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마성스님

2016. 7. 23. 18: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이 카페에서는 빠알리어가 깨져 나타나기 때문에 마성스님의 블로그 본문을 읽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riplmaseong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

 

마성/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어제(2014. 9. 12) ‘진흙속의연꽃이 「종교경전을 무조건 다 믿는 것은 광신이라고? 학자와 스님의 글을 보면」이라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와 필자를 회의론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강병균 교수의 글 가운데 극히 일부를 가져와 내세와 윤회도 믿지 않는 유물론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강 교수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살생」이라는 글 중에서 “6도 윤회는 지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지구 위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불교평론》2009-06-10)라는 대목을 인용한 다음,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초기경전에 나오는 초월적인 현상이나 윤회를 믿지 않는 것은 단멸론자라는 취지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특히 그는 초기경전에 나오는 불교의 세계관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필자는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을 나의 블로그(팔리문헌연구소)에 올린바 있다.

 

그런데 진흙속의연꽃이 이러한 나의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흙속의연꽃의 글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삼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이라는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의 주장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이 길지만 끝까지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불교의 통속설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설명으로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이야기가 있다. 삼계는 선악업에 의한 생사윤회의 세계이고, 출세간은 윤회를 초탈한 열반계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우빠니샤드의 제삼도(第三道) · 조도(祖道) · 천도(天道)의 세 길 및 불사(不死)의 범천의 세계에 대체로 상당하는 것임은 말한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삼계와 출세간에 관한 설명은 일단 붓다 자신에 의해 말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부파불교에서와 같이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의 삼계를 생물이 생존하는 구체적 세계로 상세하게 서술한 것은 붓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삼계설(三界說)에 의하면, 욕계는 지옥 · 아귀 · 축생 등의 세계를 최하위로 하며, 그 위의 지상에는 인간계가 수미산(須彌山, Sumeru)이라고 하는 히말라야 산을 이상화 한 높은 산의 사방에 인사주(人四洲)로서 존재하고, 그 위에 욕계라고 하는 여섯 개의 천()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육욕천(六欲天) 가운데, 인사주(人四洲)를 수호하는 사왕천(四王天, 四天王)은 각기 수미산의 사방 기슭에 살며, 수미산 위에는 제석천(帝釋天)을 비롯한 삼십삼천(三十三千)이 궁전을 짓고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왕천과 삼십삼천 두 가지는 지상에 살고 있으므로 지거천(地居天)이라 하고, 다시 그 위의 야마천(夜摩天) · 도솔천(都率天) ·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라고 하는 네 천()은 공중에 그 주거를 짓고 살아간다고 하여, 이것을 공거천(空居天)이라고 부른다.

 

이상의 여섯 종류의 욕천(欲天), 인간계에서 좋은 환경에 태어나는 것과 함께 보시나 지계 등의 상대적 선업을 행한 결과로서 얻어지는 세계라고 되어 있다. 인간계의 불행한 환경에 태어난다든가, 지옥 · 아귀 · 축생 등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그가 전생에 악업을 쌓았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음은 색계천(色界天) · 무색계천(無色界天)인데, 이것은 전생에서 선정을 행한 데 대한 과보로서 얻어지는 세계이다. 선정에는 그 정신통일 상태의 높낮이에 따라 초선(初禪) · 제이선(第二禪) · 제삼선(第三禪) · 제사선(第四禪)의 네 선정이 있고, 또 그 위의 탁월한 선정으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사무색정(四無色定)이 있다. 그 세계가 색계천(色界天)과 무색계천(無色界天)이다.

 

예를 들어, 현세에서 초선정을 닦은 자는 사후에 초선천(初禪天)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 초선정 가운데에도 상 · 중 · 하의 삼단계가 있어, 하급의 선정에 해당하는 자는 초선천 최하위의 범중천(梵衆天), 중급의 선정을 얻은 자는 그 위의 범보천(梵輔天), 상급의 선정을 닦은 자는 초선천 최상의 천인 대범천(大梵天)의 세계에 태어난다, 제이선정제삼선정에도 각각 삼단계가 있어 그것에 통달한 사람은 사후에 그것에 상응하는 각급의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제사선천(第四禪天)에 대해서는 부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어, 7단계 내지 9단계의 천계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 역시 전생에서의 제사선정(第四禪定)의 수행 정도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다. 더욱 높은 수준의 무색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무색정(四無色定)을 행하면 그 과보로서 내세에서는 사무색계천(四無色界天)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욕계천(欲界天) · 색계천(色界天) · 무색계천(無色界天)의 신들의 이름은 아마도 불교 이전의 인도 신화나 선정의 명칭에서 온 듯하다. 그 가운데에는 불교 이전의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욕계천 중의 야마천(夜摩天)은 베다 시대 이래의 죽음의 신 야마(Yama)에서 온 것이고, 삼십삼천의 이름 역시 베다 시대의 삼십삼신(三十三神)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십삼천의 최고신인 제석(帝釋)은 석제환인(釋提桓因, Śakra devānām Indra, 신들의 왕인 釋天)이라고 하는데, 베다 시대의 최고신 인드라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설에서는 인드라가 전세계의 최고신은 아니고 겨우 욕계 가운데 지상의 최고신에 지나지 않으며, 그 위에 공거천(空居天)이라든가,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이 무수히 있다.

