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가받은 禪僧은 인증서 불태울 "智慧 증득해야"/ 현웅스님

2016. 9. 11. 16: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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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받은 禪僧은 인증서 불태울 "慧 증득해야"

- 육조사 현웅스님-琢磨마당(5)


근세 禪家의 인가는 그 맥이 끊어져 있다

아무도 경허에게 인증해 준 사람이 없다

경허는 끊어진 맥을 위해 그가 살고 있던 시기 보다 100년전에 돌아가신

知安禪師를 스스로 지목해서 혼자 맥을 잇고 나온다

 

法에 흔적을 지울 줄 아는 사람

불법에 인가 증을 들고 다니는 이들은 대개가 情識을 떨어내버리지 못한 데서

온 것들이 많다. 말은 옛 사람들처럼 오도송을 지어 내 놓지만 智慧가

옛 사람과 같지 못하다. 이런  禪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지 못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인가를 드러내는 것 대신에 그 흔적을 지워 버린다.

이런 법은 世尊이 드러내 보이는 법과 맥을 같이한다.





 


어느 날 임제가  황벽스님께 하직 인사를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황벽은 묻는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
“하남이 아니면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임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벽스님이 별안간 임제를 후려갈기려하자,


임제는 황벽스님의 몽둥이를 붙잡으며 손바닥으로 황벽의 뺨을 한 대 친다. 


 황벽스님은 큰 소리로 웃고는 시자를 부른다.


“백장 큰스님의 禪板을 가져오너라!”
선판을 받으라는 것에 임제는 말하고 있다.



 “시자야! 불을 가져 오너라”   - 임제 눈이 釋迦와 가섭에 닿아 있다. -


이에 황벽은 말한다.


“그렇긴 하나! 너는 그저 가져가도록 하여라.


뒷날 앉은 채로 천하 사람들의 혀끝을 끊을 것이다.”


 


임제 스님은 선판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흔적 없는 마음을 전하고 받는 것이다.


이렇게  형상이라고는 찾아 볼 수없는 세존이 쓰는 법을 임제는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도 임제! 임제 스님!  하고 우리는 그를 잊지 않고 있다.


 


金翅鳥를 무서워하는 龍  !


 


다음은 <벽암록>에 등장한 것을 옮긴 것이다.
석일에 어느 禪師께서 상당하여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문득 금시조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는고?” 하니, 鄧 隱峰 선사는


가사를 둘러쓰고 법상 밑으로 들어가 숨는 시늉을 보인다.



이런 禪師의 거량은 가까이만 있어도  등골이 시원하다.


이렇게 옛 당·송 시대 선어록 중에 金 翅鳥와 용에 대한 법 거량 이야기가 나온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禪 언어에 눈이 몹시 낯설다.


우선 우리는 언어에 어리둥절해 버리기 때문이다.
“벽암록에 금시조” 라는 말에 대한 출처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말들을 가져와 본다.


동물에는 상극이 있듯이 용은 금시조만 보면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런 비유에 섞여 나온 언어가 용과 금시조 이야기의 유래이다. 


 


용은 슬기로운 지혜, 곧 문수보살을 말한다. 문수는 모든 선지식들의 스승이며


지혜를 품고 있는 상징의 언어이다. 이런 문수도 금시조만 보면 두려워 움츠린다.


금시조는 법의 성품 자체의 뜻을 품고 있는 은유법에서 온 말이다.



금시조는 용만 보면 잡아먹는 다는 옛 설화에 나오는 상상의 큰 새 이름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수의 지혜를 요하는데


그 언어의 상징이 곧 용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금시조를 만나기만 하면 두려움을 느끼니


그래서 금시조로부터 숨거나 도망가야 한다.


 “금시조“ 는 법성을 대신하는 불성의 속뜻이다.


금시조는 지혜니 뭐니 일체 것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사람性品인 빈자리에는 부처까지도 서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법성은 문수를 만나면 문수도 삼켜버린다는 말로 바꿔 나올 수도 있다.
어록에 깊이 묻혀있는 이 말을 근세에  경남 월내 妙觀音寺에 계셨던


香谷스님과 진제스님 사이의 거량에도 보이고 있다.


 


향곡은 진제에게 묻기를 “용이 금시조를 만나면 어떤고?” 라고


똑같은 옛  어록에 있는 이야기를 옮겨 놓고 있다.


진제는 그 묻는 답에 무서워 움추린 자세를 취하고 뒷걸음질을 친다.


이게 진제가 보인 답이다.


 


그러자 향곡스님이 “옳다, 옳다” 한다.  
두려움을 표할 줄 아는 사람은 법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진제 스님은 뒷걸음쳐 보임으로써 그가 경험한 선의 이치를 드러낸다.


