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믿자마자 나는 변한다 /현웅스님

2017. 4. 22. 18: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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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믿자마자 나는 변한다”


▦ 서울 육조사 현웅스님-나는 고정된 바가 없다.


본정의 마음은 생각이 일어나 달라진다
수행자가 선을 경험하면 알음 알이가
일어나 여기에 집착해  아만이 생긴다
혼자 공부하는 사람은 이 병에 걸리기 쉽다
작은 경험을 큰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참선공부 하려면 스스로 뜻이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주어진 삶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잘 돌아 보면

지극히 불완전하고 또한 변해가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삶에는 영원한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바로 안다면 그 누가 참선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겠는가!


돌아본즉 하루하루가 똑같은 생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삶의 눈을 날마다 계속되고 있는 지루한 곳에 나를 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행한 것은 우리에게는 영원에 이르는 길이 나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해도 있는 나가 있습니다.


고정된 관념만 바뀌면 내게 이미 있는 나로부터 지혜의 눈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나에 의해서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나를 놔두면 나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변화를 가져 보기 위해서는 공부 안 해도 있는 근본인 나를 믿어야합니다.



부처님은 그 믿는 법을 곳곳에 말해 두고 있습니다. 믿으면 믿자마자 나는 변합니다.

이제 나는 부처와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순간순간을 부처와 같이 있습니다.
나를 가린 것만 알고 놔두면 됩니다.


사람이 부처입니다. 다만 나는 가려져 있고 부처는 가린 것이 없는 분입니다.

미혹 속에 묻힌 종교는 어둡다.

 

우리는 종교라는 틀을 벗어나 성인의 말을 바로 알아 들어야합니다.
모든 성인의 말은 사람을 떠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알고 보면 나에게 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나 안에 紳이 있고 부처가 있다고 보는 분들이 그분들입니다.

곧 그래서 사람! 곧 우리들은 다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을 줄 알아야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되면 모든 성인이 나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 종교는 밝습니다.


부처는 그의 눈이 열리고 난후 모든 중생 속에 부처의 씨앗이 있는

것을 보고 사람사람이 다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 또한 신은 너 안에 있다. 라고 누가 복음에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엉뚱한 것을 만들어 신과 부처를 멀리 두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者가 남기고간 冥想

 

어느 날 禪院의 전기 일을 봐주시던 분에게 휴대폰을 걸었습니다.
안내에서는 이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나옵니다.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그 분은 전화번호가 바뀌었으면 공지를 할 사람입니다.
평상시 그분은 행동과 말이 일치한 분이었습니다. 사무실로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그 곳 전기회사 사장님이 전화를 받습니다.


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김선생을 찾았습니다.
사장님이 말합니다.


“그 분…돌아 가셨습니다. “….” 서로 말이 끊겼습니다.
“…언제요?” “6월에요” 그리고 통화는 끝났습니다. 돌아 가셨습니다.
그는 다시, 온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올 때 그 몸을 가지고 임시로 오신 것입니다.
이 몸이라는 것이 내 것 같지만 내가 쓰고 있을 때나 내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놓고 갑니다.


오고 가는 곳이 없는 곳으로 갑니다.
그 곳은 부처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예수도 있고, 공자도 있는 곳…
우리들이 모두 만나는 곳입니다.


그곳을 영원한 곳이라고들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 곳에 있지만 몸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은 이곳이

그곳인 줄 모릅니다.
깨어나야 알게 됩니다. 님은 가셨습니다. 아니 여기 계십니다.


그러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은 전화 받을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적멸…모든 것이 쉬고 있는 곳입니다.

열반! 이 몸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 일고 꺼지는 물거품 같은 것.


우리가 아옹다옹하고 사는 가운데 이러한 줄이나 알고 살아 봅시다.
살아있는 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입술을 움직이고 뜻을 전하며,

기왕이면 형상을 내려놓고 이 마음을 떠나지 맙시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꽃으로 보고 이야기 하다 갑시다.

 

門을 열고 보는 世上

 

하나, 무아(無我)란? 나를 세우자마자 무너지는 것이 무아다.
그 자리는 나를 세워 들 곳이 없다.


둘, 난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道는 모른다.
그러나 道를 깨달은 이가 말하는 道는 그냥 알아본다.
셋, 마음의 눈’에 꼭 이름을 붙이자면 지혜라 할 수 있다.

지혜는 생각이나 아는 것과는 다르다.


넷, 본성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모두가 같은데, 생각이 일어나 다르게 나타난다.


다섯, 수행자가 禪을 경험하면 아는 생각이 먼저 일어나는 수가 있다.
여기에 붙들리면 아만이 생긴다. 스승 밑에서 공부 안하는 공부인은

대개가 이 병에 걸리기 쉽다. 작은 경험을 큰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만

지키다가 삶을 보내 버리는 수가 있다.


여섯, 참선을 하는 사람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번뇌 망상과 마음이

구별되지 않아서이다. 망상만 바로 봐버리면 그 망상은 그냥 숨이 죽는다.

그리고는 망상에 맘을 두지 않는다.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것만 드러난다. 이제는 세상살이 흔들림에 놀아나지 않는다.


