를 주고 살려주는 자는 좋아해야, 개체가 살아남는다, 가족과 종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사랑과 증오는 필요해 왔고, 생명체 안에 동시에 존재해 왔다. 좋은 것은 사랑하고 나쁜 것은 미워한다. 식용버섯은 사랑하고 독버섯은 미워한다. 사람의, 동물의, 사랑과 미움은 생각외로 단순한 기원을 갖는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사자와 물소의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과 증오는 이에 대한 증언이다. 사자 사망의 제일원인은 물소뿔이고, 물소 사망의 제일원인은 사자이빨이다. (사자가 온 몸을 물소뿔에 찔려 만신창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물소를 잡아먹으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면, 술과 담배로 간암과 폐암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죽도록 마시고 피우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탐욕과 증오와 무지는, 부처님이 보시기에, 물소뿔이었을 것이다.) 비극은, 사자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점이다. 식물을 소화시킬 효소가 없으므로 남을 잡아먹거나 굶어죽거나 둘 중 하나이다. 과연 최선은 사자가 자이나교도가 되어 자발적인 아사, 즉 단식사를 하는 것일까?

진화론과 우주론은 인류에게 새로운 눈과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무아론과 넓은 의미의 윤회에 눈을 뜨게 하는 첩경이다

새로운 진리의 발견은 우주와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여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지식과 관점은 우주와 생명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만든다.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을 보게 되고 보는 눈에 깊이가 더해지면, 감히 마주 보지 못할 정도로 지혜가 빛난다.

진화론과 우주론이 그런 역할을 한다. 현대우주론은 지구가 특별한 행성이 아니라 100해(1뒤에 0이 22개나 딸린 수. 지구 상 모래알 개수보다 더 큰 수이다) 개가 넘는 행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화론은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식물 동물과 같은 선상에 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밝혔다.

인간이 생물에 대해 특히 동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무아론도 이해할 수 없고 윤회론도 이해할 수 없다.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깊은 이해도 불가능하다. 몽롱한 안개에 싸인 듯한 신비로운 이해가 아니라 눈이 시릴 정도로 명징(明澄)한 이해를 얻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종교는 눈가리개이다

진리는 다 드러나 있으나, 다만 자기가 보지 못할 뿐이다.
종교는 거대한 눈가리개이다. 심안(心眼)을 가려 봐도 뭘 봤는지 모르게 만든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 흐믓한 쪽지 한 장의 사연 ★  
 
어떤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사업실패로 거액의 빚을 지고
세상을 떠나자 마지못해 생계를 위해
보험회사의 일을 하게되었습니다.

허지만 그동안 집안에서 살림만 하던 여자가
그 험한 보험 일을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는 딸만 아니면...하루에
수십 번도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였습니다.

 

추운 겨울 날이었습니다.
거액의 보험을 들어준다는
어느 홀아비의 집에 방문했던 아주머니는
그만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녀는
근처에 있는 어느 한적한 공원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자살까지 생각하며
한참을 울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그녀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손수레를 끌고다니며 공원에서
커피와 음료수 등을 파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아주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고 하더니
갑자기 손수레에서 꿀차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따뜻한 물을 부어 몇 번 휘휘 젓더니
아주머니 손에 살며시 쥐어 주며 빙그레 웃어 보였습니다.

마치 방금 전에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비록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그 따스한 미소는 그 아주머니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침까지 굶고 나와서
너무나도 춥고 배고팠던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따뜻한 정에 깊이 감동하면서
눈물로 꿀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힘을 얻어 다시 일터로 나갔습니다.


 

 

그 후 몇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공원에서 차를 팔고 돌아 가던 할머니가
오토바이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수술이 무사히 끝나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뺑소니 사고였기때문에 할머니는 한 푼도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퇴원하는 날이 가까워 오면서 할머니는 거액의 수술비와
병원비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딸이
퇴원수속을 위해 원무과로 찾아 갔을 때였습니다.
원무과 여직원은  할머니의 딸에게
병원비 계산서 대신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수술비 + 입원비 + 약값 + 기티비용 / 총액 = 꿀차 한 잔

할머니의 딸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래자
서무과 여직원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5년 전.... 자살을 생각했다가 꿀차 한 잔에 다시 용기를 얻고
지금은 보험왕이 된 어떤 여자분이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 배경음악 / 사랑의 기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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