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관계를 맺는 법|마음공부 생활수행

2016. 10. 9. 17: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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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관계를 맺는 법



삶이란 관계다.
관계의 끊임없는 연장이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은 빛나고 또 이어져 간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참된 관계란 과연 얼마나 되는가.
과연 참된 삶을 살고 있기는 한 것인가.

이 세상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짐승이나 곤충이 되었든,
아니면 산과 들, 바다와 강이 되었든,
나무와 풀꽃이 되었든
과연 우리는 참된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한가.

참된 관계란 참된 인연이다.
어떻게 인연을 짓는 것이 참되게 인연을 짓는 것인가.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인연을 지어갈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참된 '관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된 '관계'란
'나'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며,
과거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생각이나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다.

인간 관계를 살펴보면 어떠한가.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가만히 또 깊이 살펴보라.
과연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가.

우리가 맺는 관계는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언제나 관계 속에는 '나'라는 이기가 내제되어 있다.
관계를 맺을 때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가'
를 먼저 따지게 되곤 한다.

아니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깊이 바라보지 않은 성급한 답변이다.

만약 '나'라는 상 없이 상대와 참된 관계를 맺게 된다면
우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 되었든
모든 사람을 만날 때
똑같은 비중을 두고 만나게 될 것이다.
평등한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좋은 사람, 미운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라거나,
인상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거나
하는 등의 그 어떤 분별도 없이
오직 동체대비의 평등한 관계만이 순수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나의 사랑이며,
나의 부처이고, 나아가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내가 사라졌을 때,
나라는 울타리가 걷어졌을 때
나와 상대라는 차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상대가 없을 때
더 이상 상대와 또 다른 상대의 차별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상대방과 관계를 맺을 때
온갖 분별을 가지며,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인가를 무의식 중에 따지게 된다.
아무런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만날 수 없다.

아마도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우리 안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온갖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잘 생겼느니, 마음에 안 든다느니, 밉상으로 생겼다느니 하면서.

그리고 또한 참되게 상대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완전히 과거를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개입시킨다는 것은
이미 상대에 대한 그 어떤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관념과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에게 다가선다는 의미이다.

과거에 나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진 사람을
지금에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 안에는 곧장 과거가 개입됨으로써
그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또 나에게 잘 해 준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느낌과 기억을 전제해 두고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근원적이지 못하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과거의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는 없다.
오직 지금은 전혀 새로운 ‘지금 이 순간의 그대’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의 잣대나 기억, 생각, 판단 등을 가지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라.
그것은 관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모습이다.
그것은 전혀 상대의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는 일이다.

지혜로운 자는
매 순간 전혀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상대를 만난다.
과거의 잣대는 이미 사라졌다.
그 사람 앞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은
아주 순수하고 신선하며 새로운 관계의 대상일 뿐이다.

참된 관계는 이처럼 과거가 개입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으로써 상대를 바라보았을 때
과거의 상대가 아닌
전혀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그 어떤 대상도
전혀 새로운 대상일 뿐이다.
시간이 변했고 공간이 변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온갖 세상이 변했다면
분명 그 사람도 과거의 사람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매 순간 순간 전혀 새로운 사람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전혀 새로운 대 자연이 우리 앞에 신선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게 과거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와 관계를 맺게 될 때,
또한 '나'라는 이기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와 인연을 맺게 될 때,
우린 상대에 대해 그 어떤 관념도 편견도 생각도
분별도 차별도 갖지 않게 될 수 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내가 충분히 수행자의 대열에 들어서려면,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과거’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상대는 그저 전혀 새로운 지금 이 순간의 상대일 뿐
좋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어떠 어떠한 사람이라거나,
나에게 도움이 된다거나 안 된다거나 하는 등의
그 어떤 분별도 없는
그저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어떤 시비 분별도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듯 참된 관계로써 상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관계 속에서의 관(觀)수행이다.

그랬을 때,
그렇게 차별이 없는 맑은 관계를 가졌을 때,
나와 상대는 둘로 나뉘지 않는다.
내 앞에 있는 그 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된다.

'나'라는 울타리가 걷어지고,
'과거'라는 얽매임의 틀에서 호젓하게 빠져나와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서 벗어난 채
나와 상대라는 분별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는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참된 관계라는 것은
'나'라는, 또 '과거'라는 것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관계다.
‘나’와 ‘과거’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시비나 분별, 생각이나 판단도 완전히 멈추고 만다.
완전한 내적인 침묵의 상태에서만이
완전히 홀로된 외로움의 상태에서만이
상대와의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홀로있음이란
아이러니 하게도 참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외롭고 고독한 내면,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내면,
그 내면의 홀로있음이
우리를 참된 관계로 가져가 준다.

