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달 머물 때입니다.
처음 가서 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시주 윤○○」라고 굉장히 크게 씌여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 사는 사람인데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오느냐?'고 물으니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올 겁니다.'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과연 그 분이 인사하러 왔다하여 '소문을 들으니 당신이 퍽 신심이 깊다고 모두 다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 표시가 읹혀 있어서 당신이 신심 있는 것이 증명되었지' 하고 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칭찬을 많이 하니 퍽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 된 것 같아, 간판이란 남들이 많이 보기 위한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 두면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 광장에 갖다 세우자,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 보자.' 하니
'아이구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어? 당신이 참으로 신심내어 돈을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고 돈 낸 것인가?'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이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러면 이와 잘못된 것을 어찌하려는가?'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서 탕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은 성철스님의 법어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작은 일상 이야기에서 이토록 큰 가르침을 담아 낼 수 있다는 것이 감격적이기 까지 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해 온 베품의 행위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작은 베품에서도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我相)을 하늘만치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래 그 어떤 것들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건만 우린 너무 '상(相)'을 내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무언가를 베풀고서 '내가 했다'고 상을 내는 순간 우리가 한 베품의 공덕은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를 할 때는 값을 수 없는 이에게 하는 것이 최고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바라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바라는 마음은 이미 보시가 아닙니다. 거래이며, 장사지요.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너무도 큰 차이를 가집니다. 보시는 남에게 그저 베푸는 행위이지만 보시바라밀은 본래 내 것이 따로 없다는 무분별의 깨침에서 오는 바라는 바 없는 보시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성철스님의 말씀대로 모르고 한 일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맑고 청정한 한마음으로 보시바라밀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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