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9. 17:1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제1. 백봉김기추의 금강경 강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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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三界는 무엇으로 인하여 허공에 떠돌면서 온갖 법풍을 이루고 있으며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고뇌를 헤치면서 줄곧 생사를 엮으며 달리는가 (9)
죽으려면 왜 낳았으며 낳았으면 왜 길이길이 삼계의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느냐는 말이다. 이렇다. 顯滅은 가짜요 不動은 진짜다. 진짜인 法身이 없으면 가짜인 色身은 나툼이 안되고 가짜인 色身을 나투지 않으면 진짜인 법신은 씀이를 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곡절을 알면 진짜와 가짜는 둘이 아니므로 하여서 법신과 색신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곧 죽음이 아니요 낳음도 곧 낳음이 아니라, 죽음과 낳음은 한결같다고 이르는 것이니 어찌 삼계의 주인공인 인생에게 죽음이란 말귀인들 붙이겠는가 높은 고개로다! (9)
나날이 뚜렷함이여! 안 꺼지는 나날의 등불이로다. 그 性體는 휘영청이 밝아서 十方에 펴였고, 그 理量은 영특스리 밝아서 一切에 잠겼으니, 이 迷함이냐, 이 깨침이냐! 泰山이 눈을 부릅떠서 오니 綠水는 귀를 가리고 가는 證處인지라 실로 너의 알뜰한 터전인 줄로 알라. (10)
싱그럽고 까마득한 본래의 슬기인 반야여! 앎이 아니면서 알지 아니함이 없고, 있음이 아니면서 있음 아님이 없고, 머뭄이 아니면서 머뭄 아님이 없으므로.. (11)
'이러히 내 들었노라'심은 世尊의 말씀대로 아난존자가 경을 결집하실 때의 머리말씀이시다. 존자의 그 말씀은 세존을 대로하시는 말씀으로서 절대로 不動的이요 불변적인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法界의 참소식이니 일로 쫓아서 세존의 그 말씀은 西天에 차고 東方에 넘친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無邊虛空一句來하니 龜毛兎角滿乾坤이로다 번역하여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 오니 거북털과 토끼뿔이 하늘과 땅에 가득함이로다」. 太初의 一句라 하여 두자. (28)
山은 山 水는 水 山水가 却來요
修道人의 分으로는 無常한 幻想의 出沒을 바탕으로 하는 時空間의 분별이란 禁物이라겠다. (31)
상대性인 世間事는 절대性인 出世間事 위에서 이루어지는 幻像界련마는 이 의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깜양대로 幻身을 지어놓고 그 神에게 되돌아 의존하는 행위가 인간의 情念에서 우러나오는 宗敎觀인 것이다. (32)
실로 自力으로 굴리고 他力으로 굴리움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며 自力으로 살고 他力으로 살리임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언만은 이 확연한 이치를 사람 중에서도 知識人들이 더욱 모르고 지식인중에서도 宗敎人들이 더욱 모르니 상대的인 세간의 지식만으로는 절대性인 누리의 眞理를 밝혀내지 못한다고 斷言을 하여도 異論이 없을 것이다. (33)
한 생각을 크게 돌이켜서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마음을 걷어잡음으로 하여금 自力으로 三世間을 꿰뚫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쩐 연고이냐. 애오라지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남이 있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보살이 계시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三界가 벌어지면서 천당과 지옥도 나뉘는 만큼 나의 영원한 安住處도 또한 올바른 나의 行에 있기 때문이다.
이 行은 고집에 있음이 아니고 슬기에 있으며, 슬기는 얻음에 있음이 아니고 놓음에 있으며, 놓음은 하염있는 법에 있음이 아니고 하염없는 법에 있으면서 비추되 항상 적적하고 적적하되 항상 비춤으로 하여금 나의 성품 가운데 홀로 우뚝하고 의젓할 따름이니 남의 물건이 아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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