참으로 홀로 있는 것이
바로 참으로 함께 있는 관계를 맺어준다.
홀로있음이 곧 전체와의 관계를 맺어주며,
참된 전체와의 관계가 바로 홀로있음, 하나됨의 깨우침을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곧 깨달음의 열쇠가 된다.
관계맺음이 바로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둘로 나뉘지 않는 큰 하나의 나툼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관계는 얼마만큼 깨어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삶이란 곧 관계다.
나의 삶은 곧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투영한다.
나의 삶이 얼마나 의미있었는지,
나의 삶이 얼마나 깨어있고 지혜로운지를 살펴보려면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얼마나 참된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라.

나는 과연 인간 관계를 맺을 때,
그 어떤 사람과 대면하고 교류할 때,
얼마만큼 순수하게 다가서고 있는가.
얼마만큼 ‘나’라는 이기와 아상을 버리고 다가서는가.
얼마만큼 ‘과거’의 잣대를 버린 채 ‘지금 이 순간’으로써 상대를 만나고 있는가.
얼마만큼 텅 빈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가.

관계 속에 참된 수행이 있다.
깨달음 또한 관계 속에서 온다.
제자에게 스승의 한 마디 일갈이 문득 깨달음을 가져다 주듯
고타마 싯다르타가 새벽별을 보는 순간 온 우주가 진동을 하듯
홀로 불현듯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대자연이 되었든,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깨달음은 있다.

내가 맺고 있는
수많은 인간관계, 대인관계를 살펴보라.
얼마만큼 진리에 합당했는가.
얼마만큼 내가 사라졌고, 과거가 사라졌는가.

물론 앞서 말했던 참된 관계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짐승, 곤충, 대자연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와의 관계 또한
이러한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참된 관계를 맺듯이
저 숲 속의 곤충이며 짐승들,
그리고 저 산 위의 나무 한 그루와,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며
서산으로 저무는 황홀한 석양과
참된 '관계'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참된 관계를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와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 모든 사람들과, 이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나와 나무 한 그루와의 관계가,
나와 뺨을 스치는 바람 한 줌과의 관계가,
나와 떠오르는 태양과의 관계가
맑고 향기로울 수 있다면
그 어떤 사람과도 맑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나'가 개입되지 않고,
'과거'가 개입되지 않으며,
그 어떤 생각이나 관념도 개입되지 않은 채
그저 '있는 그대로'
난생 처음 보는 것 처럼
전혀 새롭고 신선하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가.

저 숲 속의 야생화 한 그루를
참된 관계로써 만날 수 있겠는가.

혹 나는 사람이고
상대는 꽃 한 송이에 불과하다는 차별로써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저 산 위의 나무 한 그루를 만날 때
나에게 도움이 될 때만 이용가치에 의해 만나지 않았는가.

나무 한 그루와 참된 관계를 가져 보라.
아무런 분별이나 차별 없이,
나무가 나에게 그 어떤 이익이 될까를 따지지 말고
그저 나와 동등한 평등심으로 나무 한 그루와 관계를 맺어 보라.

보통 사람들은 일상적일 때 나무를 찾지 않는다.
평소에 나무는 사람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벌게 해 주지도 않고,
명예나 권력을 드높여 주지도 않는다.
내 일상에 직접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나무와 관계 맺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산다.

그나마 나무를 찾을 때는
무더운 여름날 쨍쨍 내려쬐는 폭염 속에서
햇살을 피하기 위해 나무를 찾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은 나무와의 순수한 대면이 아니다.
참된 나무와의 관계 맺음이 아니다.

그것은 '나'가 개입된 관계다.
내 이익을 위해, 이용가치를 위해 나무를 만나는 것일 뿐이다.
그랬을 때 나무는 내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나와 나무라는 상대는 완전히 분리된다.
분리 뿐 아니라 상하관계 혹은 주종관계
때때로 나를 위해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런 어리석은 관계가
지금의 환경문제, 오염문제, 도시문제, 인간소외문제,
도시화 기계화 과학화로 인한 모든
현대인들의 거대한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나는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단 한 대상에게 만이라도,
맑고 순수한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있기는 한가.

나무 한 그루와 참된 관계를 맺게 될 때
우리는 나아가 온 존재와 온 우주와
모든 사람들과 본질적인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와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사람과의 관계도, 대지와의 관계도, 우주와의 관계도
그 모든 관계의 사슬, 인연의 사슬은
꼬이고 꼬여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없이 헤매게 될 수 밖에 없다.

