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나를 떠나본적이 없다 / 현웅스님

2016. 12. 18. 22: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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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나를 떠나 본적이 없다
                       "바른 마음이 자리잡아야 내안의 부처를 만난다"



 

선지식에게 팔리고, 예수에게 팔리고, 부처에게 팔려 삽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공부는 끝도 갓도 없습니다. 무엇으로든지 이 삶을 놔두고 사람을

짓밟는 공부는 옳은 길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자기를 접근하려다

미끄러져 버리기가 십상입니다.

 

종교란 사람 홀리는 어리석은 집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종교가 성인들의 가르침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마음의 본성은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는데 생각이 일어나 다르게 됩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번뇌 망상과 마음이 구별되지 않아서입니다.

망상을 봐 버리면 공부 길에 들어갑니다.

 

한 번 알게 되면, 밖에서의 유혹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공부하면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것을

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공부 속에서 세상에 흔들림 없이 살게 됩니다.

 

참선하면 무슨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더 현실적이고 정확하고 생생해지는 것입니다.

 이상한 공부가 아니라, 환상을 벗겨 깨어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잘 살려고, 정상인이 되려고 공부하는 겁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 전도몽상입니다.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지 않고는  중생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한테 부처가 있으니, 바로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체험됩니다. 그것을 믿고

초보자는 번뇌 망상을 피하지 말고 같이 살면서 그 정체를 봐나가야 합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그 때문에 자기 마음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번뇌를 주시하여, 번뇌의 뿌리가 없음을 알면 그때 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연꽃은 시궁창에서 피는 것과 같이 불성은 번뇌와 같이 있습니다.

 

나를 세워 둘 만한 法도 없다

 

이 공부는 처음에 시작이 바로 되어야 바른 믿음이 자리 잡고

바른 믿음이 자리 잡아야 인연을 만나 경험이 옵니다.

 

길을 잘 못 들면 머리에선 잘 알아 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아무리 달아나도 깨고 나면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뜻을 얻지 못하면 말만 다르지 헛짓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밤잠 자다가 몸이 안 편한 사람처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거립니다.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용기! 그게 귀하고 헛수고를 더는 것입니다.

믿음만 바로 잡히면 그리 어려운 공부도 아닙니다.

이미 있는 걸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는 공부입니다. 하물며 머리 쓰는 일이겠습니까.

 

"벽암록"을 이리 꿰고 저리 꿰는 선문답을 백날 해보고, 답을 맞혀도 병만 커질 뿐!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만만 생깁니다.

 

그리고서 남을 점검하려합니다. 내가 변화 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올 때는 나를 세워 둘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날마다 새롭습니다. 그저 배울 뿐!

 

마음을 만나야 시작 되는 불교

 

대개 우리는 불교를 알아 들어갑니다. 여기에는 반듯이 생각이 동반 합니다.

하지만 생각 속에 있는 동안은 마음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지만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쉽지 않아서 불교가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쓰고 있는

마음을 만나면 마나자마자 불교는 쉬운 공부가 됩니다.

이해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이해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생각을 놓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는 믿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이 믿어지면 공부는 쉽습니다. 

 

아는 불교는 사람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들며 마음 한구석에 자신도 모르는

아만이 자리하게 됩니다. 남의 허물을 보는 버릇만 늘어납니다.

이런 이들은 정해진 법이 있기라도 하듯이 사념(私念)속에서 못 나옵니다.

 

법을 말하나 붙들린 데가 있어 사물로 부터 자유스럽지 못하고 제한된

견해 안에서 불법을 사량합니다.

이 사량은 옳고 그름을 나누고 옛 사람의 언구에 벗어나 있지를 못합니다.

 

말로는 불법을 말하나 마음을 만나지 못한 이들입니다.

마음을 만난 이는 기억되어진 어느 것도 가지고 댕기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생활에서 쓰고 있는 마음이 옛사람의 것에 계합됩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법을 봅니다. 이런 것들이 불불(佛佛)이 불상견(不相見) -

부처도 부처의 모습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의 모습입니다.

 

궁구(窮究)에 대한 思惟

 

이렇게 믿음 속에서 스스로에게 궁금한 것에 마음이 가는 것을 궁구(窮究)라고 합니다.

궁구도 ‘이 뭣고?’ 하면 안 됩니다. 만들어진 ‘이 뭣고?’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있는 것이기에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스스로 있는 것을 사람이 만들

수 있겠습니까.있기는 있되 나는 그것을 모릅니다. 저절로 궁금해집니다.

 

궁금해질 때 마음의 성품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홀연히 터질 날이 있습니다.

 

我相이 낮아지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하며 동물보다 자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동물보다 더 못한 행동을 해놓고는 후회 하거나 자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사람이 만든 상념이란 근거도 없는 것인데 스스로 만들어 놓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마음법의 전도 몽상입니다.
 
사람은 동물이면서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 또한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동물이면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이런 마음을 먹으면

훨씬 자신을 덜 자학하게 되고 자신을 너그러이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남의 잘못을 보고도 그 허물을 넉넉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형상만 다르지 업력의 차이는 서로 다른 고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는 동물의 습성이 순화 되어 버리면 자비심이 많은 수준 높은 인간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의 갈등은 이런 하찮은 생각들이 앞뒤가 바뀌어져 있을 때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장애를 만났을 때도 항상 자신을 이렇게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을 해보면 훨씬 자기 정돈이 잘 됩니다.

 

이 법은 석가불이 설해 놓은 금강경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붙들려 있는

사람에게 상을 덜어 내는 데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상 중에 아상이 강한 자는 강할수록 고통을 많이 받고 자신의 문제들은

더 헝클어진 상황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이런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 만약에 참선을

한다든가 어떤 명상을 한다든가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이루어지는 것은 적고

어려움을 만나 부딪치는 것은 많게 됩니다.

 낮은 데서 시작하는 것은 모든 인간 삶에 기본이 되는 것에는 틀림없습니다.

기획-간화선에 대한 이해

                              육조사 현웅스님-


思惟의 아침


믿음의 방향


 

불교의 가르침은 자기 믿는 법을 가르쳐야지 공부하는 법을 주입시키면 더 어려워져 버립니다.

예수를 믿든, 석가를 믿든 자기를 배제하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이든 안 깨달은 이든 자기를 믿는데서 시작합니다.

그 소중한 자기를 소홀히 하면 부처와 예수를 믿어도 그 힘이 부치고 어렵기만 만합니다.

 

좋으나 나쁘나 자기를 믿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자기를 믿기 위해서 선지식을 찾는 것입니다.

공부는 선지식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에게 다 있지만

혼자 자기를 믿으려 하면 길이 없어 난감합니다. 그러니 선지식을 찾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마땅히 자기 믿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자기를 안 믿으면 항상 남에게 팔려 삽니다.





돛단배-범선



이제는 닻을 내리자 



    

 

이제는 닻을 내려라    

저 멀리 은하에서부터 끌고 온 하얀 절망 

하얗게 씻어내고도 

출혈을 멈추지 못하면 바다는 오염되고

우리 모두 죽는다 


그동안 혈맥을 타고 흐르던

용 솟음치던 정의는 잠시 비워두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자  

    

비분할 동기가 어찌  

분석하고 가름하여 깨끗하여지는 것이랴  

세상은 너무 이미 오염되어  

보잘것없는 내 고통에도 절규한다   


버린 자의 영혼만 깊어지는 이 찰나에  

빈혈에 헐떡이는 지친 언어들이  

이 바다에 안식을 찾고 싶어 한다  


이제는 닻을 내리자.



2016년 12월9일 18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