 

다음으로 브라흐마나 시대의 우주의 최고신 범천(梵天, Brahmā), 불교의 세계설에서 제석보다 높은 지위에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도 색계천의 최하위인 초선천(初禪天)으로서의 범중천(梵衆天) · 범보천(梵輔天) · 대범천(大梵天)에 불과한 것으로, 그 위에 다시 제이선천(第二禪天)에서 사무색천(四無色天)까지를 두고 있다. 더욱이 불교에서는 이 삼계(三界)를 초월한 것으로서 성자(聖者)가 사는 출세간이 이야기되므로, 바라문교의 최고신은 매우 낮게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삼계설(三界說, 삼계라는 말도 베다 시대의 天 · 空 · 삼계를 계승한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불교에서 채용하여 조직화한 것으로, 불교의 통속설로서의 업보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붓다시대에도 삼계를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세계로서 이야기한 것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세계를 의미한 것이었다. 욕계 · 색계 · 무색계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정신상태 중에서, 감관의 욕구가 많은 경우를 욕계라고 하고, 초선(初禪)에서 제사선(第四禪)까지의 선정의 상태를 색계라고 이름하며, 더욱 정적한 정신통일의 상태를 무색계라고 말한 것이다.

 

초기경전에는 위의 삼계(三界) 외에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 멸계(滅界)를 삼계로 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사실적 존재의 세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출세간이라고 하는 성자의 세계가 삼계(三界) 밖에 있다고 하는 것도 성자의 정신상태로서의 깨달음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업보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삼계를 그 가운데 생물이 존재하는 구체적 세계라고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만들어진 세계설은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 이탈한 것인 만큼, 거기에는 불합리하고 모순된 것이 있다. 삼계를 구체적 존재의 세계로 하면, 무색계라는 것은, 예컨대, 물질이 없는 세계로 되는데, 물질이 없는 정신만의 세계라든가 정신만을 가진 생물이라든가 하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존재 현상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이 없는 세계는 공간적 연장성을 갖지 않는 세계인데, 공간성을 갖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 따라서 무색계천(無色界天)과 같은 세계나 생물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나중에는 이 천()의 신들의 수명까지 논하게 되었다.

 

또 색계천(色界天)에 대한 설명에도 매우 이상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초선의 선정에서는 후각이나 미각이 일어나지 않고, 제이선정 이상에서는 다시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초선천의 신에게는 후각이나 미각의 기관으로서의 코나 혀가 없고, 제이선천 이상의 신들에는 눈이나 귀 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없는 정신만의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관을 갖지 않은 생물(동물)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관념적으로, 기껏해야 비유적 · 신화적으로 선정이나 선정에 의해 도달되는 세계를 설명한 것을 부파불교가 사실적 ·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불합리하기 그지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관념설과 사실설과의 상의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사이에 보이는 것은 이러한 세계설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기설에서도 그것의 저속화를 볼 수 있다.(이를테면 三世兩重因果說은 부파불교 시대에 성립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저속한 설명은 부파불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실은 불교 이외의 바라문교나 그 밖의 철학사상 등에서는, 불교 이전에도 불교 이후에도, 보편적으로 이야기되던 것이지만, 단지 붓다의 초기불교에서만은 관념적인 합리주의로 일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불교의 초기경전을 보면 분명해진다. 이것으로도 초기불교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업보사상은 물론 삼계설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조차도, 당시의 인도 일반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듯이, 색계정(色界定)이나 무색계정(無色界定)이라고 하는 선정의 이름도 불교고유의 것이 아니고, 외도(外道)들이 쓰던 것을 채용한 것이다. 초선(初禪)에서 제사선정(第四禪定)까지의 선정에 대해서는, 당시의 선정가(禪定家) 중에 초선정을 불사(不死)의 열반계(涅槃界)라고 말한 자가 있었고, 그 밖에 제이선(第二禪) 내지 제사선(第四禪)의 선정을 최고 해탈의 상태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또 붓다가 수행 시절에 사사하였던 선인(仙人) 알라라 깔?窄?/SPAN>(Āḷāra Kālāma)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최고의 원리로 삼았고,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최고의 열반의 경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이와 같은 선정은 생사윤회를 면할 수 없는 유루(有漏)의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래도 불교가 이것을 채용한 것은 시대정신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교에서의 불사(不死) 열반의 세계는 삼계라고 하는 유루세계(有漏世界)를 초탈한 것으로 무루(無漏)의 출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열반계는 우빠니샤드의 범계(梵界) 사상을 이어 받은 것이고, 또 멀리는 베다나 브라흐마나의 불사감로(不死甘露)의 사상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빠니샤드에서 그 세계는 제사 · 보시 · 단식 · 고행 등의 상대선(相對善)에 의해서는 얻어질 수 없고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올바른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도 열반의 경지는 보시 · 계율 · 유루의 선정 등에 의해서는 얻어질 수 없고 사제(四諦)나 연기(緣起) 등의 올바른 무루지(無漏智)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 불교는 정통 바라문과 달리 범아(梵我)라고 하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이것에 반대되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업보윤회의 사상에 있어서도, 수행해탈의 설에 있어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것 중에는 당시의 인도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그러나 외도(外道)들의 주장을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모두 불교 독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채용한 것이다. 외도(外道)가 유아(有我)를 주장한 데 반해 불교가 무아(無我)를 내세운 것이 그것이다. 또 수행론에 있어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개개의 수행 항목은 거의 모두 외도들이 이미 말한 것이지만, 거기에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조직 정리하여 합리적인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水野弘元, 『原始佛敎』(東京: 平樂寺書店, 1956), pp.76-84]