나무 한 그루와 참된 관계를 맺어 보라.
저 산의 바위와 야생화 한 송이와 떠오르는 태양과
단 한 순간 만이라도 참된 관계를, 참된 대면을, 참된 교류를 가져보라.

그냥 순수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아무런 관념이나 이기심, 아집이며 생각, 차별이나 분별 없이
그저 아무것도 나무와 나 사이게 끼어들지 못하게 하면 된다.

이건 너무 단순하고 기초적인 얘기다.
너무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 얘기다.
그냥 보는 것이 쉽지
따지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계산하면서 보는 것이 쉬운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동안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것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늘 생각하고 계산하고 따지고 분별하면서 보아왔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은 늘 그래왔다.
항상 직접적으로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와 대상을 나누어 놓고는,
그 사이에 온갖 생각과 분별, 과거와 아상들을 개입시켜 왔다.

그렇게만 살아왔다 보니
이제 와서 그렇게 어렵게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보라고 하니 갑자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이다.

다시한번 직접적으로 대상을 바라보자.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참된 관계를 맺어보자.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라.
그러나 나무를 보고 있는 ‘나’를 붙잡지 말라.
나를 쑥 빼 놓고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나무와 대면하면서
‘나’라는 아상과, ‘과거’로부터 온 모든 판단을 중지하라.

어떤 한 사람을 바라 볼 때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기억이나 선입견은 완전히 버려두고
전혀 새로운 한 사람으로 바라보라.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를 생각지 말고 그저 받아들이라.
나를 쑥 빼고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나와 대상이 관계를 맺을 때
우리 내면에 그 어떤 생각도, 분별도, 관념도 다 놓아버리라.
완전한 침묵으로써 바라보기만 하라.
‘나’라는, 또 ‘과거’라는 것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라.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앞의 대상과 참된 교류를 가질 수 있다.
비로소 그 어떤 대상과도 참된 관계, 맑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도리이다.
마음을 내고 세상을 살아가되
그 어디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는 도리이다.

사람들과 또 수많은 대자연의 생명들과
마음을 내어 관계를 맺고, 교류하며 살아가되
그 어디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는 도리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홀로 깊은 산 속에서 있어야만 수행이 잘 된다거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오직 홀로 살아가는 것만이
참된 수행자의 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관계 속에서,
군중 속에서 교류를 행하면서,
그 속에서 참된 내적인 침묵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
홀로되는 고독과 마땅히 벗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과
홀로 외로운 길을 걷는 일은
둘로 나뉘는 길이 아닌 까닭이다.

군중 속에서도 고독할 수 있어야 하고,
나홀로 외따로 떨어져 있더라도
대자연의 생명들과 마땅히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머물지 않는 관계,
집착되지 않은 관계,
‘나’라는 아집에도,
‘과거’라는 편견에도 집착되어 있지 않은 관계,
그러한 참된 관계로써 모든 대상과 대면하라.

참된 관계를 가지라.
나무 한 그루와,
숲 속의 야생화 한 송이와,
저 떠오르는 태양과 또 저녁하늘을 수놓는 석양과,
사랑하는 사람과 또 미워하는 사람과,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는 그 모든 대상들과
‘나’가 개입되지 않고,
‘과거’가 개입되지 않는
시공을 뛰어넘는 참된 관계를 가지라.

글쓴이 : 법상스님


 

 

 ♡ 삶의 과정이 행복인 것을!


산꼭대기에 오르면 행복할 거라 생각 하지만

정상에 오른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모든 사람이 행복 해지는 그런 곳은 없다

같은 곳에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같은 일을 해도 즐거운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같이 음식을 먹지만 기분이 좋은 사람과 기분 나쁜 사람이 있다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무엇이든 즐기는 사람에겐 행복이 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겐 불행이 된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

자신이 가진 것을 만족해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

갈 곳이 있는 사람 갖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다

 


 

탄생과 재생의 실상


만약 탄생이 정말로 있다면, 단 한번의 재생이 아닌

연속적인 재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왜, 어떻게 해서 이번에 탄생 하게 되었는가?

이번의 탄생과 같은 이유, 같은 방법으로

그대는 계속 탄생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이번에 탄생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대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그대의 모든 업을 태워버려

그대를 탄생에서벗어나게 할 것이다.


산더미 처럼 쌓인 화약도 성냥불 하나로 

순식간에 다 타버리듯이 무수한 생에 걸쳐 쌓아온

과거의 업도 아주 작은 깨달음의 불꽃에 의해 타버린다.


이 거대한 현상계에 관한 많은 학문적 지식은

거대한 현상계와 함께 모두 에고에 기인한다.

자아탐구로 에고가 사라 지면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진아만이 남게 된다.

 

- 마하라지의 명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