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2. 16:0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몽지 심성일님의 저서 <깨달음 12번째 돼지 찾기> 중에서
05. 절망
내가 한참 공부에 몰두할 2001년 무렵, 나의 아내는 「제비연못」이란 단편소설로 고향인 제주도의 한 지방지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되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1998년 결혼한 우리 부부는 1999년 첫 딸을 낳았다. 그 당시 불교에 미쳐 있던 나로 인해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이 절, 저 절로 돌아다녔다. 나야 좋아서 돌아다닌 것이지만 아내와 갓난아이는 그저 남편 따라, 아빠 따라 고생을 한 것이다.
언젠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동안 이상한 꿈을 계속 꾸었던 적이 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를 타고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드디어 버스가 멈추어 서고 나만 버스에 내려 앞을 보면 아득한 안개 사이로 거대한 일주문이 서 있는 꿈이었다.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선가 나는 여느 때처럼 “여보, 아무래도 나 출가해야 할 것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아마 그 전부터 그런 말을 자주 했으리라.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전혀 주위 사람의 심정이나 그런 것들을 헤아리지 못한 채 내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젓가락을 집어 던지며 눈물 섞인 목소리로 “그래, 가라, 가! 가 버리라구!”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얼마 지난 뒤에서야 이제 막 첫 아이가 생긴 가장으로서 참 무책임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출가는 포기했지만 답답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 어디 수행하는 단체가 있다더라 하면 주말을 이용해 찾아다니고, 휴가 때면 사찰 수련회나 선방에 들어갔다. 그러던 내가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자 아내도 그 변화를 눈치 챈 모양이다. 그 때가 아마 2002년 말이나 2003년 초일 것이다.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당신 요즘 무슨 공부하러 다녀?”
“응, 불교 공부.”
“그게 무슨 공부인데?”
나는 불교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는 아내에게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어서 책꽂이에 있던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을 꺼내 주며 말했다.
“이 책 한번 읽어 봐.”
며칠 뒤 책을 다 읽은 아내가 내게 말했다.
“이런 공부라면 나도 하고 싶다.”
그 당시 내 생각에 선생님의 설법은 불교나 선에 대한 상식이 없는 이에게는 어렵겠다 싶어 대구 ○○○ 선생님이 한 달에 한 번 부산에서 갖는 도덕경 모임을 추천해 주었다.
몇 번 도덕경 모임에 나갔던 아내가 선원을 다니게 된 것은 2003년 3월쯤으로 기억된다. 아내는 꾸준히 선원에 나가 법문을 듣고 시간 날 때마다 녹음테이프를 이어폰으로 들었다.
5월쯤인가 잠자리에서도 이어폰을 빼지 않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어어, 여보, 여보…….”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보려는데 자기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 잠시 후 아내가 어떤 체험을 했다고 말하는데 내가 했던 체험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체험이었다. 나는 선생님을 만나면 여쭤 보라고 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아내가 제대로 체험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아내 역시 뭔가 달라져 있었다. 선원 다닌 지 서너 달이나 지났을까? 그러나 아내의 체험과 변화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나의 심정이었다.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기보다 내면 깊은 곳에서의 솔직한 심정은 너무나 화가 나고 질투가 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왜 내가 아니고 아내란 말인가? 그동안 책을 읽었어도 몇 십 배, 몇 백 배를 더 읽었고, 수행을 해도 더 했고, 선생님의 법문을 들은 것만 해도 1년 반이 넘게 들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좌절감이 찾아왔다.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이런 저열한 감정을 행여나 들킬까 봐 드러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그날 이후로 나는 아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퇴근 하면 곧장 내가 평소 책을 읽거나 좌선하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울었다. 너무 기가 차고 억울하고 분하니까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어째서 나는 안 된단 말인가? 내가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나중에 그 시절 이야기를 하니까 아내는 나의 그런 심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천길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때 나의 심정은 정말 나락 끝까지 떨어진 듯한 기분, 완전한 절망이었다. 자포자기랄까,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구나, 하는 심정. 평소와 같이 아침엔 출근했다가, 저녁이나 토요일엔 선원에 갔다가, 일요일이면 거사님 법문을 들으러 갔지만, 나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이나 허수아비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어떤 의지나 생각을 일으킬 여력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서너 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06. 시계 소리
그 날도 별다를 것 없는 거사님의 법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1년도 넘게 들은 법문은 그 법문이 그 법문이어서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었고, 나는 예전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법문이 시작되고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거사님이 죽비를 들어, 책을 받쳐 둔 놋쇠로 된 상 언저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졸음에서 깨어났다.