 


법상 밑으로 숨은 것이나 진제스님이 움칫 뒷걸음질 친 것은 둘 다 법에는


가까이 갈 수없는 법의 성질을 보여주는 行爲이다.


진제스님은 이 답으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禪을 하다가 조금만 이치에 눈이 열려 벽암록에 묻혀 살다 보면


등은봉 이야기를 보고  쉽게 저와 같은 답은 얻어 낼 수가 있다.
 
요즈음 선가엔 벽암록을 놔두고 온 선의 눈이 드물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이는 벽암록이 무슨 책인가도 모를 뿐더러 봐도 알지를 못한다.


듣는 사람은 그 역사를 모르고 저런 말이 귀에 처음 들어 올 때


말하는 사람의 것으로 곧장 믿어 버린다.


저 답이 지 말인가 옛 사람의 것인가 구별이 어렵다는 것이다.


半은 어록에서 얻고 半은 그들의 수행에서 온 것인가! 


말만 가지고는 모를 일이다. 다만 답하는 者가 옛 사람과 같은 八正道가


그의 行에 묻어 나오고 안 나오고 가 말해준다.


 


근세 禪家에 있는 인가 이야기


 


우리는 인가에 대하여 조금  알고 넘어갈 것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 근세에 인가는 그 맥이 끊어져 있다가 경허(1849~1912)이후로


온 것이다. 아무도 경허에게 인증해 준 사람 없었다.


경허는 스스로 100년 전 이미 가신 환성 지안 선사(1664~1729)를 지목해


그동안 끊어진 것을 혼자 잇고 나온다. 


 


이미 끊어진 것을 다시 이어 대를 맞추고 나온 것이 요즈음 인가이다.
그 뒤 경허의 제자인 만공과 같은 연배인 용성스님은 경허에게 잇지 않고


용성스님 또한  한참이나 먼 지안 선사에게 그도 역시 법을 잇고 나온다.


이런 것을 보면 세존 법을 스스로 혼자 지어서 인가를 잇고 있다.
 
이것이 요즈음 떠돌아 다니는 근세 인가에 대한 出處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덮어 두고 스스로 본인이 78대 손이다 또는


79대 손이다 하고 들고 다니며 인가를 자랑하고 다니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는 세존의 법이 약해져 감을 보이는 것이다. 바른 법을 갖추고 있는 이라면


인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自性에서 오는 지혜가 그 사람을 변화시켜


그 법이 행으로 묻어 나온다면 사람들은 저절로 그를 인정 할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는 성품은 불조에게 있는 성품과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성품을 봐 인가를 받고 나온 이라면 옛 사람과 같은 법력이 갖추어진


도덕이 나와져야 한다. 그러나 법력이 갖추어지지 못한 견성은


그 견성이 식정이 못 떨어진 것으로 참견성이 아니다.


 


이런 見性문화는 사람에게 있는 性을 한 번 더 가려버린다.


이 속에서 후학은 인가라는 말에 속아 인가를 얻고 못 얻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버린다. 그리고 내 자성을 믿는 마음만 멀어져 버린다.
 
情識으로 아는 견성은 智慧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衆生心을 모른다. 중생심을 바로 아는 者는 그 곳에 부처가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생심이 밝아져 나온다.


이 사람은 알고 모르고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智慧와 慈悲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존은 <열반경>에서 “ 나의 불법은, 아는 이들에게서 망한다,” 고


말씀을 남깁니다. 情識이 아직 걷히지 못한 見性은 아직 미성숙하다.


사실 아는 것으로 禪理를 찾는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수경 구절에도


선의 생명이 숨 쉬고 있다. 그 표현이 다르게 하고 나 올 뿐이다.


 


千 手 經 한 구절이다.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철刀山自催折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
내가 칼산을 향하면 칼산이 무너지고
내가 지옥에 가면 지옥이 고갈 되어 버린다.
                                       
일반인들은 禪 언어를 특별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믿음이 바르면 천수경에서도 禪의 智慧를 만난다.


禪문답이 요즈음처럼 언어의 유희에서 나오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


된다면 그런 禪은 사람하고 먼 것이 되고 만다.


후학은 떠도는 불완전 한 인가 이야기를 놔두고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성품으로 눈이 가야한다.
 
사람의 성품을 놔두고 어록에서 얻은 禪은 사람의 人性만 교활하게 만든다.


그것이 智慧가 없는 중생 속에 갇혀있는 禪이다.


그런 선은 말할 때는 선인 것 같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 이익을 주지 못한다. 어두운 情識을 지혜로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품에서 온 지혜는 마치 밝은 거울과 같다.