 

 

이상에서 미즈노 고겐의 삼계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았다. 진흙속의연꽃이 나를 공격하기 위해 인용한 부분을 다시 여기에 옮긴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불교의 세계관이 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으로 잘못 알거나,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이 우주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일 뿐이다.(불교의 세계관 비판, 마성스님, 2014-05-19)

 

진흙속의연꽃은 91겁 혹은 수십억 겁 전에 비바시불 혹은 시기불이 출현하여 직접 법을 설한 것으로 믿고 있다. 니까야에 쓰여 있으니까 진짜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글자 그대로 믿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과거칠불(過去七佛)설의 성립 배경, 마성스님, 2014-05-19)

 

 

중국의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는 이미 6세기에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을 천명했다. 일념삼천설이란 각각의 세계가 모두 다른 것을 포함하며 한 찰나의 생각에 삼천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일념삼천설은 십계호구(十界互具) · 십여시(十如是) · 삼종세간(三種世間)의 이론을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다. 열 가지 세계란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간 · 천상 · 성문 · 연각 · 보살 · 불의 세계를 말한다. 육도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 · 연각 · 보살 · 불을 추가한 것이다. 이러한 열 가지 세계가 열 가지 세계를 서로 갖추고 있으므로[十界互具] 일백 세계가 되고, 여기에 열 가지 그러함[十如是]를 곱하니 일천세계가 되고, 다시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을 곱하면 삼천세계가 된다.

 

이러한 삼천세계는 오직 인간의 한 순간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 씀씀이에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의 삼악도에서 천상까지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다. 지옥이 지구 땅 속에 있다거나 천상세계가 지구 밖의 우주에 있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각 스님이 달라이라마에게 불교의 세계관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달라이라마는 그러한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계(三界)가 초기경전에 언급되어 있으니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믿다가 [만일 그러한 세계가 지구밖에 존재한다면] 그런 곳에 태어나면 될 것이다. 만일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끊어 오른다면 그것이 곧바로 지옥임을 알아야 한다. 지옥이란 곳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닷컴》〈마성단상〉

 

 

마성스님 - 팔리문헌연구소장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 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결......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히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를 찾아 떠나는 먼 길 
여행의 길은 
그저 멀어서 먼 길이 아니다. 
길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아가서 길을 잃고, 
멀리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다. 그 길은 
절대의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동서남북이 없는 
눈부신 환한 빛 속에서 어둠을 
조적해서 쌓아가는 
제 속의 길이다.
- 유성용의《여행생활자》중에서 -
* 가장 멀고,
가장 빛나는 길은 
내가 나를 찾아 떠나는 길입니다. 
빛과 어둠은 여행의 길에도 있지만
내 마음 속에도 있습니다. 내 안의 빛이
어둠에 눌려 가려져 있다가 먼 길을 걷는 순간, 
그 어둠을 뚫고 올라와 가장 눈부신 빛으로 
나를 비춰줍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또다시 용기내어 떠납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  

숙명통 컴퓨터 / 대행 스님   (0) 2016.08.07
가난하다면 보시 하십시요 " / 정념스님(월정사 주지)  (0) 2016.07.30
물과 같은 삶/법륜스님  (0) 2016.07.23
불이법의 생활참선 / 법상스님  (0) 2016.07.16
분노에 대한 오해 / 마성스님  (0) 201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