탕! 탕! 탕!
“이렇게 두드려야만 소리가 납니다. 작용을 해야 이런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러시더니 죽비를 방바닥에 놓고 손을 뒤로 감추시고 말씀하셨다.
“자, 이래도 소리가 납니까? 지금도 소리가 나고 있어요. 어디서 두드리고 있습니까?”
아직 졸음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평소와 달리 거사님은 나에게 다잡아 물으시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시계가 똑딱똑딱합니다.”
놋쇠 상 위에는 법문 시간을 맞추기 위한 탁상시계가 째깍째깍 가고 있었다. 대답은 그렇게 하였으나 그 시계 소리를 생각하여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
“분명합니까? 이제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몰랐다.
“언제부터 이것을 알기 시작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이걸 놓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하세요.”
법회는 그것으로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고, 거사님은 물론 주위의 노 제자 분들도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만은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법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산책 삼아 걷던 산길로 접어들었다. ‘도대체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한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마치 블랙홀 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간다고 할까, 영화 속에서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있는데 주인공이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스윽 들어가듯이 어떤 상태가 찾아 왔다.
눈앞의 세계가 그대로 있으면서 사라졌다고 할까? 눈앞의 세계가 그대로 있으면서 말과 개념만 싹 사라졌다고 할까? 하수구 구멍으로 온갖 오수가 쑤욱 빠져 나가고 말끔한 바탕만 남았다고 할까? 어디라고 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개념들이 쑥 하고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온 세상이 온통 한 덩어리로 경험되었다. 눈앞이 또렷했다. 모든 것들이 다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이것들이 그저 온통 하나라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것이구나! 이것이었구나!’ 하는 환희가 솟아오르면서 천근만근 되는 짐을 부려 놓은 듯 몸과 마음이 너무나 가볍고 시원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잖아! 그동안 어떻게 이것을 몰랐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너무나 친숙하고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구나, 이것이 마음이구나!’ 그동안 듣고 보고 읽었던 모든 내용들이 이 하나로 모두 귀결되면서 해소되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을!’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든 선원 가까이로 오고 싶어 석 달 전에 이사한 집으로 1시간 정도 걸어서 도착했다. 평소와 같이 맞이하던 아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여보, 모두 당신 덕분이야.”
아내는 뜬금없는 나의 행동에 크게 뜬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그때가 2003년 10월 중순이었다.
07. 체험 이후
거사님의 법회에서의 체험 이후 첫 선원 법회에 참석했을 때다. 아마 수요일 저녁 법회였던 것 같은데, 법문 시간 내내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렇게 쉬운 말씀을 그동안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맨 앞에 앉아 있었는데, 정말 다른 사람들은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 무언지 모른단 말인가, 자꾸 뒤돌아보며 확인하고 싶었다. 알지 못하는 것보다 모를 수 있다는 있다는 그 사실이 더 신기했다. 나 또한 불과 며칠 전까지는 넋 나간 허수아비처럼 그러했으면서 말이다.
체험 이후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다. 일단 법문이나 어록의 말씀들과 공안들이 대부분 이해되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 보니 너무나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다. 라즈니쉬는 약간 분명하지 못할 뿐더러 엉뚱한 소리가 너무 많고, 차라리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이 좀 더 여법했다. 특이한 경계도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우연히 『성서』를 읽다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와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온몸을 황홀한 기운이 휩쓸고 지나는 듯한 느낌이 자주 나타났다. 선생님이 법문 중에 탁자를 톡톡 두드린다든지 눈앞의 진리를 직접 가리키는 대목에서 그런 반응이 왔다.
