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의 무화(無化)|…… 강병균 교수

2016. 11. 27. 18: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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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의 무화(無化)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수행은 자유의지의 작동을 필요없게 만드는 일




성인(聖人)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아니다 없다’로 격하게 논쟁을 한다. 설사 자유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의 정도’이다. 만약 자유의지도(度)가 매우 낮다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나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사랑·미움·건강·질병·재산·지혜·우치)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돈(사랑·미움·건강·질병·재산·지혜·우치)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듯이, 자유의지도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있다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유의지가 얼마 없으면 늘이면 된다.

(특히 자동적으로 나쁜 짓만 일삼아 하며,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사람은 ‘나쁜 짓을 안 할 자유의지’를 강화해야 한다. 진실한 종교적 가르침은 그 방법을 일러준다. 복은 선행의 결과로 뭇 관계 속에서 안팎에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하나님이나 불보살 등의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하사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래봤자 쓸데없는 일’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 말처럼 ‘어차피(於此彼) 우리가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면’, 특히 결정론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게 미리 다 결정되어 있다면’, 자기들은 남들이 자유의지도(度)를 높이겠다고 용을 쓰건 말건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결정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유의지도를 높이겠다는 시도도 (우주의) 처음부터 미리 결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게 안 믿는 거보다 수학적으로 볼 때 더 이익’이라는 ‘파스칼의 도박(Pascal's Wager)’은 엉터리 논리이지만(신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있을 때 문제가 생긴다. 서로 적대시 하는 복수의 신들을 동시에 다 믿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데 거는 건’ 전혀 손해를 볼 게 없는 대단히 합리적인 베팅이다.

어떤 사람이 사과를 그리는 데 (예를 들어 이 세상 모든 게 다 빨간 색으로 보여) 항상 빨간 색만 쓴다면,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생물이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때 항상 특정한 하나만 택한다면, 그 생물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식물은 물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광합성을 한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리고 가지가 휘청거리지 않을 재주가 없고, 산불이 일어나도 도망갈 길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길은 한 가지뿐이다. 그래서 식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적어도 사람 눈에는 그럴 것이다. 설사 자유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집 메뉴가 짜장면 하나뿐이라면 손님들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다. 이 경우 자유의지는 무용지물이다. 반면에 메뉴가 많을수록 손님들의 자유의지 행사도 더 늘어난다.)

설사 여러 색깔을 쓰더라도, 색깔의 범위가 빨간 색에 가까울수록 자유의지가 더 없어 보일 것이고, 멀수록 자유의지가 더 있어 보일 것이다. 빨강·노랑·파랑 등 모든 색깔을 다 쓸 수 있다면 가장 큰 자유의지일 것이다.

많은, 넓은 선택권을 가지려면 지식이 많아야 한다. 산을 넘어갈 때 한 길만 아는 사람은 그 길만 선택할 것이지만, 그래서 자유의지가 없어 보이지만, 여러 길을 아는 사람은 여러 길 중에서 (상황에 따라)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 자유의지가 있어 보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에 있어서 각각의 일에 대해서 한 가지씩의 길밖에 모르는 사람은, A에서 B까지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그 사이 모든 일이 각각 한 가지씩으로 고정되므로, A에서 B까지의 길이 항상 외길로 결정되어서 자유의지가 없다. 즉 무인자동판매기처럼 행동한다. (최소한 밖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각각의 일마다 여러 가지 길을 아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여러 길을 택할 수 있어 자유의지를 가진 것으로 비친다. (최소한 그 사람의 밖에서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행동의 범위와 선택의 범위가 더 세분화되어 있을수록 그리고 더 넓을수록, 자유의지도도 더 커진다.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예를 들어 금융지식이 없어 창구직원이 권하는 상품만 사는 사람은, 금융지식이 풍부해 여러 상품을 비교해 구입을 결정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1. 은행에 간다. 2. 창구직원이 추천한다. 3. 그걸 산다.' 이 세 단계로 이루어진 자동기계로 보일 것이다. 물론 금융상품을 사러 은행에 가자고 결정한 것은 자유의지이나, 일단 은행에 가면 나머지는 다 자동이다. 반드시 은행직원 추천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얼마나 따르느냐'에 따라 자유의지 정도가 결정된다. 100에 99를 따르는 사람은 100에 1만 따르는 사람에 비해 자유의지가 무척 적은 것이다. 물론, 평생 한 은행과 거래한다면 은행선택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으나, 여러 은행과 거래한다면 은행선택의 자유의지가 있다.

