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바로 마음을 가르켜 성품을 깨닫는다

2016. 7. 9. 21: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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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마음을 가르켜 성품을 깨닫는다


육조단경에 도명 상좌가 육조대사와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장면는

공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이래 전개된 조사선祖師禪의 방편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이 오조 홍인 회상에서 깨달음을 얻고는 옷과 발우를 전해 받습니다.

옷과 발우가 행자이던 혜능에게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오조 회상의 스님들이

그의 뒤를 쫓습니다. 마침 도명상좌가 대유령에서 혜능스님을 따라잡게 됩니다.

옷과 발우를 얻을 수 없었던 도명상좌가 마음을 고쳐먹고 혜능 스님에게 법을 묻습니다. 


"나를 위하여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혜능스님이 말합니다

"마땅히 모든 인연을 쉬어 버리고 하나의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제가 드대를 위하여 말하겠습니다"

잠시 침묵한 후에 도명에게

"善도 생각하지 말고, 惡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도명 상좌의 본래 면목입니까?"

하고 말하자 도명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가리켜 주심을 받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고 그 물의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조사선의 방편은 특별한 수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늘 이 속에 있고

늘 이것을 쓰고 있기에, 쓰고 있는 이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보일 뿐입니다.

특별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경지로 올라서는 것도 아닙니다.  


늘 벗어나 있지 않은 근본 바탕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自性이라고도 하는데, 이 자기의 성품을 돌아보고 이것이 전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의 근본이 어떻게 우주만상의 근본이 될 수 있을까요? 


온 우주가 나의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라면, 자성을 깨닫는 것이 우주의 근본을

깨닫는 것과 별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경험하는 가운데 우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밖의 우주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생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생각은 바로 나의 생각이니, 온 우주는 내가 그린 우주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성을 밝히는 것이 바로 우주의 근본을 밝히는 것입니다.

접근이 아주 쉽습니다.시공간을 따로 벌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특별하든 특별하지 않든 우리 자신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라면 언제나 자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분별심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하는데, 뒤집어진 견해입니다.

실상을 모르니드러나는 모양을 있다고 여기고 그것에 강력한 믿음을 부여한 착각입니다.

이 착각, 즉 분별된 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면 자성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가 법을 구하러 온 도명 상좌에게 요구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쉬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졸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구하려는 생각이든 얻으려는 생각이든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신경쓰지 마라. 모든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없애 버리려 하지도 마라.

 모든 의도를 내려놓았을 대, 모든 것이 늘 있지 않느냐. 이것에서 생사가 갈리고

나와 너, 우주가 드러나지 않느냐.'


곧바로 가르킨 것입니다. 도명상좌는 육조 대사의 말씀에 따라 생각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도를 쉬었습니다. 그러자 문득 본래 있던 생생한 마음바탕이 드러난 것입니다.

특별한 얘기가 없습니다. 깨뜨릴 수 없고 늘 존재했던, 어느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어느 누구에게서 받을 수도 없는 존재의 바닥을 본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근본, 존조의 비밀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름 도명 상죄의 말이 의미심장합나다.

"이것은 우리가 물을 마실때 찬물을 마시면 찬 줄 알고,

더운 물을 마시면 더운 줄 아는 것과 같에요"

바로 이것입니다. 소리인 줄 알고 아픈 줄 알고, 사물이 여기에서 드러나고,

생각이 여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온갖 것이 이 바탕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한번 차가운 물 한 들이켜 보세요.

생생하지 않습니까?

말 할 수 없고 보여 줄 수 없지만 스스로 분명한 바로 이것입니다.



- 릴라님의 <아줌마와 선禪> 중에서

 

나를 안다는 것 / 최연수 시인

너무 환해서, 너무 눈이 부셔서

형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이 가까워서 오롯이

어떤 물체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차라리 빛이 없는 칠흑의 밤,

손으로 더듬어서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은,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탁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혼인을 한 오이디푸스 그는
두 눈을 뜨고도 眞實을 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찌릅니다.
시력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얻은 혜안(慧眼).
탐욕과 무지에 가려있는 외형의 눈, 肉眼을 버리고서야
眞實을 보는 밝은 마음의 눈, 혜안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안다는 건
가만히 나를 들여다봐야 가능한 것이지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진정한 나를
가만히 관찰하고 응시할 때 비로소 그 나를 볼 수 있습니다.
운명을 이겨가는 것, 깨달음을 얻는 것 등은 이렇듯 진정한
나를 알고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기에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