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不生不滅)

2016. 12. 4. 13: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인 양극단을 부정한 말입니다. 

일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

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因)와 나무(因)를 사람이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인간은 불이라는 결과(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나무를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하여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과보입니다


불이 생겨난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만도 아니며, 나무를 마찰해 주는 손 때문만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나무, 공기,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의 인연이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라는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 나무를 아무리 힘껏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다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존재들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했다가 인연소멸(消滅)

하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즉, 불이라는 존재가 본래부터 이미 있던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기했다가 소멸하듯이, 이 세상 모든 존재도 본래부터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生했다

가 그 인연이 다하면 滅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 생멸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불생불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因緣假合의 존재인 이 세상 모든 것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가장 먼저, 生과 滅(死)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 불생불멸, 불생불사 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불생불멸, 불생불사라는 말은 부정이 아니라 인간들의 착각인 生과 滅이 있다는 실체

적 고정관념을 타파해주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不’이란 부정의 

의미라기 보다는 ‘緣起’의 의미로 이해해서 因緣生 因緣滅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은 인연생기했다가 인연소멸하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

다[不]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이 세상 모든 존재들 本性(본바탕)의 永遠性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생겼났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은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계속 바

꾸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슬퍼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연가합(因緣假合)의 존재인 인간의 육체가 인연이 다해 쇠해졌기에 겉껍데기에 불과한 몸을 

갈아입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새롭고, 보다 젊고, 건강한 몸을 받기 위해 몸이라는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한 것이 죽음이라는 현상입니다. 죽기 전에 본인이 지은 생각, 말, 행동이라는 業에 따라 나름대

로의 業에 걸맞은 껍데기인 몸을 찾아가지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겉껍데인 몸은 이렇게 돌고도는 순환일 뿐이지 그들 本性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처음 금목걸이가 좋아 보여 10 돈이 되는 금목걸이를 샀지만, 이것을 1돈 짜리 금반지로 바꾸어 여럿이 

함께 나누어 가지려고 한다고 해 봅시다. 금목걸이는 필요성이 다했기에 없어졌지만, 새로운 필요성에 

의해 금반지 10 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10개의 금반지를 보고 금목걸이는 죽고, 금반지는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인연 따라 한개의 금목걸이에서 10개의 금반지로 겉모습만을 바뀐 것일 뿐입

니다. 


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몸은 60조개에서 100조개의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모두 잘 알 것입니다. 또한, 그 수많은 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반복하며, 노쇠한 세포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는 사실도 현대과학에서 모두 밝혀진 사실입니다. 


일본 동경대학 의학부에서 임상실험을 통해 말하기를, 인간의 몸은, 약 7년 사이에 몸의 전체 세포가 

바뀐다고 합니다. 바뀌는 그 부분이 살인지, 피인지, 뼈인지, 손톱인지 등 단단한 정도 등에 따라 세포가

새롭게 바뀌는 시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바뀌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육체와 7년이 지난 후의 육체는 완전하게 다른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의 똑같은 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그 동안 생과 사(

생과 멸)의 반복을 수도없이 거듭했지만, 우리는 다름 몸으로 생각하지 않고, 7년 전이나, 7년 후나 같은

‘나’의 몸이라고 착각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이 인식할 수 있을까 말까한 정도의 미세한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왜냐면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본래 생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의 本性은 不生不滅, 

즉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수없이 죽고 살

지만, 좀 더 크고 넓은 시야로 인간의 本性을 놓고 보니 생과 사가 원래 없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최소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소립자는 다시 수많은(300여개) 소립자들로 상호 연결되어서 형성되어 있기에 서로 

의존함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 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粒子

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라도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실체는 아무것에도 없으며 단지 수많은 因과 緣

들이 상호의존함으로써, 즉 因緣假合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 모든 것들의 生成과 消滅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연화합으로 인한 모습의 변화만 있을 뿐이지 본래의 자성(본성)에서는 생성과 소멸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사람이 죽는다고 했을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本性을 철견(哲見)해 보면, 살고 죽는

현상은 단지 인간들의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며, 다만 인연의 가합(假合), 즉 인연생기와 인연의 가멸(假滅)

,즉 인연소멸에 불과한 삶과 죽음일 뿐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모든 존재들를 관찰해 볼 때,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은 生과 死, 有와 無, 善과 惡, 美와 醜, 

너와 나, 행복 불행등의 상대적인 이분법적인 分別을 초월하여 다만 인연 따라 흐르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본성, 본바탕인 空性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입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들은 空性의 場에서 연기된 존재이기에 不生不滅이며, 그렇기에 텅~빈 空인 것들입니다. 

인간의 본성, 이 세상 모든 존재의 本性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常住不滅, 불생불멸, 영원한 생명(永生)인 것입니다. 


--법상 스님-  목탁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