거울엔 옛 어록도 없고 특별한 情識으로 된 선의 理致도 없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비춰보는 바른 눈만 있다. 이런 눈은 즉석에서 사람을 살려 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놔두고 인가를 내세워 남의 믿음을 얻는 것은


법이 밝지 못한 한 人間에게 붙어 있는 열등감에서 온 결핍증이다.


이런 열등감은 불법을 만나기전에 세속에서 치를 것을 못 치르고 온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욕망이다.


그런 것들이 좋은 공부를 하고 난 뒤에도 붙어 댕긴 것이 중생이다.


 


우쭐하고 드러내 고 싶은 마음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런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 얻었다는 법을 놔 버리고 불조의 흔적을 더듬어


성품에 들켜보는  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거울이 사물을 비추듯 중생심을 비춰보는 智慧를 얻고 나와야한다. 


 


중생심을 알지 못하는 향상 일구는 구름 속에 혼자 아는 선이다.


책속에서 익힌 선이다.
그런 禪은 듣는 이가 식상하고 참선하면 거부감만 일게 한다.



看話禪 무용론을 들고 나온 뒤 남방으로 찾아 나선다.


그러나 간화선은 남방도 비어지게 하고 북방도 비어지게 하는 공부이다.


性品을 보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감춤이 없는 진실은 듣는 이가 우선 편안하다.


그리고 겸허한 마음을 찾아 들게 한다.
견성해서 인가받았다고 하는 이들은 공부를 다시 할 줄 알아야한다. 


세존은 <열반경>에서 “ 나의 불법은?아는 이들에게서 망한다” 고 말씀을 남긴다.
옛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돌아 봐 불법을 만나기전


몸에 밴 어둔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공부를 다시하고 나와야 한다.


 
옛 사람은 말한다. 깨닫고 난후 제자 百家를 손에 두고 다시 익어져야 한다고!
衆生心을 알고 나와야된다는 것이다. 중생심 있는 곳에  부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다.


복잡해져 가는 文明人들의 등불이 되어 나올 수 있다.


문명이 급변하고 있는 가운데 현대인들은 조바심만 늘고 있다.


급한 마음을 그치는 것은 사람사람이 지니고 있는 性品을 만나는 일이다.


다른 곳엔 마음 그치는 法이 없다.


성품을 만나야만 마음의 미친병은 곧 조용해진다.


 


옛 말인 “溫故而知新” 이 禪에서 다시 나와야 할 때이다.


문명인들에게 禪을 권하는 일은 주장자를 들어 보여 이것을 알겠는가? 하는


것 대신에 듣는 사람 속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먼저이다.


 


주장자를 드는 일은 나중 일이다. 사람 속에 있는 성품을 먼저 믿으라고


말 할 줄 아는 스승이 필요한 때이다.


인가 받았다는 禪僧들은 옛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알고 용감하게


인증서를 불태우고  다시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나와야한다.


 


그런 禪은 남의 믿음을 얻는다. 서로 사는 길이 갖추어져 있는 공부가 禪이다.


늦게라도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큰 大人의 마음이다


 

1

 

9월 /  목필균

                                

9월이 오면

앓는 계절병

혈압이 떨어지고

신열은 오르고

고단하지 않은 피로에

눈이 무겁고

미완성 된 너의 초상화에

덧칠되는 그리움

부화하지 못한

애벌레로 꿈틀대다가

환청으로 귀뚜리 소리 품고 있다

 

 

 

본래의 맑은 자리 / 우학스님     

 

수행은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수행은 중요한 행위이지만 

술을 마시지 않던 그 자리가

바로 본래의 자리이지요.


그러므로 수행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맑고 맑은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수행일 따름이니 말입니다. 

 


 

 


 

 

 

 

분별심에서 벗어나라/無一우학스님

 

 

우리가 자유를 잃게 된 것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라고
스스로 분별하고,
그 분별의식에 마치 감옥의 죄수처럼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따로 없습니다.
붙잡아 두려는 마음,
확고히 고정되어 조금도 움쩍달싹하지 않는 생각,
스스로 지은 이러한 내면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분별심만 내려 놓으면
괴로움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삶의 여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여움을(怒) 다 드러내어도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여움을(怒)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잠언)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집에 친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저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나누던 대화에 열중했습니다.

그때, 아내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더니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쏟아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수건으로 천천히 물을 닦아 내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이 한마디에 친구는 손뼉을 치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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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삶에는 늘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못 이겨 당장 상대에게 화를 낸다면
그 시작은 싸움이요, 그 끝은 상처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항상 참고 인내하면서 살 수는 없겠지만
때론 웃음으로 넘기는 지혜를 가져보면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