호흡이 깊어지고 길어져서 어느 때는 들이쉬는 숨이 끝없이 들어와 아랫배가 농구공처럼 팽창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길을 걷는데, 나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오기도 했다. 각성이 강렬하고 또렷해서 마치 눈앞에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일 신기했던 것은 마치 변신로봇이 합체하는 것처럼,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익혔던 알음알이가 질서정연한 큐브 조각들처럼 자동으로 끼워 맞춰져서 모르는 게 없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간혹 선생님의 법문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텐데 하는 아만심이 생겨나기도 했다. 훨씬 세월이 지나서야 이런 것들이 영적 체험 초기에 나타나는 부조화 내지 부작용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한편으론 깨달았다는 시원함과 약간의 우쭐한 기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찜찜했던 것은 내가 확인한 소위 법이랄까, 진리란 것이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늘 여여부동하지 않고 어떨 때는 불확실했다. 이것이 정말 구경인가, 더 이상 신비한 것은 없는가 하는 미세한 의심이 남아 있었다.
2003년 그 해 겨울 백양사에 계시던 서옹 스님이 입적하셨다. 겨울 방학을 맞아 처가가 있는 제주도에 머물던 나는 서옹 스님의 인가제자 중 한 분으로 알려진 ○○ 스님의 ○○선원을 찾았다. 법당에 마련된 서옹 스님 분향소을 아내와 함께 찾아갔던 것인데, 마침 법당에 들어오시던 ○○ 스님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드리자 당신의 거처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간단한 수인사를 나누고 스님이 내주시는 보이차를 마셨다. 자연스레 공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저런 체험을 말씀드리면서 “이게 끝인가요? 더 이상 없습니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 스님은 오히려 이렇게 되물으셨다.
“더 이상 없는 것 같은가, 있는 것 같은가?”
나는 “더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대답에 ○○ 스님은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 없을 것 같습니다’는 있잖아.”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08. 혼란
체험을 하고 어떻게 지냈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 한동안은 어떠한 경계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서장』에서 과거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대부들이 이 공부를 쉽게 알고 체험 이후에 노력을 등한히 한다는 내용을 배웠으면서도, 막상 그 당시에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대상화하여 그것을 누리고 즐기려 했었던 것 같다. 견해가 놀랄 만큼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니까 공부란 이런 것이고, 공부의 과정은 이렇게 되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다 등등을 나도 모르게 개념화하고 체계화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한 1년이나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이상했다. 분명하고 뚜렷한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눈앞에 또렷했던 경계가, 성성적적하다고 할까, 만질 수 있을 것 같던 각성 상태가 사라지고 예전과 똑같이 이것, 저것이 따로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조금씩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깨달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끔 선생님과 면담을 하면서 이런 사실을 여쭤 보기도 했지만 명확하게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을 더 보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은 더욱 커져서 내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착각을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극도의 불안감을 가져왔다. 뭔가를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법문에 더욱 귀를 기울였으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남산동에 있던 선원은 규모가 더욱 커져 해운대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 시기 즈음에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 못한 나의 어리석음으로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거사님과 선생님 곁을 제 발로 떠나게 되었다.
다시 어둠 속에 빠져든 것이다.
09. 불이
선원을 떠나고 홀로 되자 다시 캄캄한 어둠 속에 떨어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진전도 없이 선생님의 설법을 잘 듣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주저앉아 있기에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선원과 거사님 회상을 떠나고 몇 년 후 범어사에 산책을 갔다가 거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거사님은 나를 보며, “아이고, 심 주사(거사님은 나를 ‘주사主事’란 호칭으로 부르셨다)요, 아이고 심 주사요…….” 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부르셨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공부 길을 엇나간 나를 몹시도 걱정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안부인사만 여쭙고 거사님과 헤어졌다. 그것이 내가 뵌 생전 마지막 거사님의 모습이었다.
다시 미친 듯이 산 속을 헤매 다녔다. 나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장벽을 다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뭔가가 확연하지 않았다.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동그라미에 이가 하나 빠져 있었다. 내로라하는 다른 선지식들의 법문을 들어도 시큰둥했다. 이런저런 책들도 이제 신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정신과학 전문잡지에서 이상한 글을 발견했다. 토니 파슨스Tony Parsons라는 영국인의 짤막한 에세이가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읽는 순간 내가 찾던 무언가를 이 사람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글 검색을 통해 그의 웹사이트를 알아냈다. 공개된 동영상을 보는 순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너무나 분명하게, 너무나 쉽게, 둘 아닌 하나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었다.
