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로 인해서 모두가 벌어지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 대행스님

2016. 12. 11. 18: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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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로 인해서 모두가 벌어지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 대행스님 

'관'한다 하는 것은
쉴 사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관하는 거지,
'관'하는 장소가 따로 있고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 질문

큰스님께서는 수 없는 세월을 통해서
저희 불자들을 이끌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차원의 신도들이 있기에
그들의 근기에 따른 수행의 방법도 또한 천차만별로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스님께서는
'관법'을 통해서 중생들을 제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관법인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 답변

예, 행주좌와 관법(行住坐臥觀法)으로... 
우리가 말입니다,
부처님 법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행주좌와 관법이냐 하면 자기의 관법이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상대가 있는 거고 세상이 벌어진 거지,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무효지.
안 그래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모두가 벌어지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하는데,
자기의 이 생산된 육체가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화두를 잡아서 해도 돌아갔지만,
그게 먹혀들어 갔지만,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왜냐?
겉돌아서요.
왜 겉도느냐?
세계를 안방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움죽거리는 모든 걸 안방에서 볼 수 있는 데다가
핑핑핑핑 돌아가는 그 머리 때문입니다. 

육체가 탄생한 것도 화두이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하는 것도 화두인데,
그 화두에다가 관법을 또 받아 가지고 하니까 겉돌 수밖에요.

행주좌와 관법은 시대가 요하는 겁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하고 그럴 때는
반드시 시대에 순응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뒤를 쫓아가라는 게 아닙니다, 앞장서란 거지.
불을 밝혀서 앞장서란 거지.
그렇기 때문에 행주좌와 관법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 쉬지 않고 지구가 돌아가는가 하면
우주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어요. 

그런 데다가 내 이 육체 속의 자생 중생들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 육체가 쉬면서 돌아갑니까? 
이거 보세요.
자는 것도 자는 게 아니고 눈을 뜬 것도 뜬 게 아니에요.
보는 거, 듣는 거, 먹는 거, 하는 거, 만나는 거,
가고 오는 것이 어느 하나도 고정된 게 없어요. 
그랬으니 공했지.
내가 한 게 따로 없으니 물 한 컵을 마셔도
더불어 같이 마신 거기 때문에 공식(共食)이에요. 

보세요.
?翩?共生), 공심(共心),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거 먹을 때,
어떤 거 할 때, 어떤 거 봤을 때,
어떤 거 움죽거렸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정한 겁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모두 같이 한마음으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여래지,
개별적인 하나가 깨달았다고 해서 여래가 아니에요. 
개별적인 하나가 깨달으면 전체가 다 들려야만이
그것이 깨달은 사람이 수만 명이다 할지라도
깨달은 그 한마음 처에 같이하기 때문에 여래인 겁니다.

여러분이 배울 때 잘 배워야지,
예를 들어 처음에 피아노 배울 때
처음 배우는 거라고 아무렇게나 생각해서, 
'삐뚤게 앉아서 해도 괜찮지.
요 다음에 배워서 잘하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앉음 앉음이 굳어져서요, 제대로 배울 수가 없죠.
그와 같이 인간도 마음의 오계(五戒)에,
오계향(五戒香)에 첫째, 내 마음으로부터 다져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우선이죠.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소가 언덕이 있어서 비비는 거지.
언덕이 없다면 비빌 수가 없고 소가 없다면 비벼지지도 않죠. 

그와 같이 인간도 내가 있어서 상대가 있기 때문에,
잘했든 못했든 내 탓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잘했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못했으면 '못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잘하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 하고 거기 놔라.
이러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생활에서 관한다 하는 것은
쉴 사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관하는 거지,
관하는 장소가 따로 있고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기도라는 말을 안 합니다.
'관'이라고 그러죠.
기도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기도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이 법당에 오더라도
부처님 앞에 삼배를 올리든 일배를 올리든,
내가 부처님 앞에 한마음으로 넣고 일배를 올려도 올리고,
일어날 때는 한마음으로 나와 같이하고서 일어나라 이겁니다.

그러면 이리로 가도 하나요 저리로 가도 하나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깨달을 수도 없거니와
이 진리를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버스 칸에 몽땅 타고 앉아서
버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천년 바위 - 박정식 (1994)

 

동녘 저편에 먼동이 트면 철새 처럼 떠나리라
세상 어딘가 마음 줄 곳을 집시 되어 찾으리라

서산 저넘어 해가 기울어 접으리라 날개를
내가 숨쉬고 내가 있는 곳 기쁨으로 밝히리라

생은 무엇인가요 삶은 무엇인가요
부질 없는 욕심으로 살아야 만 하나

이제는 아무것도 그리워 말자 생각을 하지 말자
세월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천년바위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