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4. 18:1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 / 성철스님
이제까지 계속적으로 우리가 하루 빨리 깨쳐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의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자성(自性)을 깨치라 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체 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寬)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시며 이르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菩提樹 下에 初成正寬하시고 歎曰
「奇哉奇哉라
一切衆生이 皆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妄想而 不能證得이로다.」
부처님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 같이 명백하게 인간이면 누구든지
절대적인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범아일여(凡我一如) 같은 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틀립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바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만 발휘하면 스스로가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인간 속에 무한한 근본 능력이 있음을 부처님이 처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깨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고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지 않는 것이니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일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보아도 헛일입니다.
광맥이 없는 곳을 파는 헛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는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 했으니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생명선인 것입니다
세계의 학자들도
부처님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인류 역사상 대발견이라고 인정하고 칭송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엉뚱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이상주의자였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걸어 다니지 말고 하늘로 훨훨 날아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사람이 죽는데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그마할 때부터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만 하고 사니
남이 볼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습게 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책 저런 책 여러 가지 철학책 등을 꽤나 광범위하게 보았지만
내가 볼 때는 영원하고 자유한 길을 제시한 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채근담강의」라는 책이 있어
그것을 펼쳐 보다가 한 군데 눈이 딱 멈추었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글자 한자는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니라.」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언어 문자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 안 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도 없는 이 경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이런 길을 많이 모색해 보았지만
다른 방법은 없고 참선을 좀 익혀 보았습니다.
그 뒤로 대광명을 비치는 문자 없는 경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좀 찾아본다고 중이 된지 벌써 삼십 년이 지녔습니다만
그래 세월만 허송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덕상을 가졌다」는 이 글자 없는 경(經),
말하자면 자아경(自我經),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을 분명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언어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장자(莊子)에 있는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궁에 가서 일을 하는데
임금이 늘 책을 보고 있어서 그 사람이 임금에게 물었습니다.
「임금이시여, 무슨 책을 보십니까?」
「옛날 현인들이 말씀한 좋은 책이니라」
「그럼 지금 현인과 철인들이 살아 있?윱歐?」
「아니 죽고 없느니라」
「죽고 없으면 그 책은 무엇 하는 것입니까?」
「그 현인들이 말해놓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라」
「그럼 그 책이 말 그대로는 아니겠지요?」
「그야 기록만 한 것이지」
「임금이시여,
사람이 술을 마시려면 술을 먹어야지 술 찌꺼기는 소용없습니다.
현인은 죽고 없는데 기록해 둔 말은 술 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마음을 돌려
문자라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이지
진리의 묘를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우화입니다.
보통 기술도 그렇습니다.
장자에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고 글이 좋다고 하여도
목수의 기술, 용접의 기술,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 등
그 모든 기술의 묘리(妙理)는 절대로 말이나 글로써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오래오래 하여 마음으로 터득해야지
말로서나 문자로서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만 문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다 언어 문자의 피해를 생각해서 경책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어지느니라」
「廣字多智하면 神識이 轉暗이니라.」
달마스님의 말씀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느니라.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니
무위로써 못 할 것이 없느니라 」
「爲道日損이요
爲學日益이라.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니
無爲而無不爲니라.」
이것은 노자(老子)의 말씀인데
실지로 도에 깊이 들어온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쉬는 것이 더는 것이니
도를 이룰려면 분별망상을 쉬어 버려야 하고
학문을 배우려면 문자를 하나라도 기억하여 더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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