역설적으로, 지식이 너무 많아서 즉 모든 일에 거의 완벽한 지식을 가지게 되어서 거의 완벽한 길만 택하면, 자유의지가 확 줄어들 것이다. 그가 선택하는 길은 미리 정해져 있다. ‘완벽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완벽한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완벽으로부터 먼 길일수록 길의 가짓수가 많고 가까운 길일수록 길의 가짓수가 적을 것이므로, 완벽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유의지가 적어진다.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인 군자(君子)도 ‘갈 길’이 미리 정해진 경우이다. 그래서 공자님은 ‘군자의 길은 예측이 가능해서 소인에게 늘 당한다’고 하셨다. 그에 비해 이상적인 인간의 정반대방향에 위치한 소인의 길은 천변만화한다.

무욕·지혜의 수행이 극에 달한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수행 중간단계에는 ‘최선이 아닌 길에 대한 유혹’을 자유의지로 극복하는 일이 있지만, 수행이 완성될수록 ‘탐욕이 유도하는 유혹’은 사라지고 ‘증강된 지혜가 제시하는 완벽에 가까운 길’을 따라가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은 번뇌이므로 이런 번뇌가 생기는 경우 ‘그 길로 갈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자유의지의 작동이 필요하나, 수행이 완성됨에 따라 번뇌가 적어지므로 지혜가 제시하는 최선의 길로 가게 된다.

도가 더 높은 수행자의 눈에는 ‘도가 높지만 자기보다는 낮은’ 사람이 갈 길이 빤히 보여 그에게 자유의지가 없어 보이지만, 무지한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갈 길이 보이지 않아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짧은 눈에는 그 사람이 택할 길이, 즉 최선의 길이, 보이지 않아 갈 수 있는 길이 많아 보여서 (그 사람 눈에는 비등(比等)한 가치를 지닌 길이 여럿 있어 보여서, 심지어 최선의 길도 다른 허접한 길들과 비슷한 길로 보여서, 즉 고만고만한 길만 여러 개 있는 것으로 보여서), (도가 높은 사람이) 그 중에 한 길을 택하는 것으로 보임으로 인하여 (도가 높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가 높아질수록 자유의지는 사라진다: 최소한, 도덕적인 선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갈등을 하다가, 자유의지를 작동시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게 아니다. 선을 택함은 자동이다: 오래 닦아 몸에 익어 자동화가 되었다(이것을 습(習) 또는 습관이라 한다): 우리 몸을 운영하는 자율신경처럼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도를 닦는 것은 선행의 자율화 과정, 즉 ‘탈(脫)자유의지’화 과정이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에 들어있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대각·해탈자(大覺·解脫者)는 탐진치(貪瞋痴)로부터 완벽하게 해방이 되어 항상 무욕과 자비와 지혜 속에 있으므로, 모든 행은 (의지의 개입에 의한 인위적인 결정이 없이) 스스로 최선의 길을 찾아간다. 만약 자비와 지혜를 발함에 있어서 스스로 자유의지를 발동시켜야 한다면, 아직 도가 낮은 것이다.

미움은 ‘미움의 대상에 (상주불변하는 실체적인) 주체가 있고, 대상에 대해 미움을 내는 (상주불변하는 실체적인) 주체가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하므로 ‘그런 (상주불변하는 실체적인) 주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깨달으면 사라진다. 그러면 자유의지도 사라진다. 주인이 사라지면 손님도 사라진다. 거울이 사라지면 거울에 비친 영상이 사라지고, 꼭두각시가 사라지면 꼭두각시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부제망상 불구진(不除妄想 不求眞)’의 무위진인(無爲眞人)에게는, 모든 게 자연의 흐름 즉 연기(緣起)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지, 자유의지가 없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아연기(無我緣起)론이다. 이것은 잡아함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 ‘업을 짓는 자는 없지만 업은 있다(有業報而無作者)’고 표현되어 있다.

35억 년 전, 지구 상 최초의 생명체인, 단세포 시절의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었다. 그냥 자동기계(automaton)였다. 이제 의식이 극도로 의식이 발달한 인간은, 자유의지 과잉 속에서 온갖 나쁜 짓을 하고 그 결과 의식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산다. 그러다 ‘절대 이리 살 순 없다’고 도를 닦고 그 결과 저절로 8정도(八正道)에 합치되는 삶을 살게 되면 자유의지가 사라진다. 자유의지는 무(無)에서 출발해, 유(有)를 거쳐,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하지만 처음의 무와 나중의 무는, 단어만 같을 뿐이지, 같은 무가 아니다. 처음의 무(無)는 무(無)의식의 무(無)요, 나중의 무(無)는 자비와 지혜로 충만한 가없는 '무아(無我)의식'의 무(無)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을 조롱하거나 막을 이유가 없다. 그런 일조차 (우주의) 처음부터 미리 정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나서서 조롱하거나 막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이렇게 말해주면 된다. “내가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자유의지가 있다면 자유의지를 발동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종교적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은, 개인의 행복과 인류의 행복과 모든 생명체들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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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가을의 선율 7080추억의 감성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