그것을 계기로 서구의 영적 지도자들에 대해 1~2년 정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 무렵 토니 파슨스의 강연회에서 나와 같은 영적 딜레마를 해결한 얀 케르숏Jan Kersschot이란 벨기에인이 쓴 『This is IT』이란 책이 국내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란 제목으로 소개가 되었다. 그 책에서 특히 얀처럼 토니 파슨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네이선 질Nathan Gill이란 사람과의 대담이 내 문제 해결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얀과 네이선의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디야샨티Adyashanti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 영민한 미국 출신 영적 지도자의 책 『The End of Your World』(국내에선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가 2010년 무렵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은 완성되었다. 돌고 돌아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아니, 돌아와 보니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어둠 속을 헤맸던 일이나 눈앞에 분명한 깨달음 속에 취해 있을 때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속았을 뿐이었다. 처음 ○○ 불교문화원 다닐 때 성철 스님이 원택 스님에게 주었다는 좌우명을 복사해서 나누어 주었는데, ‘불기자심(不欺自心)’이란 글귀였다. 보통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마라’라고 뜻을 새기던데, ‘자기 마음에 속지 마라’는 말로 풀어도 된다. 스스로가 일으킨 미세한 분별에 걸려 저 혼자 ‘얻었다/잃어버렸다’란 게임을 했던 것이다. 본래 얻을 수도 없고 잃어버릴 수는 더더욱 없다.
비일상적인 체험이 가져다주는 여운, 경계를 법으로 착각하고 그것의 변화에 스스로가 흔들렸던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상(相), 체험에 대한 기존의 검증되지 않은 견해에 스스로가 막혀 있었던 것이다. 『금강경』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여여하여 흔들림이 없다(不取於相 如如不動).”는 말이 소화가 되었다. 방거사의 “있는 것을 없다 할지언정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지 마라.”는 말이 얼마나 친절한 말씀인지 깨닫게 되었다. 보조 국사가 “다만 알지 못하는 줄 알면 그것이 바로 견성이다(但知不會 是卽見性).”라고 말씀하신 의지가 뚜렷했다. 참다운 체험에는 체험의 내용이 없고, 진정한 깨달음에는 깨달음의 흔적마저도 없다. 허다한 분별을 돌아보지 않으면 될 뿐 달리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먼지 티끌 하나 없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불이(不二)였다.
여전히 ‘내’가 있고 ‘나의 깨달음’이 있다면 두 조각이다. ‘깨달음의 상태’와 ‘깨닫지 못한 상태’가 있다면 두 조각이다. 신비로운 체험이 온 것도 아니다. 특별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그러한 것들이 본래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뿐이다. 이런 사실들이 더욱 뚜렷하게 되는 데에는 2011년 가을에 『무문관 평송』 출간 문제로 뵙게 된 ○○사 ○○ 스님의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세상에 전혀 알려진 바 없는 도심 변두리 사찰의 이름 없는 일개 승려일 뿐인 스님의 별다를 것 없는 가르침이, 밧줄도 없는데 스스로를 묶어 놓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님에게 받은 가르침은 『자기에게 돌아오라』란 책으로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이쯤에서 그만 꿈같은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별 시답지도 않은 소리일 뿐이다. 나의 요망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을까 두렵다.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하나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나의 구도여정 따위는 정말 한 잔 술에 취해 곤히 졸면서 꾸는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부디 이 꿈에 속지 마시기를 바란다. 이 모든 글귀를 살려내고 스스로 나의 꿈속에서 같이 춤추는 여러분 자신의 본래면목을 눈앞에서 분명하게 확인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꿈과 깸이 둘이 아니다. 우리는 꿈꾸면서도 깨어 있고, 깨어 있으면서도 꿈꾸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단순한 하나일 뿐이다.
어떤 것이 하나인가?
미소.
- 몽지 심성일님의 저서 <깨달음 12번째 돼지 찾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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