일곱, 불교 공부를 믿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생활이 새로워지고 미리알고

찾아 들어가는 사람은 그 아는 대로만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만난다.
그런 사람은 불교 공부도 안 되고 세상일도 안 된다. 마음만 서둘고 시끄럽다.


여덟, 믿음 속에서 법문 듣는 게 중요하다. 듣다가 순간적으로 자기와 계합될 수 있다.
그때 자각이 온다. 불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다.


아홉,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부처의 씨앗이 있다. 곧 불성이 그것이다.
젊은이는 뛰쳐나가기를 좋아하고 늙은이는 주저앉기를 좋아 하지만

그 가운데 부처는 안 떠나고 있다.


이것을 믿어 들면 젊은이는 그 혈기가 조용해지고 지혜를 만난다.
그리고 늙은이는 지혜와 자비가 넉넉해져 혼자 있어도 삶이 풍요롭다.


열, 화두 참선법은 불교의 핵이다.
붓다가 경험한 것을 나도 경험하는 공부이다.
그러나 초보자가 단박에 이 뭣고 무 화두를 잡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화두는 나에게 불성이 있다고 믿어지는 자에게 가능한 공부이다.

처음에 초보자는 이 불성에 대한 믿음을 스승아래서 배워야한다.


그리고 불교 언어에서 ‘없다’는 것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있되 있는

것에 주하지 않고 사물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주는 불성을 무(無)라고 말한다. 불성은 나에게 있지만 형상이 없다.

 그런데 여기 지금 이 순간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 있다. 

 불성은 형상을 통하여 보여 주지만 그 형상에 안 머물고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으니, 무? 혹은 이 뭣고? 하는 것이다.


열하나, 우리는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가 둘을 생기게 하는 하나이다. 이제 둘은 셋을 만든다. 

 그리고 만물을 만든다.


그러나 이 하나가 없는 줄 알면 둘은 조용해진다. 이 때 하나는

하나 대로 둘은 둘 대로 살아난다.
그러나 내가 이 하나에 붙들리면 복잡한 것 속에 들어간다.

그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벗어나고 싶어 하면 할수록 삶이 복잡해진다.


벗어나고 싶은 것이 번뇌인 줄 알아야한다. 이 번뇌를 없애려고 하지

말아야한다. 그 대신에 번뇌와 같이 살아 버려야한다.

그러면 번뇌는 스스로 수그러들고 자취를 감춘다.


번뇌와 같이 살 줄 알면 참선은 저절로 시작된다. 하나와 다투지 않는다.

다투지 않으므로 둘이 생기지 않는다. 이제 둘은 나의 생활이다. 그리고 풍요로움이다.


열둘, 자기 마음의 말을 듣게 되면, 세상의 상식이나 도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열셋, 선문답이나 게송은 알고 있으면 자기와 남을 속이는 일이 되기 쉽다.
일체 아는 것을 놔두어야한다. 작은 언덕 아래서 풀잎이 싹 트는 것을 본다.


열넷, 성품은 스스로 비추는 성질이 있다. 내 손을 가져다 대면 손을 비추어

주고 얼굴을 가져다 대면 얼굴을 비추어준다, 그러나 얼굴과 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비추어 주지만 비추어진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열다섯, 미운 사람이 옆에 있을 때는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미운 사람이 옆에 없는데도 미운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그것은
미운 생각이 망상으로 남아있어 그렇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이 된다.


열여섯, 공부인은 먼저 망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있지도 않은데 혼자 만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 망상이다. 알면 망상은 없는 것이다.


열일곱, 걱정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에 걱정도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걱정도 없다.
이렇게 삶을 인정하면 저절로 여유가 생긴다. 기운이 내려가고 차분해진다.


열여덟, 사람의 마음을 밝음 쪽으로 바꿔주는 것 이상의 보시가 없다.


열아홉, 자성의 성질을 설명한 것이 불경이다.
원래 불성(佛性)이란 말을 육조가 자성(自性)으로 바꿨다.
참선으로 자성을 체득하고 불경을 보면 모두 다 ‘내 소리구나’ 하게 된다.


스물, 번뇌 망상에 손대지 마라. 원래 뿌리가 없어서 그냥 두면 사라진다.
만지면 덧난다.


스물 하나, 네 안에 부처를 만나려거든 네가 알고 있는 부처를 버려야한다.


 

 

 

아름다운 추억의 노래 

 

 01. 유심초 - 우리는 타인
02. 김미성 - 아쉬움
03. 이승연 - 잊으리
04. 방주연 - 기다리게 해놓고

 

 05. 김정호 - 푸른 하늘 아래로
06. 어니언스 - 사랑의 진실
07. 이세진 - 슬퍼마오
08. 은희 - 사랑해

 

 09. 이태원 - 고니
10. 산이슬 - 이사 가던날

11. 윤수일 - 유랑자
12. 권태수 - 눈으로 말해요

 

 13. 김세환 - 길가에 앉아서
14. 김추자 - 나뭇잎이 떨어져서
15. 장계현 - 나의 20년
16. 이수미 - 그렇게는 안될거야

  

 17. 이용복 - 어린시절
18. 바니걸스 - 사랑아 다시한번
19. 송창식 - 고래사냥
20. 이재성 - 촛불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